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퇴계와 두향의 사랑(우받세/취람)

오토산 2016. 4. 28. 17:50

 

 

퇴계(退溪)단양군수와 두향(杜香)관기(官妓)의 사랑

退溪(李滉, 1501~1570)는 韓.中.日 동양 3국에서 孔子 孟子와 같은 성인으로

추앙받아 李子로 받들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은 임진왜란 때 退溪全書를 몰래 가져가 복간한 뒤에 추종학자들이
李子全書라는 이름으로 다시 간행했다. 일본에서 이 학맥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서,
우리나라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일본의 교육칙어(敎育勅語) 근본사상으로

 자리잡기까지 했다.

이러한 훌륭한 성인군자도 한 기생과의 사이에 애절한 사랑이 있었다.
조선 13대 명종때 퇴계는 48세로 단양군수를 제수 받아 부임하게 되며
당시 경직에 있던 관리가 지방으로 부임하게 되면, 노복(奴僕) 한 명과
아들 한 명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이른바 단신부임이 원칙이었다.
그 대신으로 그 관청에 속한 관기(官妓)가 밤낮으로 관리의 수발을 들었다.
춘향전에서 남원군수(使道)변사또 (본명 변학도) 기생(妓生)점고 를 하고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 한 것도 이런 법도에서 나온 것이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해서 수청을 든 관기는 18세의 두향(杜香)이었다.
두향은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됐는데 퇴기(退妓) 변씨가 데려다가

시문과 야금을 가르쳤다가 후에 기적에 올리게 됐다.
변씨는 매화 분재를 잘했는데 두향도 따라 배워서 분재에 능했다.
퇴계는 2년 전 둘째부인 권씨와 사별한데 이어 아들까지 잃어서 외로움과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우울할 때 절세미모에다 시문에도 능한 젊은 두향을 본

퇴계는 첫눈에 마음에 들어 애지중지하게 됐다.
두향이도 학문과 도덕이 높은 사또를 흠모하고 존숭하며 가까이서 모시게 됐다.
이렇게 둘은 첫눈에 서로 좋아져서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게 됐다.

퇴계는 시간이 나면 두향과 함께 강변을 거닐기도 하고,
강가에 자리 잡고 앉아 두향이 타는 가야금 소리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퇴계는 단양의 경치가 하도 좋아 단양8경을 만들어보려고 했으나
한 가지가 모자라 7경밖에 되지 않아 내심으로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경치가 빼어난 옥순봉이 단양 땅이 아니라 이웃 청풍 땅이었다.

이것을 눈치 챈 두향은 넌지시
“이웃 고을 원님께 가서 옥순봉을 달라고 해 보시지요.”하고 귀띔 했다.
“옳지 그렇구나!” 하고 퇴계는 그 말대로 이웃 청풍의 원님이었던
이지번(李之蕃, 土亭 李之菡의 형)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이렇게 오늘날의 단양팔경이 이뤄진 데는 두향의 공이 적지 않았다.

두향은 관가에 들어오면서 집에서 돌보던 매화 두 분을 가져와서
퇴계가 기거하는 방에 놓아뒀다. 白梅와 紅梅였다.
이때부터 퇴계는 은은하게 방안에 감도는 매화향기에 취해
매화사랑에 빠지게 됐다.
그와 함께 퇴계와 두향의 사랑도 남모르게 깊어만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퇴계가 9개월만에 단양을 떠나게 됐다.
그때 마침 퇴계의 친형님 대헌공(大憲公)이 충청감사로 부임하게 돼서,

가까운 친인척이 같은 기관에 근무할 수 없는 상피(相避) 제도 때문에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이별하게 되자 서로 드러내놓고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는 애가 잦았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퇴계 이황은 무겁게 입을 열어 두향에게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구나.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로구나” 하며
이별을 슬퍼했다.
이 말을 듣고 두향은 퇴계에게 시 한수로 답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어느 듯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 할까 하노라

여기서 '꽃지고’의 꽃은 두말할 것 없이 매화를 말한다.
매화가 지고 사랑의 계절 봄날이 오면 임이
그리운 새가 된 나는 어이 할 꺼나, 하고
두향이 에둘러 서러워한 것이다.
두향은 떠나가는 퇴계에게 방에서 돌보던
매화 두 분을 드렸다. 백매와 홍매였다.

두향이 말했다.
“이 백매는 고결하신 사또님이십니다.
또 이 홍매는 사또님을 따듯하게 사모하는 천첩의 붉은 마음입니다.”
퇴계는 이 매화 두 분을 들고 풍기 땅으로 떠났다.
두향은 고개 마루에까지 가서 배웅을 하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두향은 그 후 신관사또에게 기적에서 빼어줄 것을 사정했다.
신관사또는 두향이 퇴계를 사모하는 정이 애절한 것을 알고 기적에서 빼주었다.
두향은 퇴계와 함께 노닐기도 하고 가야금을 타기도 하며

풍류를 즐기던 강선대 밑에 초막을 짓고, 수절하고 살았다.
그러면서 일편단심으로 퇴계만을 생각했다.

퇴계도 두향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법도로는 사또가 임지를 떠나 관기였던 두향을 만나러 갈 수도 없었고,
두향을 새로운 임지로 데려올 수도 없었다.
오매불망 두향을 잊지 못한 퇴계는 단양을 떠난 지 4년 만에
인편에 두향 앞으로 이런 시를 지어 보냈다.

黃卷中間對聖賢 누런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면서
虛明一室對超然 텅 비고 밝은 방안에서 초연히 앉아 있네.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가에서 또 봄소식을 보는구나.
莫向瑤琴嘆絶絃 거문고를 바라보며 줄이 끊어졌다 한탄하지 마라

이 시를 감상해 보면 생이별하고 온 두향이를 그리워하는
퇴계의 마음이 넘쳐흐른다.
오래된 책(黃卷)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성현들의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텅 빈 방안에서 네 생각을 하느라고 멍하니 앉아 있구나.
창밖을 내다보니 매화(두향)가 피어 또 봄이 오는데
두향아, 거문고를 맥없이 바라보며 정든 임을 이별했다
(絶絃: 정든 사람을 이별함)고 너무 슬퍼 말아라.

주자의 맥을 이었지만 주자보다 더 우뚝 선 도덕군자로
성현의 반열에 오른 퇴계였지만 애틋한 사랑을 잊을 수는 없었다.
퇴계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놓고 말 할 수는 없어서,
매화시를 써서 은근히 깊은 마음을 두향에게 전한 것이다.
만약 이 시가 두향이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면
결국 ‘거문고를 맥없이 바라보며 정든 임을 이별했다 한탄하지 말아라’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
이 구절만 봐도 퇴계가,
거문고를 앞에 놓고 정처 없이 먼 곳을 보며
생이별한 임생각에 눈물을 글썽이는 두향이를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여실하지 않은가.

퇴계는 두향이를 만나 매화를 알면서부터 매화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됐다.
퇴계는 매화에 관한 시를 평생 118수나 지었고,
매화시로만 엮은 매화시첩이란 책도 냈다.
매화시 가운데는 상당수가 매화를 그대(君, 公), 형(兄)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이 가운데 두향이를 염두에 두고 지은 시가 많다.
그만큼 두향은 퇴계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퇴계는 이른 봄 추운 달밤에 매화가 피는 모습을 보기 위해
특별한 의자를 고안하기도 했다.
의자 밑에 화로를 놓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화로의 온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불을 덮어쓰고,
달밤에 얇은 잎을 파르르 떨며 봉우리를 터트리는
매화의 개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매화가 추위를 이기며 꽃을 피우느라고 떠는 모습을 지켜보는
퇴계의 눈엔,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아무리 어려워도 정절을 팔지 않는 두향이의 모습이 겹쳐보였을 것이다.
퇴계는 두향이 준 매화분에서 가지를 꺾어 머무는 곳마다 옮겨 심었다.

서울 집에도 매화를 옮겨심기도 하고 매화를 분재해서 방에 놓고
두향인 듯 바라기도 했다. 서
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올 때는 매화를 상대로, ‘
매화야 잘 있거라, 내 다녀오마.’ ‘
염려 말고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는 내용으로
문답시를 짓기도 했다.
60세 때에 도산서원이 준공됐는데 그때도 두향이 준 매화가 옮겨 심어져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지금도 이 설중매(雪中梅)들은 해마다 이른 봄이면
두향이처럼 청순한 기품과 고고한 정절을 뽐내며 만개하고 있다.
퇴계는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했지만 55세 이후엔
안동 도계에 내려와서,
마지못해 잠시 벼슬길에 올라갔다 내려온 것을 제외하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퇴계는 마침내 1570년(70세)에 안동에서 숨을 거둔다.
숨을 거두면서도 퇴계는 아들에게
“매형(梅兄)에게 물을 잘 주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으면서도 두향이를 잊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퇴계는 두향이를 가슴에 안고 갔다.

이 부음을 강선대 초막에서 들은 두향은 소복을 입고 안동까지 걸어가서
먼 발치에서 장례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곤 걸음걸음 눈물을 흘리며 단양 강선대로 돌아왔다.
두향은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떠놓고 안동 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곡을 했다.
그러면서도 두향은 자기 입에 밥 한 술 떠 넣지 않았다.
곡기를 일절 끊고 자리에 누운 두향은 초막에서 혼자 굶어서 죽었다.
혹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죽거든 강선대 아래 묻어달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두향의 유언대로 강선대 아래 묻어주었다.

러나 충주댐이 생기면서 두향의 무덤이 물에 잠기게 돼서

후에 강선대가 바라보이는 높은 곳으로 옮겼다.
지금은 배를 타고 건너야 두향의 무덤에 갈 수 있다.

퇴계(본관 眞寶)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이웃 청풍군수로 있던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李山海, 본관 韓山)는 퇴계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산해가 퇴계와 두향의 애절한 사랑을 눈치 채고
두향의 묘소를 돌보고 제를 지내줬다.

서로 관본이 다른 이산해의 가문에서
이런 전통이 이어져 한일병탄 전까지 시제를 올려줬다.
또 퇴계의10대 봉사손(奉祀孫)이었던 고계 이휘영(古溪 李彙寧)이

도총부에서 봉직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단양까지 두향의 무덤을 찾아와 성묘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고계문집(古溪文集)에 보인다.
그 후 두향의 묘소를 잃어버렸다가 최근에야 퇴계의 후손 이가원이 되찾았다.
두향은 성이 安씨여서 요즘도 가을에 안씨문중에서 묘소에 와서
시제를 올리고 간다고 한다.

두향은 죽어서 450여년이 지난 후에 그 절개를 제대로 칭송받고 있다.
단양군에서 매년 5월에 두향제를 올리며 두향을 추념하고 외로운 넋을 달래고 있다.

지금도 사용 중인 천원짜리 지폐에는 이퇴계의 초상과 함께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도산서원 위에 퇴계가 그토록 사랑한 매화 20여 송이가 활짝 피어 있다.
두향이 퇴계와 함께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가슴 속에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정작 두향은 "細葉杜香"은 두견화과(진달래과)에 속하는 허브식물이다.
차라리 매화보다 두향을 선물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사랑도 연애도 품격이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거들떠보지 않는 천원 짜리 지폐에 초상화와 활짝 핀 매화가
그려져 있지만....그래도 지폐에 남은 인물이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48세에 군수와 관기의 신분으로 만나 사랑엔 나이가 없다지만 30살의 나이 차를

초월 22년간 한결 같은 사랑에 감동이다. 단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명종(明宗, 1545~1567)때 명기는 평양기생 옥매향(玉梅香),
이율곡(李栗谷,1536~1584)이 시를 지어 주었고

재주와 자태가 출중한 황주기생 유지(柳枝),

평양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전주기생 금개(今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사랑한 성산(星山)기생 심향지(沈香之)등
다섯명기는 “계미(癸未)사행록”과 “조선 해어화(解語花)”의

명기록(名妓錄)에서 있으나 두향이는 기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병신년 사월 스무여드레 취람 여포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