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이와 서경덕의 사랑 ♣
▲ 황진이의 아름다움 ...
♣ 황진이와 서경덕의 사랑 ♣
옛부터 신록의 5월은 사랑의 계절이라 했지요
그래서 싱그러운 5월을 맞아 사랑 타령을 해보기로 했어요
우리 역사속에는 선비와 기생(妓生)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지요.
그중 대표적인 것이 "황진이와 서경덕" "두향과 이황" "홍랑과 최경창"
"이매창과 유희경" 이라 하지요
이를 보고 조선시대의 4대사랑이라 한다 하는군요
오늘부터 4회에 걸쳐 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옮겨 보기로해요
그럼 제일 먼저 "황진이와 서경덕"의 사랑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어느날인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지요
속 고쟁이도 없이 홋저고리 홋치마만 입고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걷고 있는 여인이 있었어요.
세찬 비를 맞은 온몸은 속옷이 달라붙어 벌거숭인냥 육감적인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지요
터질듯한 풍만한 가슴 ..
물오른 요염한 응댕이 ..
누가봐도 음심이 생길만한 요염한 자태 였지요.
그런 모습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누군가 은거하고 있는 초당으로 들어갔어요.
거기엔 서경덕 이라는 사람이 홀로 기거 하고 있었지요.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선비는 아리따운 반나의 여인을 보자
"왠 비를 이리도 맞았노?
어서들어오시게!! "하며 스스럼 없이 반겨 주었지요.
그러면서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손수 아예 여인의 옷을 홀딱 벗겨 버렸지요.
알몸이 되도록 옷을 벗기고 직접 물기 까지 닦아주는 선비를 보고
여인은 쾌재를 불렀어요
오히려 아름다운 전나의 몸을 요리조리 보여주며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선비를 유혹했지요
그러면서 여인은 "저도 x달린 사내인 것을……" 하며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어요.
마침 여인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선비는 마른 이부자리를 펴는것이 아닌가?
" 그럼 그렇지 ㅎㅎ... "
여인은 알몸의 몸으로 이부자리에 누우면서 더욱더 요염한 자세로 교태를 부렸어요
"잠시후 씩씩 거리며 덤벼 들겠지? ㅎㅎ "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선비는 눈도 깜짝 안하며 마른 이불을 덥어주며 몸을 말리라고
하면서 옆에 있는 책상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글읽기를 시작했지요
"아뿔사 ~ 머 저런 사내가 다 있어 ... 어디 두고보자 누가 이기나? ... "
시간이 지남에 날은 어두워지고 이윽고 밤은 깊었지요
그런데도 선비는 책만 읽고 있었어요
물오른 여인은 화도 났지만 오기가 발동했지요
그래서 이불을 걷어 치우고 벌거벗은 몸으로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노골적인 유혹을 했어요
출렁이는 촛불에 비친 농염한 요부의 나신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지요
아니나 다를까 삼경쯤 되자 선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옷을 훌훌 벗고던지고 여인의 옆에 누웠어요
"올치~ 이제사 사내의 본색을 드러내는구먼..."하면서 좋아 했어요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옆에 눕자마자 선비는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꿈나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 아니 이 양반이 ... "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황진이가 아니었지요
" 그래? 어디한번 견디나 두고보자 ... "
여인은 농익은 육체를 밀착시키고 서경덕의 온몸을 애무 했어요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 혹 고자가 아닐까? " 의심이되어
이번에는 바지를 벗기고 선비의 약물을 만져 보았으나 크고 우람했지요
"그럼 그렇지 .. 어디 견디나 봐라 ~ "하면서 커다란 약물을 쥐고 흔들었어요
그러나 선비는 코를 더세게 골며 아무런 기척이 없었지요
여인은 놀랍기도 하였지만 자존심이 많이 상하여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지요
아침에 눈을 떴을때 선비는 벌써 일어나 아침밥까지 차려 놓고 있었어요
그가 바로 황진이가 진정으로 사랑한 화담 서경덕 이었지요
밤새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라도 황진이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빙그레 웃는 서경덕 !! 정치가 타락하거나 정도에 어긋나면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곤 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 황진이는 성거산 암자를 다시 찾았지요
물론 화려한 기생옷은 벗어 버리고 조촐한 모습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아갔지요
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이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어요
방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고 애원을 했지요
이렇게 해서 제자겸 사랑하는 연인으로 두 사람은 발전 했지요
그런데 어느 야사에도 서경덕과 황진이가 정분이나 운우지락을 누렸다는 기록은 없어요
다만 둘의 관계가 연민의 정을 느끼며 오직 흠모 혹은 존경이라는 단어뿐이었지요
어느날 황진이가 문득 서경덕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 송도에는 꺾을수 없는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지요
"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십니다 "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어요
" 세번째는 바로 접니다 ㅎㅎ "
송도에 있는것 중 도저히 꺾을수 없는 세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가지를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지요
이 송도삼절은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어요
서경덕도 동감이나 하는 듯이 소리 없는 미소만 지었다 하지요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은 대학자 였어요
그는 당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도 부패한 조정에 염증을느껴
벼슬을 마다하고 일생을 학문만 벗삼았던 학자였지요
집은 극히 가난하여 며칠 동안 굶주려도 태연자약하였으며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하였고
제자들의 학문이 일취월장 하는것을 큰 낙으로 여겼다 하네요
평생을 산속에 은거하고 살았으며 세상살이에는 관심이 없는것처럼 보이는듯 했지만
이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지요
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 개성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었어요
벽계수와 지족선사를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래서 기생으로서 많은 선비들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도 써 보았던 것이지요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했고 뛰어난 총명성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여성이었어요
노래 뿐만아니라 학문에도 정통했고 詩에도 능했지요
그러나 그때는 천하일색 황진이도 산전수전 다 겪은 물오른 요부(妖婦)였는지도 몰라요
당시 내노라 하는 선비들은 그녀와의 하룻밤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겼지요
그래서 그녀와의 뜨거운 하룻밤의 일화들은 책으로 또는 구전으로 많이 전해오고 있어요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하루아침에 파계시켜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를 "십년공부 나미아무타불"로 만드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보기좋게 꺾어놓기도 하였지요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이가 벽계수를 유혹하며 지은 시조 이지요
또 어느날 대제학과 판서를 지낸 소세양이 황진이가 타고난
명기(?)라는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을 것이다"라고 장담했지요
이 소문을 들은 황진이가 의도적으로 소세양을 찾았고
소세양은 한번에 그를 보고 넋을 잃었다 하지요
그러나 만난지 30일이 되어 이별하는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처음의 호언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 하지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이 시조는 소세양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고 전해지고 있지요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졌지요
그리고 내노라하는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섭렵하기도 했지만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중에게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그 밖게도 황진이와 가깝게 교제한 사람은 많았으나 대표적인 인물은 왕족인 벽계수(碧溪水) 소세양 그리고 명창 이사종, 한량 이생 지족암에서 30년을 수도한 지족선사(知足禪師)였지요
세상 남자들은 황진이가 앞에 나타나면 모두가 넋을 잃을정도로 그 아름다운 자태와
미모에 반해서 오금을 못폈는데 오직 한사람 서경덕만은 꼬장꼬장 하여
한밤중 동침을 하면서도 지조를 지켰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서경덕이 아무리 도학자이고 뛰어난 사상가라고는 하나 그도 역시 사내였지요
그는 당시 결혼도 했고 첩까지 두었었다 하지요
그런 그가 여자를 모를리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와의 관계는 왜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했을까요?
이는 황진이도 마찬가지였지요
서경덕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스승을 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지 사내로서의 서경덕이 아니었어요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이시는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서경덕을 향한 변치않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어요
그런데 묘한 것은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 했어요
그가 남긴 시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지요
"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만겹으로 구름이 둘러싸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본다 "
이 시에는 황진이를 향한 서경덕의 마음이 은근히 서려있지요
그럼 황진이는 어떠했을까요?
그녀 역시 비록 스승으로 서경덕을 모시고는 있지만 끔찍이도
그를 흡모 했지요 서경덕이 부른 시조에 곧바로 화답 했어요
" 내 언제 신(信)이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 내가 언제 신의도 없이 님을 속였겠는가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달 밝은 깊은 밤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지요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낸들 어쩌겠어요? "
이 시 또한 그대의 마음을 잘알고 있지만 나 또한 애타는 마음이란 뜻이지요
나도 당신이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까지 낸들 어쩔수 없잖아요?
그만큼 나도 당신이 보고 싶다는 말이었지요
사실 화담 서경덕이 황진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부녀지간과도 같은 많은 나이 차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31살 정도 많아요)
다시말해 요즘의 원조교제 같은 것을 명예를 생명으로 아는 대쪽같은
선비로서 감히 꿈도 꿀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와도 시(詩) 놀이 이상 분위기가 되면 홀연히
자리를 뜨곤 해서 황진이 애간장을 타게 했다 하지요
결국 황진이는 그러한 화담선생의 야속한 마음과 그리움을 시조로 읊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서경덕의 문집에는 황진이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요
물론 양반 사대부의 문집에 기생과의 교유를 기록한 예가 없어 그럴수도 있다
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지고한 정신적 사랑만 나누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인지도 몰라요
황진이는 화담에게서 인간의 참모습 우주의 진리 등을 배우고 깨달았지요
화담을 모시고 도학을 배운후 그녀는 저항의 방향을 달리했어요
황진이도 도학자가 된 것이지요
화담의 도학은 '기일원론'으로 모든 사물이 기작용에 의해 생성 발전한다는 것이었지요
황진이가 이를 터득할 무렵 화담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어요
(황진이가 27세때)
황진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정인을 잃은 것이지요
화담 선생은 제자 이지함(토정비결의 작가)와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닌 적이 있어요
그러면서 제자 이지함으로 하여금 토정비결의 기초가 되게 하였지요
훗날 황진이는 화담이 그리울때면 홀연히 집을 나서 화담의 발이 닿았던 곳,
곧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을 찾아다녔지요
화담이 내디딘 발자취를 따라 운수행각을 한 것이지요
그러다 황진이는 세상의 모든 명리를 끊고 세상의 이목도 피해가면서 지팡이와
짚신을 벗 삼아 전국을 떠돌아 다녔어요
이것은 단순한 유람이 결코 아니었지요
스승이자 연인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크고 작은 숨결을 느끼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녀는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결국 그렇게 흠모했던 화담의 곁으로 간 것이지요
그런데 황진이의 마지막에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이지요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어요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그러나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되었지요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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