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나는 당당한 조선의 관리다 왜경이 어찌 나를 위협하느냐”
청구유허비문
이만도가 청구리 율리 마을에서 음력 8월14일에서 9월8일까지 24일간 단식하다
마침내 운명한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재종손 이강흠의 집이다.
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 신하가 어떻게 자신의 집에서 편히 죽어갈 수 있느냐고 여기면서,
모든 선산을 찾아가 통곡하면서 이곳저곳의 거친 야외만 찾아다니다가 끝내는 죽을 장소를
청구의 율리 마을로 정하였다. 이만도의 의혼을 기리기 위해 우리가 찾아간 그곳에는
참으로 초라한 비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이름 하여 ‘청구유허비’(靑丘遺墟碑)였다.
빗돌을 살펴보니 위당 정인보가 글을 짓고 백범 김구가 앞 비문을 쓴 민족의 보물이었다.
향산의 유적지에는 청구비와 묘소와 고택만이 남아 있다. 청구유허비(왼쪽)는 위당 정인보가 글을 짓고 백범 김구가 글씨를 썼다. 사진작가 황헌만
“경술(1910)의 국치에 앞전의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였던 향산 이만도공이 합방소식을
듣자 조상의 묘소에서 통곡하며 하직하고는 먹지 않고 24일이나 줄곧 지내다가
돌아가셨는데 여기가 그 장소다. 그해(1910)는 공의 나이 69세였다.
음력 7월 병인(25)일에 나라가 망했으나 공은 외진 곳에 살고 있어 음력 8월1일에야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아파 살고 싶지 않았다. 을유(14)일에 아침을 들지 않고 집에서 나가,
재종손 강흠(綱欽)의 초가집에 이르자 밥이 들어오기에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아침에도 밥이 들어오자 또 그랬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뜻을 결정했다고 일렀다.
아우와 아들이 달려와 울어대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울지 마라’하고는 돌아가기를
권하면서, ‘우리 임금님은 갈 곳이 없으신데 어떻게 차마 집에서 거처하겠느냐’고 하였다.
선비나 벗들이 찾아와 안부를 물으며 의(義)를 지키려고 그러느냐고 말하면,
처량한 모습으로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했다. 을사(9월5일)일에 왜인 경찰관이 와서
이유를 물었다. 그런 뒤에는 곁의 사람에게 미음을 가져오게 하여 주사기로 입에 넣으려 했다. 공이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꾸짖으니 목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모두 낯빛이 변해서 달아나 버렸다. 그 후 4일 뒤에야 눈을 감으니 바로 9월8일 무신일이었다. 이강흠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자 초가집은 무너졌다. 왜가 패한 3년 만에 손자 이동흠(李棟欽)이 표석(表石) 세우기를 도모하기에 정인보가 삼가 그에 관한 일을 기록하였다.
생각컨대 빗돌이 서게 되면 이 장소도 유명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 장소에 대하여 자세하게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삼가 이어서 적는다.
이곳은 예안의 청구촌인데 작은 마을로는 율리(栗里)다.
마을 앞에는 산이 있으니 문산(文山)이다. 위당 정인보가 삼가 지음.”
조선의 마지막 학자이자 문장가이던 위당 정인보의 글맛이 제대로 나타나 있는 짧고도
내용이 넉넉한 글이다. 앞면의 큰 글씨는 애국자 백범 김구의 글씨이다.
위당의 글에 백범의 글씨라면 이 나라의 국보가 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이 빗돌의 주인공은 민족의 의혼(義魂), 향산 이만도가 아닌가.
향산 고택, 안동시 안막리
오래 전부터 안동을 가면 찾아가던 곳이 시내 안막리에 있는 ‘향산고택’이다.
본디는 퇴계의 묘소에서 가까운 하계(下溪) 마을이 진성이씨 집성촌이자
향산 이만도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았던 마을이다.
그곳에 있는 향산의 고택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마을이 온통 수몰되자
집을 통째로 옮겨 안동시 안막리에 다시 세웠다.
3대 문과에 3대 독립운동가라는 세상에 드문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이
거기에 덩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유림정신이 강하고 유교문화의 맥을 그런대로 지키고 있다는 안동의 오늘은
그 향산고택을 말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다.
해마다 40~50명의 전국 선비들이 모여 퇴계의 학문을 논하고 향산의 의혼을 말하면서
향산고택의 향기는 온 나라로 퍼져나간다.
필자도 오래 전부터 ‘향산고택을 출입하는 사람들’ 모임에 가담하여
그곳을 출입한 지 오래다.
물속에 잠긴 옛날의 터전이야 찾을 길 없고, 이제는 향산의 유적지라고는 ‘청구비’와
‘묘소’와 고택이 있을 뿐이다. 비록 퇴락한 옛날의 기와집이지만, 방에 들어가면
이가순·이휘준·이만도 3대 문과급제 교지(敎旨)가 복사되어 벽에 붙어 있고,
이만도와 그의 아들 이중업(李中業), 그의 손자 이동흠(李棟欽) 3대 독립운동가 서훈장이
복사되어 전시돼 있다.
나라를 잃자 분통을 이기지 못하는 애국심으로 24일간 단식으로 자결한 애국자·독립운동가
이만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파리장서 등 온갖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이중업,
왜정 때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를 치른 이동흠, 이들 3대는 물론이려니와
이중업의 부인 김씨, 둘째 아들 이종흠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퇴계와 향산으로 이어진 성리학적 의리개념과 애국심이 그러한 가문을 이루었을 것이다.
청구일기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기도 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을 방도를 찾느라 1
0여일을 배회하다가, 마침내 단식으로 결정하고 죽을 장소까지 집이 아닌
외딴 곳으로 정하고 나서, 이만도는 음식을 끊었다. 시작한 날에서 목숨을 거둔 날까지
24일간, 죽어가는 기록, 죽음의 일기를 ‘청구일기’(靑丘日記)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죽어간 그 장소가 청구리였기에 붙인 이름이다. 원문이야 휘둘러 쓴 초서가 많아 읽기도
쉽지 않았는데, 최근에 안동의 한국학진흥원에서 탈초하여 번역까지 마쳐
‘향산전서’(響山全書)로 간행하였기에 아무나 읽고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대목을 간추려 읽어보자. 운명하기 직전의 이만도는 자신의 일생을 간단하게 회고하였다.
“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을미(1895)년 국모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1905)보호조약 때 두 번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이미 끊어졌다.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나라에 위기가 다가올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였으나 가느다란 희망으로 때를 기다렸건만,
끝내 그런 희망이 끊기자, 그는 결연히 자결을 택해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을 가고야 말았다.
정인보의 비문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지만, 망국에 항거하여 자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왜의 경찰당국은 매우 긴장하고 자주 찾아와 동태를 살피면서 예의주시하였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방문객이 찾아와 격려하고 위로하던 중이어서 왜경은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단식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아차린
왜경은 마침내 이만도에게 강제급식을 통해 자결을 방지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운명하기 3일 전인 음력 8월5일의 기록이다.
“예안 주재 왜경 한 사람과 수비병 세 명, 순검 세 명이 와서 위협하고 공갈하는 것이 전보다
더했다. 그러고는 ‘영감님께서 정신을 수습할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
모시는 사람이 ‘정신은 이미 수습하기 어렵소’라고 하였다.
왜경이 ‘정신이 있을 때 권해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면 정신이 없을 때
모시는 사람들이 음식을 왜 올리지 않는가?’라고 하고는 ‘속히 미음을 가져오라.
내가 당장 주사기로 강제로 음식을 먹여야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곧바로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는 내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어하는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고 하였다.
이에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보이면서 계속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일본인이 드디어 당황하여 황급히 문을 닫고 피했다.
‘상부의 명령이지 우리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물러갔다.
선생은 계속하여 소리지르며,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이품 관리다.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설득한다는 것이고,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냐?’라고 다그쳤다”라는 대목이 있다.
강제급식에 항거하여 죽는 순간에도 조선 선비의 의혼을 통쾌하게 외치던
향산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면서, 조선의 독립과 해방의 종소리는
먼 데서 들려오기 시작했었다. 이런 의인이 바로 향산 이만도다.
마지막 유시(遺詩)
가슴 속의 피 다하니
이 마음 다시 허하고 밝아지네 此心更虛明
내일이면 깃털이 돋아나 明日生羽翰
옥경에 올라가 소요하리라 逍遙上玉京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가슴에 피가 마르니 마음이 더 허하고 밝아진다니
얼마나 투철한 정신인가. 오히려 죽어가면 날개를 달고 옥황상제가 있는 하늘로 올라가
즐겁게 거닐겠다니 이 얼마나 뜨거운 의혼인가. 호생오사(好生惡死)! 사는 것은
좋고 죽기는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보통 마음, 어찌하여 그렇게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대의를 찾아 당당하게 떠날 수 있었을까. 대단하다.
이만도의 ‘묘갈명’을 지은 호남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던 기우만은
“회고해보건대, 나야 구차스럽게 목숨을 훔쳐서 사는 사람, 향산공께서
마땅히 가볍고 천하게 여길 사람인데, 그분을 평가하는 일대기를 짓는 일까지 맡다니
홀로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없을쏘냐”라고 말하여 죽지 못한 사람의 수치심을 토로하였다.
어디 그것이 기우만만의 부끄러움이겠는가. 못 죽은 모든 인간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기우만은 명문(銘文)의 마지막에서, “뒷날 죽는 사람들 / 그 묘소 곁에 묻히고
싶으리”(他日有死 願埋其側)라고 읊어서 향산 이만도의 묘소 곁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글을 마쳤다.
〈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