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자 퇴계 이황의 선생으로서의 모습.
[조선시대 성리학자 퇴계 이황의 교육사상]
퇴계 선생은 후학(後學)을 가르침에 있어 싫증을 내거나 귀찮아 하지 않았으며,
친구처럼 대하여 끝내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와서 묻고 또 물으면, 그들의 정도의 깊이를 따라 일러주었으며,
반드시 뜻을 세우는 것[立志]으로 우선을 삼고 주경(主敬)과 궁리(窮理)를 공부의
바탕으로 삼아서, 다정스럽고 친절하게 인도하여 끝내 깨우쳐 주고야 말았다.
선생은 의(義)와 이(利)의 구별에 엄하였고, 가지거나 버리는 것을 자세히 분간하였으며, 의심을 따지고 숨은 것을 밝혀서 털끝만한 일이라도 그저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았다.
진실로 의가 아니면 녹이 아무리 많아도 받지 않았고,
지푸라기만한 것이 생겨도 취하지 않았다.
착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미워하는 것은 그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남의 착한 행실을 보면 몇 번이라도 칭찬하고 격려하여 그것을 반드시 성공하게 하였고, 남의 잘못된 행실을 들으면 되풀이하여 탄식하고 아껴서 반드시 그것을 고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간에 모두 그에게서 유익함을 입어
누구나 그를 사모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착하지 못하다는 이름이 그에게 들릴까 두려워하였다.
선생은 도산서당에서 연구와 후진양성에 정성을 쏟았다.
그는 옛 사람들이 전하지 못한 묘[古人不傳之妙]를 스스로 찾아 보고자 한 것이었다.
끈기있는 노력으로서 성리학자, 철학자로서의 탁월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심성수양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흔히 세상사람들은 정서에 결여된 면이 많으나 선생은 그러한 면을 완전히 탈피하였으며 후진을 가르칠 때도 자상하게 그리고 예의를 갖추어 지도하였다.
서양에서도 많은 교육자가 있었지만 퇴계는 동서 고금을 통해서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산에 은거하면서 많은 저술과 후진들을 양성하는데
일심전력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선생은 관료적 교육자의 입장에서 그의 교육관을 밝힌 일이 있다.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元氣)의 본거이다.
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 지도록 하라.
모름지기 서로 칙려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예로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겸손하게 행동함으로서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 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충신의 마음가짐과 겸손한 행실로서 예의를 실천하고 경세의 기운을 잃지 않는
선비를 길러야겠다고 생각하였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길이라 믿었다. 이것이 곧 퇴계의 교육관이다. 그리고 퇴계가 지향하는
교육자의 상이란 바로 이와 같은 '선비의 육성자'가 되는 것이었다.
선생은 단순 지식만 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차원에서
인격형성에 감화를 줄 수 있는 이른 바 '진정한 스승'이 되어야 한다.
선생이 이러한 '스승의 상'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제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제자에 대하는 것을 마치 벗처럼 하였다.
(1) 비록 어린 제자라 하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며 보내고 맞이할 때는
항상 공손히 경(敬)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2) 늘 드나들며 배우는 제자일망정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받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의례 부형의 안부부터 물었다고 한다.
(3) 평일의 경우에도 제자가 먼 길을 떠나면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여 보냈다는 것이다.
(4) 수업에 있어서는 각 제자의 학문 정도에 따라 각기 알맞게 가르쳤고
반복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러한 가르침에 조금의 염증도 느끼지 않았다.
(5) 비록 병으로 아파도 강론(講論)을 쉬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는 이미 중환이었는데도
강론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 제자들이 뒤늦게 깨달을 정도였다.
(6) 선생의 강론은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다한 것을 직감한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4일전에
자제들이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죽는 마당에 제자들을 아니 볼 수 없다."하며
제자들을 불러놓고 "평소에 올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강론한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마지막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이와같이 제자에 대한 정중한 예의와 성실한 강론은 높은 인격과 제자에 대한
깊고 뜨거운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선생이야말로 무한한 애정을 쏟을 줄 아는 동시에 강한 인격의 감화를 줄 수 있는
'성실한 스승의 상'을 남겨 주고 있는 것이다.
퇴계의 문인은 참으로 많아 유명한 사람만도 360여명이나 되니,
우리나라 교육사상(敎育史上)에서 최고요, 실로 경이적인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비롯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월천(月川) 조목(趙穆), 한강(寒岡) 정구(鄭逑),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사암(思菴) 박순(朴淳) 등
당대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제자가 쏟아져 나온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선생이 글이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준 교육에 관한 '잠언']
1.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아니다.
2. 배우는 사람의 공부 가운데 심신을 닦는 것보다 절실한 일은 없다.
3. 심신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제 잘난 체하지 말고 말은 함부로 하지 말라.
4. 몸가짐을 공손히, 일을 맡으면 공경히, 남과의 사귐은 정성스레 하라.
5.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어 동요하지 않음이 마음의 근본이다.
6. 진리가 가까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7.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8. 스스로의 힘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자포자기와 같다.
9. 일상생활에서의 언동은 보편타당성이 있으면 잘못이 없다.
10. 바른 것을 지키자니 어려움이 많고 무리를 따르자니 자신을 잃는다.
이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다.
11. 비록 귀한 손님이 와도 성찬으로 대접하지 않았으며.
낮고 어린 손님이라도 소홀히 대접하지 아니하였다.
12. 나아갈 때 나아갈 수 있어야 진실로 의이고,
나아가서 안될 때 나아가지 않은 것 또한 의이다.
13. 도의 큰 근본은 하늘에서 나왔으나
이는 사람의 마음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14. 부부는 인륜의 시초며 만복의 근원이다.
비록 지극히 친밀한 사이지만 또한 지극히 바르고 삼가야 할 자리이다.
15. 단 한번의 사특한 생각이 곧 소인의 성질로 이끌게 되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
16. 빼앗을 수 없는 뜻과, 꺾이지 않는 기상과 흐리지 않을 앎을
늘 지니도록 하라.
17. 자기 힘으로 하되 사견을 고집하는 사람은 진리를 해치는 자와 같다.
18. 언제나 도의심을 길러 선비를 키워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19. 의리가 무궁하기 때문에 학문의 길 또한 무궁하다.
인심은 악에 물들기 쉬우므로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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