선조를 찾아서

퇴계의 아홉여인(내고향/희구름박)

오토산 2013. 12. 31. 04:28

 

 

 

첨절 안곗니껴?

호명댁이 박순화씨더

저는 오늘 조선의 대성리학자요, 철학자요, 시인이요, 건축가요, 경제가의 ceo였던 퇴계와

 그의여인 아홉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첮번째 여인은 춘천박씨 어매입니다

퇴계선생은 1501년 온혜 노송정에서 칠남매 중 막내로   "공자가 대문으로 들어오는 태몽꿈" 을 꾸고 태어  났는데

세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컸는데 과부의 자식은 베운게 없고 따돌림을 당하고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소릴 들을까 봐   엄하게 키웠으니  퇴계 묘갈명에서도 "나에게 가장많은 영향을  끼친분은 나의 어머니다""라고 한  첮번째 여인은 춘천박씨 어머니요

 

두번째 여인은 21살에 장가를 간 영주 초곡마을(푸실)  허씨부인이다

  아들 준을 낳고 둘째아들 채를 낳은 뒤  산후조리 휴유증으로 일곱달만에  세상을 떠나니 겨우  육년을 함께한   여인이 첮번째 부인인 허씨부인이요

 

세번째 여인은  이름도 성도 없는 묘령의 여인 유모이다

핏덩이인   아들 채를  품에안고  젖동냥을  하던 중 퇴계도 남자인지라  아들 적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을  호적에   올릴수 밖에 없었고 또 뼈를 깍는 아픔을  퇴계의 가슴에 묻을수 밖에 없었던 성도 이름도 없는 여인이요

 

 네번째 여인으로는  두번째로 맞이한 가일마을의 권질의 딸  권씨부인이다

  갑자사화때 예안으로 유배를 온  권질이 사화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한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반듯한 퇴계를 접하자 "자네가 상처를 했다는데  우리딸을 맡아주면 죽어도 눈을 감을수 있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라는 어른의 간곡한 부탁에  거절을 못해   그 자리에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온혜남쪽에  달팽이집같은  "지산와사"를 짖고 살면서 이 부인을 맞이하고 늧깍기 유생으로  34살에 과거급제를 해  벼슬길에 올라  한양 서소문에다 집을 빌려  살림을 차려 나랏일을 보면서도 부인의 끼니를  챙겨줄 정도로  정을 준 여인이다.  밤퇴계, 낮퇴계와   빨간댕기 천으로  기운 도포자락이   당대 유생들의 패션계의 핫이슈가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겨 조선시대의 팻션계의 원조인 권씨부인도  47세에  이별을 하게되나  자식은 없었다. 예안의 선산 백지산에  장사지내고  아들준과 시묘살이 삼년을 함께하며 슬픔을 달래 퇴계가 한평생 떠 받들고 산 여인이요

 

다섯번째 여인으로는  관기 두향이다

두번째 부인까지 상처를 잃고  홀아비의 처량한 신세로  단양군수로 부임을 받게 되는데 환영식때 관기인 두향이가  퇴계를 보는순간  마음을 송두리채 뺏겨 상사병을 앓아 몸져 눕게 되는데 퇴계는 특히" 청매화를 좋아하니 청매화 분을 하나 길러 선물을 해보라" 는 말을듣고 곱게 손질한 매화분을  선물로 건넸더니  안동포보다 더 빳빳한 퇴계마음을 가져 올수 있게 되었다 한다.

평소에  "매한불매향"이라 하여 매화를 극진히 섬겨왔던 퇴계였으므로   두향이의 청매화분을 받고 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마음은   핫바지 방구 새듯이  내려놓아  남한강 옥순봉 반타석에서 두향이와  거문고를 뜯으며  날이 새는줄도 모르는  달빛같은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어지나 싶었으나  9개월만에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자  내일이면  떠너야 하는 심정을  퇴계는 정자관을 고쳐쓰며  이렇게 읊는다

"내일이면 떠난다.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두향이는 말없이 먹을갈아 붓을 들며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어

어느 듯 술 다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 할까 하노라"

두향이가 준 청매화분과 남한강의 수석 두개만 품안에 품고 풍기로 오고서도  퇴계는 청매화분을  두향이 어루만지듯이 애지중지 했다 한다   벼슬을 그만두고  도산  한서암에서 눈을 감을때까지  두향이의 얼굴은 살아생전 볼수 없었으나  매화분을 곁에두고 매화시를 108수나 남겨 애절한 조선판 선비의 사랑이라 하겠다  두향이는 관기에서 스스로 물러 나  남한강에서 운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는데 퇴계가  보낸 도산서당 앞 열정  우물물이  황톳물로 변해 버려 사흘 밤낮을 걸어 도산에 오니 건지산위로 퇴계선생의 행여가 훠이 훠이 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두향이는 그 길로 단양으로 돌아가  남한강위에 신발을 벗어 치마를 뒤집어 쓴채  생을 마감하니 지금도 충주호 옥순봉 앞  "두향이지묘"가 있으며 단양 문화원에서는  아직까지 두향이제를 지내고 있다

 이씨문중에서 초대를 받아 몇번 행사에 참석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요즈음은 문중에서 입을 열지 않고 꾹 다물고 있었으나  안동영상콘텐츠박물관에서 "사모"라는 뮤지컬을 제작해 세간에 이목을 받더니 학문이 높으신 선생님과 두향이의 [조선판  지고지순한 사랑]이라 하여  드디어 국정교과서에 실리게 되었고 그때 두향이로 부터 받은 청매화는 도산서당옆 "매화원"에서 해마다 그향기를 꽃으로 전하고 있으며  관기 두향이는  평생 퇴계를 떠 받들고 산 다섯번째 여인이요

 

여섯번째 여인은  봉화금씨인 맏며느리다

며느리 집안에 큰일이 있어  어르신들이 가게 됐는데 집안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퇴계가 돌아간 뒤에 퇴계가  앉았던 구들장까지 파냈다는  일이 벌어 졌는데도  

"우리 며느리가 알면 마음이 심히 불편 하니 아무일도 없었던걸로 하자"고 했으나 며느리가 돌아와 그일을 알고

"정말 우리 시아뱀은 이세상에도 없다

나는 죽어서라도 시아버지를 모시고 싶으니 내 죽거든 머리라도 아버님 곁으로 돌려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겨 건지산 퇴계산소 바로 밑에 비도 없는  무덤이 있으니 아직도 시아버지를 잘 보필하고 있으므로 이 여인이요 

 

일곱번째 여인은 모윤숙 한명숙이다

1995 년도에 도산서원을 관람하고 상덕사에 알묘를 하려고 서울에서 천리길을 달려 와  

삼실과와 국화꽃 한다발을   준비해 왔으나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참배를 거절 당하자   대성통곡을 하고  눈물을 한버지기는 흘리고 돌아갔으니 그 여인들이요.

 

 여덞번째 여인은 이휘호 여사이다

문중의 회의를 거쳐 드디어 428년만에  여성의 성역화가 무너지게 되어

김대중 대통령과 도산서원 상덕사를 알묘한 여자중에 첮번째 여인으로서  " 성현의 고장 도산서원에 와

퇴계선생님을 뵙게 된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 합니다"라며  감격의 눈물을  한바가치는 흘린 여인이 영부인 이휘호 여인이며

 

아홉번째 여인은 덴마크의여왕  마르그레테이다

퇴계는 사후 500년만에 처음으로  파란눈의 서양 여인을 만나보나 하고 이제나 저제나  의관을 정제하고 상덕사에서

바짝 조자앉아 기다렸으나 오기로한 날 아침에 

 "부군이 건강이 안줗아 갈수없다"는  통보를 받게 되자  퇴계는  정자관을 내동댕이 치며  어옜는동 아니껴?

"난 역시 여복이 없단 말이야!!

 내 제자인 서애는 1999년에 벌써 영국여왕 엘리자베츠 여왕을 만났는데  이게무슨 변고인고!

난 역시 내 팔자소관대로  매화시나 읊으며 책이나 읽어야 겠다"라고  하시었답니다.

 

하지만 선생님!

너무 알찌근해 하지 마십시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안동문화원에서 "그오래된 이야기꾼"에서 선생님과 여인을 이바구 할수있고 또 "문화관광해설사"가되어 안동각처에서 선생님을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상 퇴계와 그의 여인 열여인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졸업사진;

                                                                                                 문화원장님과 담당선생님

                                                                                                 그리고  발표한글과 수상자들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