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병 앓으며 生命 사랑 노래한 토담집 살이 시골 교회 鐘지기
마분지 문패와 판자 덧댄 변소
상처·소외를 보듬고 이겨내는 낮은 삶들이 전하는 溫氣까지
安東 집터엔 그의 흔적 가득해
-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일직면 조탑리는 300가구 남짓 사는 한촌(寒村)이다. 짧은 해 성급하게 기운 세밑 오후가 스산하다. 일직교회는 마을 안 찻길가에 소박한 벽돌집으로 서 있다. 1968년 서른한 살 권정생이 병과 가난에 지친 몸을 기댄 곳이다.
그는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청소와 삯바느질을 하던 부부의 일곱 남매 중 여섯째였다. 광복 후 아버지 고향 일직면에 돌아왔지만 삶은 내내 모질었다. 부모는 소작으로 연명했다. 권정생은 초등학교를 나와 행상으로 떠돌며 동냥까지 했다. 결핵이 번져 콩팥 하나와 방광을 떼어낸 뒤 평생 소변 주머니를 달고 살았다. 키 170㎝에 몸무게 37㎏을 넘은 적이 없다.
그의 말대로 '유랑 걸식하던 폐병쟁이'를 교회가 거뒀다. 문간채 방 한 칸에서 더부살이했다. 지금 종탑 옆 콘센트 건물 자리에 있던 토담집이다. 서향(西向) 방이 몹시 추워 동상 걸린 귀가 봄 돼서야 낫곤 했다. 그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 이런 대목이 있다. '생쥐들이 아랫목 이불에 들어와 잤다.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었다.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 아예 발치에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그는 문간방 들어간 이듬해 첫 동화 '강아지 똥'을 썼다. 개똥이 거름 돼 민들레꽃을 피워내는 이야기다. 아무리 하찮은 것도 쓸모가 있다며 생명 사랑을 말했다. 기독교 잡지 공모에 당선돼 그를 아동문학가로 이끈 작품이다. '강아지 똥'을 표제작으로 삼은 동화집은 100만부를 넘기고도 꾸준히 팔린다.
권정생은 1982년 종 줄을 놓았다. 교회 종이 차임벨로 바뀌면서다. 87년엔 앞마당에 신작로가 나 그의 흔적도 희미해졌다. 새 예배당이 섰고 나무 종탑도 사라졌다. 지금 종탑은 6년 전 그를 기리는 대구 어느 유치원장이 돈을 대 세웠다.
교회에서 되돌아나온 길가에 '권정생 선생 살던 집 150m'라는 표지판이 오른쪽을 가리킨다. 이장댁과 농기계 창고 사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조붓한 돌담길이 이어진다. 권정생이 돌담 아래 개똥에 핀 민들레를 봤다는 그 길일까. 밭둑길과 상여 두는 곳집도 지난다. 후미진 길 끝에 울타리 없는 흙집이 있다. 1983년 교회를 나온 권정생이 지어 2007년 떠나갈 때까지 홀로 살았던 여덟 평 집이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문 위엔 접은 마분지를 못 박아 붙이고 '권정생'이라고 썼다. 그다운 문패다. 전기 없던 시절 그는 마요네즈 병에 심지 세워 호롱불을 켰다. 막대에 비닐 비료 부대 씌워 부채로 썼다. 마당엔 아픈 몸에 좋다는 약초를 심었다. 한 평 부추밭도 일궜다. 변소는 자투리 판자를 덕지덕지 덧댄 누더기 문을 달고 있다. 그런 집이 '따뜻하고 조용하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 참 좋다'고 했다.
그는 '한 달 생활비가 5만원이면 좀 빠듯하고 10만원이면 너무 많은 삶'을 살았다. 그렇게 아껴 모은 인세 12억원을 몸과 마음이 아픈 어린이들을 위해 남겼다. "어린이가 사 보는 책에서 나온 인세이니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유언했다.
마당에 서면 개울 건너 일직교회가 한눈에 든다. 그가 집터를 고른 이유다. 수돗가 산수유가 벌써 움을 틔웠다. 마른 풀 같은 부추밭도 봄이 오면 파랗게 돋아날 것이다. 그가 쓴 동화·시집·소설 마흔 몇 권은 하나같이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는 삶들을 다뤘다. 그들은 서로 보듬고 다독이며 상처와 소외를 이겨낸다. 봄마다 푸르게 살아나는 부추처럼. 민들레꽃 피운 강아지 똥은 권정생 자신의 인생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살던 외롭고 낮은 곳에서 뜻밖에 따스한 위안을 얻는다.
동남쪽 5㎞ 망호리로 갔다. 권정생의 또 하나 대표작 '몽실 언니'의 무대 노루실이 있던 마을이다. 그곳 폐교에 '권정생 동화나라'가 들어섰다. 유산과 유언을 집행하는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운영한다. 전시실에서 유품을 만났다. 앉은뱅이 밥상은 글 책상으로 쓰느라 칠이 다 벗겨졌다. 여름과 겨울 번갈아 신었던 고무신과 털신, 보름마다 소변줄 갈아 끼우면서 썼던 핀셋과 소독약….
권정생은 일흔 살에 어머니께 돌아갔다.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안간힘 다해 부른 이름도 "어메 어메"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들보다 43년 앞서 저수지 공사장에서 쓰러져 떠났다.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 평생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어머니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던 소원도 이제 그는 풀었을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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