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호와 아호에 얽힌 이야기

오토산 2014. 7. 5. 10:41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꼬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9〉

‘동방의 주자’로 추앙받는 퇴계(退溪)이황 선생은 조선중기 당대의 사회 주도층으로 성장하고 있던 사림세력의 활동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역사상 아주 훌륭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천원 권 지폐에 새겨진 대표적인 위인이기도 하다.

이황 선생의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ㆍ지산(芝山)ㆍ도옹(陶翁)ㆍ퇴도(退陶)ㆍ도수(陶叟)ㆍ청량산인(淸凉山人)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퇴계(退溪)’라는 아호는 ‘물러나 계곡에 머문다’는 뜻의 ‘퇴거계상(退居溪上)’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흔히 옛 위인들의 이름을 찾다보면 자(字), 아호(雅號), 시호(諡號) 같은 말이 나온다.

그 뜻을 풀이해 보자면, ‘자(字)’란,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으로, 예전에는 이름을 소중히 여겨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던 관습이 있었다. 자(字)는 남자가 성년이 되어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의례인 관례(冠禮)를 마친 뒤에 본이름을 대신해서 부르던 이름이다. 자는 일반적으로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라 부모나 스승 같은 연장자가 지어준다. 특히나 자(字)를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게 부르면 실례가 된다.

아호(雅號)는 문인이나 예술가 따위의 호나 별호를 높여 이르는 말인데 자와는 달리 아호는 누가 불러도 괜찮은 품격과 멋을 겸비한 자유로운 이름이다. 아호는 본명과는 달리 음양오행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퇴계 이황과 함께 동방18현 중의 한분이자 성리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일두(一蠹)정여창은 자신의 호를 나무를 파먹는 한 마리의 하찮은 좀벌레라는 뜻으로 ‘좀 두 蠹’자를 써서 일두(一蠹)라 하였고, 조선조의 퇴계 이황과 함께 유학의 쌍벽으로 잘 알려진 율곡(栗谷)이이는 어려서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의 밤나무골 지명을 빌어 율곡(栗谷)이라 하였으며, 우리에게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잘 알려진 실학자 연암(燕巖)박지원은 자신의 귀양지였던 황해도 연암협의 지명을 따서 연암(燕巖)을 호로 삼았다. 또한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대표적인 청백리였던 눌재(訥齋)박상 선생은 자신이 어눌하고 못났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눌재(訥齋)라고 정했다. 민족독립운동가 백범(白凡)김구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호를 백범(白凡)으로 지었다. 조선3대 명필로 유명한 추사(秋史)김정희는 추사(秋史)ㆍ완당(阮堂)ㆍ시암(詩庵)ㆍ예당(禮堂)ㆍ노과(老果)ㆍ농장인(農丈人)ㆍ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약 오백여개의 호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끝으로 시호(諡號)란, 왕ㆍ왕비를 비롯해 벼슬을 했던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한다. 조선 초기까지는 왕과 왕비, 왕의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완화, 확대되었다. 이에 생전에 낮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도 증직되어 시호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이 때 시호 내리는 일을 ‘증시(贈諡)’라 하고, 후대에 추증해 시호를 내리면 ‘추시(追諡)’라 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을 예로 들어보면, 시호를 의정할 때는 세 가지 시호를 올리는 것. 즉, 삼망(三望)이 원칙이었다. 나라의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아인 봉상시(奉常寺)에서 당시 의논한 세 가지 시호는 ‘충무(忠武)’, ‘충장(忠壯)’, ‘무목(武穆)’이었다. 그리고 이 때 의논한 자의(字意)는 위신봉상(危身奉上). 즉,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절충어모(折衝禦侮). 즉, 쳐들어오는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무(武)’라 하며, 승적극란(勝敵克亂). 즉, 적을 이겨 전란을 평정함을 ‘장(壯)’이라 하고, 포덕집의(布德執義). 즉, 덕을 펴고 의로움을 굳게 지킴을 ‘목(穆)’이라 풀이하였다. 이 가운데 시호 서경을 거쳐 확정된 시호는 ‘충무(忠武)’였다고 한다.

퇴계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2세에 정신적 지주이던 숙부로부터 《논어(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이황의 나이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오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슬을 머금은 풀은 파릇파릇 물가에 둘렀고 / 露草夭夭繞水涯(로초요요요수애)
자그만 연못이 맑고 조용하여 모래하나 없이 깨끗하구나 / 小塘淸恬淨無沙(소당청념정무사)
구름이 날고 새가 지나감은 탓할 바 없으나 / 雲飛鳥過無相管(운비조과무상관)
다만 때때로 제비가 물을 찰까 두렵다. / 只怕時時燕蹴波(지파시시연축파)

퇴계는 을사사화 직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자신의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란 곳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에 들어갔다. 이때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여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다. 끝내 퇴거(退居)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자, 퇴계는 이를 피해 전임을 청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 군수인 주세붕이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ㆍ서적(書籍)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을 말한다.

퇴계의 나이 60세에 지금의 안동 땅에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ㆍ수양ㆍ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薰陶)하였다. 명종은 예를 갖추며 자주 퇴게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이에 명종은 신하들과 함께 ‘어진 이를 초빙했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다’〈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이암(頥庵)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은 병풍을 만들어서 용상의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최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