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병산서원에서 회회마을과 입암선생 삼부자 이야기를

오토산 2017. 7. 15. 17:34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0651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입암선생 삼부자 이야기를

 

 

병산서원관리위원회가 진행중인 2017인문독서아카데미가 7.15. 만대루에 40여명의

 지역민과 관광객들이 모여서 풍산류씨 600년역사가  담겨져 있는 전통마을이며

징비록과 하회탈등 유.무형 문화재가 전해오는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을 배웠다. 

 

河回마을은 엘리자베스 영국여왕과 미국대통령 부시 부자가 방문한바 있고

유교문화와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를 잘 지켜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飛龍在天時代)을 만드는 유교적 가치에 세계인들이 공감하고

 있어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立巖 柳仲(1515~1573)선생은 류운룡,류성룡의 아버지로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 급제한후 훈도로 지방교육에 힘써왔고 1549년 공조좌랑 1664년

 여주목사 1564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승지,예조참의,경연관등을 역임했고

하회마을 입암고택에 겸암 류운룡과 별묘사당에 불천위로 모셔져 있으며

양진당은 겸암의 6대손 류영 공이 중수후 양진당이란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맏아들 이름(雲龍)은 주역 건괘 구오효의 飛龍在天의 대인 되기를 기대하였고 

둘째아들 이름(成龍)은 구이효의  見(현)龍在田의 룡의 덕성을 간직하여 대인

 되기를 기대하였으며 두 아들에게 부용대앞 낙동강 중류에 있는 바위를 가리켜

형제간의 우애와 탁류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 가르쳤다고 한다.

 

謙庵 柳雲龍(1539~1601)선생은 16세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영달에 뜻이 없이

자아확충에 정진하여 도산에 입문하였고 29세(1567 명종22)에 겸암정사를 지어

퇴계선생이 편액(謙庵亭)을 써 주었고 1572년(선조 5) 아버지 뜻에 따라 陰仕로

풍저창직장,내자사주부,진보현감,인동현감등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시에는

풍기군수,원주목사등을 역임하였고 그후 광흥창주부,한성부판관,평시서령,

시복시첨정등 역임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시 영의정 서애가 선조에게 해직을

건의하여 어머니를 비롯 가족을 무사토록 하여 효심에 대한 칭송을 받았다.

 

하회마을이 건너다 보이는 부용대옆 아름다운 자연속에 지어진 겸암정사와

1583년(45세 선조16) 진보현감으로 있다 모친병환으로 사퇴하고 돌아와 지은

마을북쪽에 '부용대밑을 흐르는 깊고 맑은 소'를 뜻하는 賓淵精舍가 있고

부용대기슭에 1786년(정조10) 창설하여 제자 동리 김윤안과 종손자 류원지와

 함께 花川書院에 배향되어 오다 훼철되었고 1996년 사림공의로 복원하였다.

 

西涯 柳成龍(1542~1607)선생은 퇴계문하 입문하여 퇴계는 인품을 보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 했고 1566년 25세에 문과급제, 1568(선조1) 공조좌랑,

聖節使서장관,사간원,병조,홍문관,이조,사헌부,의정부등 요직을 거쳐

 동부승지, 이조참의,홍문관부제학,대사간,우부승지,도승,대사헌에 올랐고

1588년 양관대제학,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 역임, 정여립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되자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1590년 우의정에 올라 광국공신 풍원부원군에 봉해지고 임진왜란시에는

 병조판서와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반대파의

탄핵으로 면직됐으나 1593년 명나라장수 이여송과 평양성, 서울을 수복후 

다시 영의정에 올라 1598년 명나라관료 정용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무고로 탄핵당해 삭탈관직 57세에 향리에 내려와

농환재를 짓고 징비록을 저술하고 1607년 66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종택은 하회마을에 충효당이며 유물전시관이 함께 있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부용대의 아름다움을 볼수 있는 燕坐樓가 있는 遠志情舍와

부용대 층벽길을 이용하여 겸암정사를 오가며 형제간의 정을 나누던

玉淵精舍가  부용대 동편에 있으며 병산서원에서 매년 제향되고 있다.

 

砥柱中流碑는 야은 길재선생의 묘소가 있는 인동 오포에 두 형제가

세운비로서 중국 하남성 지주산은 황하의 격류에도 꿋꿋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아 역경속에서 절의를 지키는 사람 '지주중류'에 비유하며

겸암이 인동현감시절 야은 길재선생의 불사이군의 충절 기리기 위해

서애가 비문을 지어 세웠다고 한다.

 

이란 낙타의 머리에 사슴뿔, 의 귀, 토끼의 눈과 돼지코, 잉어의 수염과

물고기비늘, 몸은 , 호랑이 다리와 발바닥, 발톱등 아홉동물 특징부위를

따다 만든 상상의 동물로 용의 비늘은 등에 81개가 있고 턱밑에 역으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어 이 곳이 용의 급소이고 이곳을 건드리면 해롭다는 전설도

있으며 세상을 조화할수있고 변화가 무상한 능력으로 조선개국후 태조를

찬양하고 선정을 베풀어 달라고 노래한 용비어천가와 용꿈, 용상,용안, 용연,

 

용암, 등용문등 우리생활에 사용되고 있으며 오조룡(중국), 사조룡(한국),

삼조룡(일본)등 용의 발톱 숫자로 어느나라 그림인지 구분도 된다고 한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더위를 식혀주는 만대루 루상에서 하회마을과

입암선생 삼부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주가 되면 백일홍나무가 만개하니 좋으신 강의도 듣고 주변 풍광도

구경하시러 많이 참석하여 달라는 류한응 회장님의 부탁을 마지막으로

강의를 하여주신 이동수박사와 행사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함께하신 모든분들이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빌어본다.

 

세상사 한마디

서애선생이 처절했던 국난을 극복한 공로는 어디가고

삭탈관직 당해 고향으로 가는 한강나루에서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자신의 담담한 심정을 읊은  충절시

田園歸路三千里  惟幄深恩四十年

立馬渡迷回首望 終南山色故依然

 

 

 

 

 

 

 

 

 

 

 

 

 

 

 

 

 

 

 

 

 

 

 

 

 

 병산서원뜰안의 무궁화와 입구에서 만난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