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퇴계선생의 군자의 도(이면동)

오토산 2016. 8. 5. 05:15

 

 

 

퇴계 이황 선생의 "군자의 도"

 

ㅡ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 ㅡ

君子라는 말은 일찌기 중국에서 부터 사용되어온 말이다.

군자란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을 말하며,
도덕수양을 두루 갖춘 선비에 대한 호칭이라 볼수 있다.

또한 중국 춘추시대에는 귀족에 대한 통칭이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라는 말과 대등한 뜻을 지닌 말이기도하다.

 

퇴계선생의 글을 읽다보니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퇴계의 제자 가운데,이함형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퇴계 말년의 제자로서, 뒤늦게 퇴계를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그런데 그는 부인과 금슬이 좋지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혼인을 하고도 부인과 동침하지 않았단다.
스승인 퇴계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제자라고 해도 직접 대놓고 꾸짖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함형은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청을 드렸다.

"내일 조반은 우리집에와서 먹고 떠나도록 하게"
"선생님,고맙습니다.그런데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라도 있습니까?"

"경사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네가 고향에 다녀온다기에 내집에서 밥 한끼라도

먹여보내고 싶어서 일세. 잊지말고 꼭 와주게."

"알겠습니다.내일 꼭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이튿날 이 함형은 약속대로 스승의 집으로 향했고 아침상을 받았다.

반찬이라곤 산나물과 가지나물, 된장 한종지가 전부였단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자못 놀랐다.

식사를 끝내고 길을 떠나려 인사를 드리니, 퇴계는 편지 한통을 건내주었다.

"이 사람 평숙(함형의 호)!내가 자네 주려고 편지 한장을 썼네"

스승으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은 이 함형은 황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면서

편지를 공손하게 건네 받았다.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네"

"네,선생님! 무엇이온지요?"

"글을 집에 가는 도중엔 읽지말고, 집에 도착해서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읽어보게나"

스승이 건네준 편지 겉봉에도 '노차물개간 (路次勿開看)'이라 적혀 있었다.

 

이 함형은 안동에서 순천까지 꼬박 열흘걸리는 먼길을 가는동안

가슴속에 넣어둔 편지를 꺼내볼수는 없었다.

이윽고 순천 집 사립문에 도착하여, 서둘러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퇴계가 쓴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공자가 이르기를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뒤에 예절과 의리를 둘곳이 있다"하였고,

자사는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며, 그 지극함에 이르면 천지에 드러난다"

하였으며,

또 시경에는"처자간에 정이 좋고 뜻이 합쳐짐이 금슬(琴瑟)을 타는듯 하다"고 했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모가 편안하실것이다" 하셨다네.

부부의 인륜이 이토록 소중하거늘 어찌 정이 흡족하지 않다고 해서

멀리 할수 있겠는가?.

그대가 부부 금슬이 좋지않아 한탄한다 하니, 어쩌다 이런 불행이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살펴보면 세상에 이런 근심 갖지않은자 적지 않다네.

부인이 성질이 고약하여 교화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혹은 못생기고 슬기롭지 못한 경우도 있고, 혹은 남편이 방종하여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경우도 있고,혹은 좋아하고 싫어함이 정상적이 아닌경우등 일일히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일세.

그러나 대의로 말하자면 그중에 성질이 고약하여 교화하기 어려운 경우는 실로

소박을 자초했으니 이는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남편된 사람이 반성하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노력하여 올바르게 처신하기에 달렸으니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않는 다면 대륜이 무너지는데 이르지 않을 것이요,

자신 또한 박한 처지에 놓이지 않을걸세.

또 성질이 고약하여 교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극히 패역한 짓을 저질러

명교(名敎)에 죄를 지은자가 아니면 마땅히 선처하여 성급히 결별하는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는것이 옳으리라 믿네.

대개 옛날에는 칠거지악을 범한 부인을 쉽게 내칠수 있었지만, 부인들은 대체로

一夫從事하여 일생을 마치게되니 어찌 그 情義가 맞지 않는다고 길가던 사람처럼

또는 원수처럼 대하듯 하며,

또 부인을 천리밖으로 내쳐서 가정의 도리를 망가뜨리고 자손을 끊기게 하는

불행을 저질러서야 되겠는가?

대학에"자신에게 허물이 없어야 다른 사람을 탓한다 했으니,

여기에 대해 내가 경험한것을 말하겠네.

 

나는 두번 장가 들었지만 내내 불행했었다네.
하지만 여기에 대해 결코 마음을 박하게 먹지않고, 노력 해온것이 수십년에

이르렀네. 그동안 몹씨 괴롭고 심란하여 번민을 견디지 못할때도 있었지만,

어찌 감정에 이끌려 대륜을 소홀히 해서 편모에게 근심을 끼칠수는 없었다네.

부부 금슬에 대해서는 '아비도 자식에게 관여할수 없다'란 말이 있으나,

이 말은 참으로 부부의 도리를 문란케 하는 말이니 이말을 핑계심아 충고를

아니할수 없네.

그대는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스스로 반성하고 고치도록 하게나.

이 문제에 대해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찌 학문을 한다고 떳떳이

말할수 있으며, 또 어찌 실천한다 할수 있겠는가?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이함형의 얼굴은 붉어지기 시작했고, 등골에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실로 깨달음과 뉘우침의 순간이었다.

 

대문을 들어선 이함형은 부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하인에게 대청에 초석을 깔고 소반위에 정한수 한그릇 떠놓게 한뒤

 부인을 불렀다.

부부는 정한수를 마주하고 서로 재배를 하고나서 자리에 앉았다.

그날부터 부부는 금슬 좋은 사이가 되었고, 후손도 번성하게 되었다.

뒷날 퇴계가 세상을 뜨자,이함형 내외와 자손들은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참으로 올곧은 유학자의 가르침이 엿보인다.
퇴계는 첫번 결혼에서 두 자식을 얻긴했지만 일찌기 부인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두번째 결혼은 명문가 안동권씨 가문의 권질의 따님이었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권질이 자신의 딸과 재혼을 권유할때 그 청을 받아들여

부인으로 맞아드린것이다.

그러나 그 부인은 정상적인 규수가 아니었다.

장인 권질의 선친은 佳日권씨의 중시조되시는 권주라는 분으로 문과에 급제한뒤

참판에 이르러, 중앙 정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인물이었으나,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평해로 유배되었고, 장남 권질도 거제도로

유배되었는가하면,

평해에 유배중이던 권주는 사약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누각에서

투신 자살하였고, 부인 역시 남편 소식을 듣고 자결을 했다.

이런 평지풍파 대환란의 상황에서 자란 권질의 딸이다보니, 정신이상이 왔던것이다.

 

권씨 부인은 여러차례나 남편을 곤혹스럽게 할때가 너무도 많았다.

상가에 입고갈 도포자락이 헤어져 꿰매달라 하였더니, 빨간 천으로 기어놓지를

않나,제사상을 차리다가 과일이 떨어지자 얼른 치맛속에 감추지를 않나,

글씨를 쓰다 벼루에 물이 떨어져 물좀 가져다 달라 하였더니 물동이채 방으로

들고 들어와 벼루에 붓는등 실로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경우들이 허다했다.

그런 부인임에도 그 부인의 모자람을 탓하거나 홀대하지 않고 사랑과 배려로

감싸준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였다.
퇴계야말로 군자의 도를 제대로 알고 몸소 실천한 선비중 선비가 아닌가 싶다.

한편 퇴계는 선비에게 있어 가난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떳떳함이라고

 '寒儒'라는 말을 즐겨썼다.

그러면서 '산은 깊을수록 좋고, 물은 멀수록 좋으며, 글씨는 맛이 있어야하고,

사람은 가난한데서 낙이있다며 가난을 선비의 당연한 삶으로 받아들인 그였다.

그런 위대한 삶을 살았기에 오늘날도 그분을 尊崇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는가!

군자의 도가 부부로부터 시작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일찌기 터득한

퇴계의 선각을 떠올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