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금당실마을 현장학습을 하며

오토산 2016. 7. 15. 13:42

 

샂니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9604

 

금당실마을 현장학습을 하며

 

 

도민의식 함양 현장학습 첫코스로 예천 용문면사무소 앞에서

박희식해설사님을 만나면서 시작을 한다.

면사무소앞에는 십승지마을의 유래비와 재경 용문면민회에서 설치한

'龍跳天門(용이 천문에서 뛰논다)'는 비석이 마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금당실은 조선 최대의 예언서 정감록에서 말하는 3재(전쟁.흉년.전염병)가

들어올수 없는 땅의 기운이 좋고 청정하고 안전한 십승지의 한곳이며

감천문씨 문헌에 의해 개척되었고 그 의 증손자 문억경의 사위인 함양박씨

 박종린과 원주변씨 변응녕이 처가곳으로 정착하면서 번성하여 퇴계선생의

학맥을 이어오는 예천을 대표하는 마을로 대과급제자가 함양박씨 문중에서 11명,

원주변씨 문중에서 5명이 배출되고 함양박씨, 예천권씨, 원주변씨등이 400년을

이어오는 전통마을로 '금당실에 가면 옷자랑을 하지말라'는 속담처럼 선비의

예법과 반가의 문화의식을 잘 간직한 마을로 마을 서쪽이 虛하여 솔숲(800m)를

 조성하여 마을의 액운을 막았다고 한다

 

남사고는 '금당과 맛질을 합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냇물이 없어서 아쉽다' 했고

지금도 '반서울금당실'이라 불리기도 하며 마을 뒷산인 五美峰에 올라서면

여인의 눈섭같은 반달(雅眉半月), 버들밭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柳田幕煙),

선동으로 떠나가는 구름(仙洞歸雲), 용문사 새벽종소리(龍寺曉鐘), 대수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竹林淸風)등 다섯가지의 아름다움을 볼수 있는곳이라

오미봉이라 했다.

 

 1870년경 마을의 지세는 남동향인데 땅의 형태에 따라 남서향으로 건립된 우천재,

조선 숙종때 도승지를 지낸 갈천 김빈이 낙향하여 1679~1690년경 세운가옥으로

구한말 법무대신 이유인이 매입하여 1899년 지금자리로 이건하였다가

현 소유자의 선대가 매입한 반송재 고택,

평지에 커더란 돌로서 형성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선생을 제향하는 추원재와 사당, 박충좌선생의

금곡서당등 전통마을의 곳곳을 돌아보았다.

 

마을에는 돌담길과 흙담길등으로 정비되고 돌담위를 감싸고 있는 담쟁이

넝쿨과 박넝쿨들이 전통마을의 정취를 풍기고 있으나 군데군데 지어진

현대식건물과 철대문등으로 인해 옛 정취가 흐려지는것이 아쉬웁다는 사람도

 많이 있었으나 현장학습을 하는 우리들 모두의 얼굴에서는 세월의 향기가 

옛 스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설명을 하여주신 해설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초간정으로 다음 학습을 위하여 떠났다.

 

http://blog.daum.net/uh512/5950(십승지의 한곳 금당실)에서 더 많은 내용을

보실수도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세상사 한마디

옥황상제 밑에 '업'장군과 '복'장군이 있었는데 서로 다투자

옥황상제가 탑쌓는 시합을 시켰는데 업장군이 잔꾀를 부려 승리했다.

옥황상제는 복장군이 계속 당할것을 우려해 복장군을 돼지로 환생시켜

사람들이 하늘에 소원을 빌때 중개할수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하며

 

 고구려 2대 유리왕때 삼월삼짓날 돼지를 제물로 바친 기록이 있고

돼지는 우리들에게 地神(대지를 관장하는 신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한자말 豚자와 우리말 '돈'이 같은 소리를 내고 새끼를 많이 낳아 다산과

부귀영화를 누리기 바라는 마음으로 제사상이나 고사상에 올린다고 한다

 

 

 

 

 

 

 

 

 

 

 

 

 

 

 

 

 

 

 

 

 

 

 

청동기시대 지석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