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때
양진(楊震 ?~124)이 동래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창읍 현령 왕밀(王密)을 만났다.
그는 예전 양진의 추천을 받아 벼슬을 시작했으므로
은혜로 여겨 밤중에 찾아와 황금 열 근을 바쳤다.
"나는 그대를 알아보았는데,
그대는 어째서 나를 모르는가?
왕밀이 말했다.
"어두운 밤이라 아무도 모릅니다."
양진이 대답했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네(四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 하는가?“
왕밀이 부끄러워하며 나갔다.
그는 청렴해서
자식들이 거친 음식을 먹고
외출할 때도 걸어 다녔다.
벗들이 먹고살 도리를 하라고 하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후세에 청백리의 자손으로 일컬어지게 하려 하네.
이것만 남겨줘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의 둘째 아들 양병(楊秉·92~165)은
아버지를 이어 환제 때 태위 벼슬에 올랐다.
정치가 잘못되면
그는 늘 성의를 다해 임금에게 간언했다.
양병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젊어서 아내가 세상을 뜨자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그 또한 청렴으로 사람들의 기림을 받았다.
그가 말했다.
"나는 술과
여색,
재물
이 세 가지에 흔들리지 않았다.“
잘나가다가도
늘
술과
여자,
재물의
삼혹(三惑)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군자가
사소한 것조차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몽구(蒙求)'에 보인다.
남송의 진덕수(眞德秀)가 말했다.
"사군자의 처세에서
한껏 청렴함은
작은 선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한 탐욕으로 더럽혀지면
평생의 큰 죄악이다."
이 말을 받아
'간옹우묵(艮翁疣墨)'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청렴이란
작은 선일뿐이어서
군자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청렴이 무너지면
비록 다른 훌륭한 점이 있더라도
미녀 서시(西施)가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아
코를 막지 않을 사람이 드물다.
어두운 밤이라고 말하면 안 되니
사지(四知)를 속이기 어렵다.“
사이가 좋고 서로 배짱이 맞을 때야
뇌물을 받아도 뒤탈이 없겠지만
잠깐 만에 관계가 틀어지면
아무도 보지 못한 데서 동티가 난다.
그때 가서 증거를 대라고 우겨도
이미 이름은 더럽혀진 뒤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