恥巖 이만현(李晩鉉) 先生 行狀
◇ 치암 이만현(李晩鉉:1832∼19
선생의 휘(諱)는 만현(晩鉉)이고 자는 영옥(英玉),호는 치암(恥巖)이다.
성씨는 이씨요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고려말의 밀직사(密直使) 이석(李碩)이 시조이다.
아래로 자수(子脩)는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작산사(鵲山祠)에 봉향되었고
두 대를 지나 정(禎)은 선산부사(善山府使)이며 북적(北賊)을 정벌한 공훈이 있다
아래로 계양(繼陽)은 호(號)가 노송정(老松亭)이며 향현사(鄕賢祠)에 봉향되었다.
다시 두 대를 내려와 퇴도부자(退陶夫子)는 그의 십일대조(十一代祖)가 된다.
또 두 대를 지나 동암(東巖) 영도(詠道)는 목사(牧使)를 지냈고,
삼대를 내려와 구(矩+木)는 처음으로 원촌(遠村)에 옮겨 살아 세인들이
원대처사(遠臺處士)라 불렀다.
다시 삼대를 내려와 귀운(龜雲)은 문과(文科)에 올라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증조(曾祖)가 된다.
조부 주순(朱淳)은 통덕랑(通德郞)이고 자식이 없어 현감(縣監)인 맏형 정순(程淳)의
다섯째 아들 휘면(彙 禾+冕)을 사자(嗣子)로 삼았으니 그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강옥성(姜玉成)의 딸이다.
순조(純祖)32년(1832)
자품(資稟)이 아름답고 재주와 생각이 아주 뛰어나서
조부 현감(縣監)공이 매우 귀여워하고 장래를 촉망하였다.
공부할 때가 되어 그의 아버지는 "재주는 가르칠만 하지만 가난하여
뒷받침을 어이할꼬" 하니 그가 말하기를 "성실(誠實)하고 근면(勤勉)함이
보배가 된다고 하였는데 어려울 바가 무었이 있으며 하물며
책 가운데는 천종(千鐘)의 녹봉(祿俸)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고 스승을 따라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무오년(1858)에 선친이 세상을 떠나니 그 슬픔을 이길수 없었으나 정성을 다하여
법제(法制)를 마쳤고, 그 후에 책을 끼고 산사(山寺)와 마을 서당에서
오로지 공부만 하였는데 긴긴밤 밤 늦도록 촛불을 밝히고 새벽까지
춥고 배고픈 괴로움을 참아가며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와같이 십년 넘게 공부하니 책을 모두 깨우쳐 가슴이 환히 트이고
두루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
고종 병자년(1876)에 과거에 올라 통사랑에 임명되고
정축년(1877)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고
기묘년(1879) 봄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지제교(知製敎)및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가을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고 겨울에 언양현감(彦陽縣監) 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慶州鎭管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고 수고로움을 덜게 하였다.
또한 자기 녹봉을 떼어 소를 사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고을이 잘 다스려 져서 백성들이 오늘날 현명한 수령이 백성을 사랑함이
마치 옛사람이 어린 자식을 보호하는 것 같다고 칭송의 소리가 길가에 가득하였다.
신사년(1881)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기가 전상(前喪)과 같이 하였다.
을유년(1885)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지제교(知製敎)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병술년(1886)에 사현부장령(司憲府掌令) 임진년(1892)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임오년 관란(官亂) 이후로는 세상이 날로 어지럽고 벼슬에 뜻이 없어
소(疏)를 올려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朝廷) 중신(重臣)과 지우(知友)들이 편지로 부임하기를 권유했지만
그는 "나라를 위한 소장공(蘇長公)의 충성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으나,
범문정(范文正)의 올바른 진퇴(進退)에 걱정 또한 없지 않다"고 하면서
드디어 벼슬에서 물러나와 "향리에서 부모를 모시고 형제와 함께 우애있게 지내고,
조용한 달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면서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나의 뜻"이라고 하였다.
당시 일문(一門)에서 벼슬과 학문.덕행으로 중망(重望)을 받고 있던 사람은
대사간(大司諫) 목재(穆齋) 만유(晩由 1822-1904), 목사(牧使) 만유(晩綏),
용산옹(龍山翁) 만인(晩寅1834-1897)
향산(響山) 만도(晩燾 1842-1910), 참봉(參奉) 치헌(癡軒1847-1916)
이들과 늘 가까이 하면서 도(道)와 의리를 논하였고 나이가 더할수록 덕이 높아져서
광무(光武) 임인년(1902)에는 관년 70세로 통정(通政)에 가자(加資)되었다.
경술년(1910) 국치(國恥)이후에는 분하고 근심한 나머지 병을 얻어
해를 넘기도록 더욱 심해져서 백형(伯兄)의 상사(喪事)에 영결(永訣)도 하지 못하였는데
애통함이 이를데가 없어 자질들에게 명하여 상례절차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게 하였다.
그의 형제간의 우애는 온공(溫公)과 백강(伯康)형제 처럼 돈독하여 늙어서는 잠시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하였고 이웃에 함께 살면서 항시 말하기를
「형님이 만약 세상을 버리게 되면 저 역시 따라 갈것입니다」하였는데
과연 백형 사후에 한달 사이로 그가 세상를 마치게 되니 형제일신이
한결같은 우애(友愛)의 정으로 살고 죽음이 이와 같았다.
이때가 융희(隆熙) 신해년(1911) 구월 이십이일로 향년이 팔십이었다.
처음에 임부골 뒷산에 장사지냈으나
뒤에 건지산 남쪽 하처골 건원(乾原)으로 이장하였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 행벽(行璧)의 따님으로
인자하고 단정하여 남편을 공경하고 후덕하였고 자질(子姪)들을
자기 소생 이상으로 사랑하였다.
기해년(1899) 십이월 이십팔일에 졸하니 묘소는 녹전면 호암(虎巖)에 있다.
하늘도 무심하여 그에게는 소생이 없어
계씨(季氏) 통덕랑(通德郞) 만근(晩瑾)의 맏아들 중길(中吉)을 아들로 삼았으니
적손(嫡孫)은 규호(赳鎬) 원봉(源琫) 동수(東秀) 광섭(光拾)이다.
그는 마지막 임종에 자질들을 불러놓고 말하기를「사람의 아들이 되어 반듯이
부모의 가르침과 조선(祖先)의 남긴 뜻을 실천하고 몸과 마음을 닦고 다스려서
조금도 넘치거나 놓치지 말것이다.
하물며 효제에 근본하여 매사에 믿음과 최선을 다하고,
글 공부에 힘써서 뜻을 세워 실천(本孝悌而主忠信 敦詩書而勵志行)함이
우리집에 대대로 전해 오는 유훈(遺訓)인데 이런 가업(家業)을
진실로 가슴에 새겨 힘써 행한다면 조상(祖上)에 대해서도 욕됨이 없고
뒤에 오는 후손에게는 복록이 끼치게 될것이다」하고
순순(諄諄)히 경계하고 두려움 없이 눈을 감으니 역시 군자의 올바른 마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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