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동방이학지조 포은 정몽주

오토산 2016. 7. 22. 12:42

 

영남학맥(嶺南學脈) /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

고려 말 조선 초의 충신학자들을『영남학맥』에 관련시킴은 조선조 유학의

 철학적 기초가 이들에게서 비롯됐고 특히 영남학풍에 끼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배 격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영향도 두드러진 것이었으나

그의 태생지와 활동무대가 영남지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별도의 인물 논에서는

 제외했으나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출신 학자들의 등장 시에 거론하기로 한다.

 

鄭夢周는 영일(迎日) 정씨(鄭氏)의 시조 용명(龍明)의 10대손이며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운권(云權)의 아들로 1337년에

경북 영천군 임고면(臨皐面) 우항동(愚巷洞)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어머니 李氏 부인이 꿈에 난초화분을 들고 가다가 떨어뜨린 후 夢周를

잉태하였다 하여 그의 어릴 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

 

夢蘭이 9살 때 그 어머니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큰 용 한 마리가 뒤뜰 배나무에

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나 가보니 夢蘭이 그 나무 위에서 놀고 있었다.

 

어머니 李氏 부인은 夢蘭이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알고 교육에 특별한 마음을 써서

 장차 대성시킬 것을 결심, 그 유명한 『백로가(白鷺歌)』를 지어 훈육하였다.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이것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이 백로가는 백세에 전승되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더불어 자식교육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때부터 夢蘭은 몽룡(夢龍)으로 고쳐졌고 夢周는 그가 혼례를 올린 후부터 사용한

 이름이었다.

 

그의 스승은 정확하지 않으나 당대의 대학자 상주(尙州)의 김득배(金得培) 등에게

수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비범한 총명은 10세 이전에 상당한 문장력을 구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번은

 그의 외삼촌댁 여종이 먼 곳으로 부역 나간 남편에게 편지 한 장 써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夢周는 서슴지 않고『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도 기울어지나 아내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간단히 써주었다.

이를 받아본 여종은 한자로 겨우 열자 밖에 안돼 실망하고 몇 자 더 적어달라고

졸랐다.

夢周는 다시『봉했다가 열어 다시 한 말씀 더하노니 이세상에 그 많은 병이

 모두 이런 상사(相思)이더라』적었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인물은 어릴 때부터 보통아이들과 틀린 점을 강조하기 위해

미화되는 것이 상례이지만 夢周의 이때 나이 8세였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그는 부모의 정성 어린 보살핌과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 속에서 항상 몸을 바르게

하고 학문에 전심전력하던 중 청천병력과 같은 부친상을 당했다.

 

이때 그는 19세 젊은 나이로 당시 사대부 집안에서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여묘(산소 옆에 움막을 치고 사는 것) 3년 상을 치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일이며 夢周의 지극한 효심의 발로였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의 효행을 몸소 실천한 셈이었다. 아마 夢周의 만고에 빛난

충효의 사표는 이때부터 그 기틀이 서서히 형성되어 갔던 것 같다.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품은 뜻을 펴기 위해 과거에 응시, 삼과에 연거푸

장원 급제하니 그의 문명이 고려조야를 뒤흔들었다. 20대 초반에 그의 학문은

 일국의 으뜸임을 엿볼 수 있다.

 

한때는 한방신(韓芳信)의 종사관이 되어 화주(和州)에서 수 차례에 걸쳐 여진족을

 대파하고 잃어버린 고토를 수복하여 개선하니 그 위명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를 겸비한 그는 정치적으로 어지러운 고려 말 왕통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북의 홍건적, 남의 왜구 등에 시달리는 국난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할

국가동량으로 기대가 모아졌다.

 

벼슬은 계속 누진되어 가던 중 부친상을 당한지 10년 만에 다시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 우항리로 돌아와 여묘 3년 상을 지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공민왕은 그의 효행을 기려 정려(旌閭)를 내리고 우항리(愚巷里)를

효자리(孝子里)라 칭했다.

 

잠깐 이야기를 바꾸어 효자리의 칭호를 받은 愚巷里를 살펴보자. 영천군 임고면의

우항동은 임고면 소재지에서 동남쪽 2㎞에 위치해 있다. 여기가 대유학자이며

충신이며 도학(理學)의 태두인 鄭夢周가 태어난 곳. 겉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것 같았다.

 

양반들이 살았다는 시골을 가보면 그들의 옛 영화를 상징하는 이끼 낀 고가

한두채쯤 찾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성현 鄭夢周가 태어났다는 이곳은 가구수가 60여 호 되는 큰 촌락이지만

 옛 영화는커녕 지금도 빈색(貧色)이 엿보이는 산간마을이었다.

 

그의 출생지임을 증명하고 기념하고 있는 유적은 마을 앞 3백m 지점에 옛 빛을

발하는 포은정선생지려(圃隱鄭先生之閭)가 홀로 외로이 효자리를 기념하는

『孝子里』비석을 보호하고 있다.

 

이 비각은 후손들이 鄭夢周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빛난 충효의 도리를 배우기

위하여 16세기경에 세웠다. 그 후 이 비각은 세파의 무관심으로 매몰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부터 3백 여년 전 손순효(孫舜孝)가 경상도 안찰사가 되어 영천 지방을

순찰하던 중, 꿈결에 수염이 희고 의관을 정제한 백발의 한 노인이 나타나『나는

圃隱이로다.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퇴폐해서 비바람을 막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孫안찰사는 놀라 일어나 그 마을 노인들에게 물어 효자리 비각을 찾게 하여 지금의

위치에 안치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높이1m, 폭40cm의 반반한 자연석의 앞면에 새겨진 이 효자리 비각은 최근 들어

돈푼깨나 있는 후손들이 업적이 대단하지 않은 선조들을 위해 세운 각종의

기념비나 유허비에 견주어 보면 초라한 감이 있으나 충직한 옛 圃隱의

인품을 대하는 것 같아 친근감이 있었다.

 

효행을 다한 그는 31세에 다시 중앙정계로 나아가 그의 진면목을 여러 분야에 걸쳐

드러내면서 쇠진해가는 국운과 더불어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펼쳐진다.

 

왕께 나간 그는 내우외환으로 극도로 퇴폐한 고려 말의 사회상을 바로잡는 수단으로

 성균관을 재건하고 송도(松都)에 오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을

진흥하고자 건의했다.

 

이에 전란으로 일시 닫혀진 성균관이 새로 문을 열고 牧隱 李穡이 대사성이 되고

 鄭夢周와 더불어 李崇仁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등

당대의 석학들이 교관에 임명되어 열띤 강론을 폈다.

 

특히 鄭夢周의 강설은 다른 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 들이어서 모두 그 학론이

과연 옳은가를 의심했다.

 

말하자면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가 당시 유일한 참고서였는데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없었고 오직 圃隱이 홀로 정밀한 분석과 훈해를

했던 것이다.

 

이러던 중 元나라 호운봉(胡雲峰,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란 저서가

전하여지자 평소 圃隱의 학론과 일치하므로 주위 학자들이 비로소

그의 탁월한 학문의 깊이에 탄복했다.

 

따라서 선배 격이며 당시 대학자인 李穡이 鄭夢周를 가리켜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격찬했다.

 

그러나 이 같이 뛰어난 鄭夢周의 철학사상은 그의 학설이라고 할만한 체계화

된 것이 글로서 남아있는 것이 없어 안타깝다. 어쩌면 그의 평생 행적이

그의 탁월한 철학사상의 기초며 도학(道學)의 요체인지 모른다.

 

그의 도학사상의 일면을 다음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유학자의 도는 모두가 일상생활의 일입니다. 음식이나 남녀의 관계는 사람들이

같이하는 것이 온데 여기에 지극한 이치가 있는 것이오, 요순(堯舜)의 도도

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그 올바름을 얻은 것이 곧 요순의

도이어서 본래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 친척과 이별하고 남녀관계를 끊어서 홀로 암혈에 앉아 초의목식

(草衣木食)으로 관공적멸(觀空寂滅)을 숭상하니 어찌 이것이 평생의 도입니까』

 

평범한 가운데 진리 있음을 갈파한 그는 가내의 효행을 지극히 실천하고 국가를

위해 한 목숨 서슴치 않고 내놓음으로써 그의 철학적 신념을 밝힌 것이었다.

​30대 초반에 동방이학지종(東方理學之宗)의 칭호를 받은 그는 일신의 영화를

버리고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고려말 어려운 시기에 처하여 조정을 위협하여 괴롭히고 백성을 극도의 도탄에

 빠뜨리는 여진족과 왜구의 정벌에 그는 문신이면서도 수차례나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또 당시 미묘한 국제정세에 따라 누구나 가기를 꺼려하던 명나라와 사지(死地)로

 통하던 일본을 그는 서슴치 않고 드나들면서 높은 학식과 인격으로 지대한

외교적 성공을 거뒀다.

그가 38세 되던 해 3월 명나라사신으로 황해를 건너던 중 풍랑을 만나 고도에

표류하여 13일 동안 말안장을 뜯어먹으며 연명한 고난도 따랐다.

 

그러나 그는 뜨거운 애국심과 고절한 인격으로 명태조(明太祖)를 감복시켜 과중한

고려조의 공물을 대폭 삭감시켜 나라의 어려운 재정을 도왔으며, 또 왜구에게

불법납치된 우리포로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등 그의 외교적 활동은 눈부셨다.

 

안으로는 퇴폐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왕께 진언하여 교육을 진작시키고 의

창(義倉)을 세워 빈민 구제에도 힘쓴 그는 행정가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홍건적 난입, 여진족 침입, 왜구의 습격 등으로 세곡운반마저 어려워지자 그는

慶尙.全羅.忠淸 3도에 수로(水路)를 정비하여 세곡의 조운을 편리하게 한것도

그의 마음씀 덕분이었다.

 

그러나 고려조정은 元나라를 섬기자는 이인임(李仁任)을 중심한 권신호족과

明나라를 따르자는 신진사류(新進士類)로 크게 양분되어 서로 반목하였다.

물론 鄭夢周는 그의 학문적 바탕과 정치적 신념에 의해 친명파(親明派) 쪽이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등극하면서 고려의 외교정책이 친명에서 친원쪽으로 돌아서자

鄭夢周 등 신진사류 출신의 쟁쟁한 문신들은 이의 부당성을 지적한 상소문을 올렸다.

 힘이 모자라는 이들은 마침내 투옥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鄭夢周 역시

언양(彦陽)으로 유배되어 3년을 지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다시 조정에 돌아온 그는 궂은 일 마다않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동분서주 했으나 깊은 내우와 외환에 시달려 중병에 걸린 고려왕조는 소생의

희망이 사라져 더욱 시들해져갔다.

 

호족들의 사욕과 권신들의 횡포 그리고 간신들의 무자비한 참소, 여기에 사찰의

부패까지 난무하니 사물판단의 흑백이 불분명한 상태였다. 고려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난국에 빠지고 권신들의 세력판도 변경에 따라 왕이 폐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끝내 허수아비같은 왕실로 전락했다.

 

위화도회군 후 최영(崔瑩)과 조민수(曺敏修)를 꺾은 이성계(李成桂)는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움으로써 고려조의 전권을 잡았다. 이제 풍전등화같은

고려왕조의 사직은 오로지 鄭夢周 한 사람에게 달렸다.

 

鄭夢周와 李成桂는 2년 차이 동년배로 文과 武의 길에서 서로 경쟁하듯이

출세가도를 달린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전자는 글로써 동양3국에 그 명성을

떨친 학자 겸 정치가였고, 후자는 칼 한자루로 위명을 빛낸 역전의 영웅이었다.

 

李成桂를 추종하는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남간(南間) 등이 宋대의 주자학

(朱子學)을 받아들인 유자들이며 친명파의 신진사류로 鄭夢周의 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서로간의 갈등과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李成桂를 둘러싼 일파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점차

노골화되자 鄭夢周는 고려사직을 붙들기 위해 이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鄭夢周는 학문상의 비범성뿐만 아니라 인강적인 위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병든 고려왕조를 재건하는 길은 국교로 된

 불교를 멀리하고 새로 도입된 朱子學에 있다는 것이 鄭夢周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이점에서는 李成桂 추종자들도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학풍이 같고 정치적 신념이 동일하다 해도 국가사직이 존망의 위기를 당하자 그는

현실의 이(利)를 구하지 않고 결연히 충(忠)을 택했던 것이다.

 

鄭夢周의 李成桂 일파에 대한 견제책은 공양왕 4년 李成桂가 황주(黃州)에서

낙마하여 중상을 입을때 그 절정을 이뤘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 李成桂의 심복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준.정도전.윤소종(尹紹宗) 등의 직첩 등을 거두고 중죄인으로

다스리려 했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은 곧장 李成桂에게 알리고 밤을 도와가며 개성

(開城)으로 귀가시켰다. 그러던 중 鄭夢周는 사태를 살펴볼 목적으로 李成桂집을

 단신 문병차 찾아갔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문병하려 온 鄭夢周의 속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술대접하는

자리에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하는 『하여가(何如歌)』를

 불렀다.

 

이에 鄭夢周는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라는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로 응했다.

 

이방원은 도저히 鄭夢周의 초지일관된 고려조를 향한 충절을 돌이킬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의 심복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선죽교(善竹橋)에서 鄭夢周를

격살케 했다.

 

동방이학지조요, 대정치가였던 鄭圃隱은 56세를 일기로 선죽교를 단심(丹心)의

피로 물들이고 순절한 만고의 충신이었다. 鄭夢周의 순국한 자리가 선죽교가

 아니라는 설도 있으나 여기서 문제될 것은 아니고 그는 꺼져가는 국운과

함께 산화될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봉건국가 체제 아래서는 한번 역적으로 몰려 주살(誅殺)되면 그 구족(九族)이

쑥대밭이 된다. 이를 염려한 尙州목사를 지낸 정광후(鄭光厚,포은의 당숙)는

그의 부친 인언공(仁彦公)과 의논하여 鄭夢周의 두 아들을 피신시키고 자신들은

가장 천한 상민들이 사는 전촌(錢村)으로 숨어들었다.

 

따라서 鄭夢周가 난을 당한 후 한달 뒤 그의 동생 두명과 9족이내의 친척이 모두

주살됐지만, 그의 아들 둘과 정광후 부자는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조선조 신왕국이 건설되고 국가의 터전이 제대로 잡힌 태종(太宗) 원년, 태종은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鄭夢周의 직계손을 찾아 벼슬을 주고 편안히 살게 하였다.

 

조선왕조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시도했기 때문에 대유학자이며 도학(道學)의

대가인 鄭夢周를 영원히 역사의 정적으로 몰아 붙일수만도 없었다.

특히 대의명분을 위하여 충절을 다한 그를 역적으로 몰아세울 경우 충과 효를

근간으로 한 朱子學을 국시로 한 조선왕조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왕조는 한때 정적으로 鄭夢周를 주살하고 그 친족을

 멸했지만 뒤따라 그를 충절의 사표로 내세웠던 것이다. 여기에 인간이 이해할수

 없는 역사의 모순성과 정권의 비정함을 보는 것 같아 후세인들은 더욱 鄭夢周를

추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鄭夢周는 한 시대를 꿰뚫어 볼수있는 높은 학문과 식견, 그리고 준일한 문장력을

소유한 대학자요 정치가로 멋진 최후를 장식함으로써 자손만대에 걸쳐 충절의

귀감이 된 것이다.

 

그의 시신은 그의 충절을 애도한 우현보(禹玄寶)가 몰래 감추어 황해도

해풍(海豊)땅에 묻었다가 뒷날 향리 영천(永川)으로 운구하던 도중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慕賢面) 능원리에서 명정(銘旌)이 떨어지자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다시 묻었다.

 

후세인들은 그의 높은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성균관에 배향함은 물론

개성에

 숭양서원(崇陽書院), 용인에 충열서원(忠烈書院), 영천군 임고면에 임고서원

(臨皐書院)을 세웠다.

구한말 대원군집권 당시 서원철폐령에 따라 정뭉주의 태생지에 세워진 임고서원을

 제외하고 숭양과 충열서원이 헐리게 됐다. 그러나 개성의 전 주민은 남녀노소

할것없이 충신 포은을 모신 숭양서원을 헐수없다며 전부 일어나 반대하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임고서원이 헐려졌다.

 

다행히 영당(影堂)이 남아 1980년 정부보조로 보수정화됐다. 임고서원은 임고면

양항(良巷) 2동 표지골에 위치해 있고 그 앞에 3백년 넘는 은행나무가 역사의

영고성쇄를 간직한 채 유유롭게 서 있다.

 

임고서원은 현재 영천군 유림에 의해서 운영되고 잇으며 영당의 위패는 포은선생

 한분밖에 없는데 안내표지판은 '張顯光,皇甫仁 두 선생을 추앙했다'고 쓰여있어

민망스럽다.

 

현재 포은의 직계손은 彰洙씨(48)가 용인군 모현면에 살고있다. 그 외 포은의

직계후손들은 영천군 大昌.古鏡면에 60호, 군위군 1백여호, 의성군 3백여호, 예천군

 5백호, 영풍군 3백호, 월성군 3백여호, 영일군 5백호, 울진군 1백여호, 선산군

2백여호, 경기도 용인 30호, 강원도 1천호, 경남 4천호, 충청도 5백호 등이 살고있다.

 

요컨대 圃隱의 정일하고 심오한 이학(理學)의 분석과 주해, 그리고 그의 심후한

철학사상과 충절은 조선조의 사림파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갔다.

참고문헌=韓國思想史論攷∙圃隱文集∙朝鮮名人典∙臨汀春秋∙韓國姓氏大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