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해설

박정희를 둘러싼 증언(낙여)

오토산 2018. 3. 23. 22:13



박정희를 둘러싼 증언.

초임교사 박정희와 문경 제자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문경초등 교장(아랫줄 가운데)과 교사들.

윗줄 오른쪽 첫 번째가 박정희 교사, 그 옆이 유증선 교사.

경상북도 문경은 대구사범을 나온 스무 살
청년교사 박정희(朴正熙· 1917~1979)의 첫 부임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 문경읍’ 문경초등학교

(당시엔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에서 1937년 4월부터 40년 3월까지

제자를 가르쳤다.

3년간 의무복무를 채우자마자 박정희는 만주(만주군관학교)로 떠났다.
  
문경 사람들은 ‘교사 박정희’를 여태 기억한다.

박정희의 하숙집을 제자들과 청운의 꿈을 가꾸던 곳이라해

청운각(靑雲閣)이라 부른다.

주민들과 제자들은 박정희가 서거한 1979년 10월 26일을 기억하며

해마다 추모행사를 갖는다.

대통령, 장군, 혁명가가 아니라 가난하던 시절

새까만 얼굴의 박정희를 추억하기 위해서다.
  
청운각엔 살구나무가 있었다.

 60여 년 된 살구나무 고목이 10·26 후 제철도 아닌데

연분홍 살구꽃을 피웠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고사했다.

당시 문경 사람들은

 “서거를 비통히 여겨 몇 송이 꽃을 피운 뒤 순절했다”고 입을 모았었다.

고사한 나무는 현재 유리관 안에 보관돼 있다.
  
살구나무가 죽었을 때만큼이나 요즘 상황이 엄중해서일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청운각을 바라보는 문경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루 평균 방문객 수가 400~500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40~5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기자가 문경을 찾은 것은 박정희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청운각 관계자는

 “제자 상당수가 돌아가시고 대개 80대 후반, 86~92세 사이셔서

거동이 어렵고 설령 만난다 해도 청력이 나빠 대화가 불가능하다”며

“헛고생 말고, 와도 반길 사람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제자 정극모(작고)의 아내 조복순 할머니(89)를

만나기 위해 굳이 문경으로 향했다.
 
  진남교 아래서 익사할 뻔한 제자 정극모의 숨겨진 이야기
 

문경읍 진남교. 한때는 물살이 거셌다고 하지만 지금은

 수심이 얕고 물결은 잔잔했다
.

  조갑제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선일보》 刊)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지금 서울 강동구 고덕동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정순옥(73) 할머니는

박 선생이 구해낸 물에 빠진 아이는 정극모였는데,

결혼도 않고 있다가 6·25 직전에 죽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의 이 용감한 행동은 그 목격자가 많이 살아 있어

 ‘과장된 신화’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사고 현장인 진남교에 가보았더니 그 밑을 흐르는 강은

폭이 약 100m이고 물살이 셌다.

상당한 수영 실력과 용기가 없으면 뛰어들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하 생략)〉(2권 제5장 ‘산촌’ 중에서)
  
  정순옥의 회고에는 이런 증언도 덧붙어 있다.

 “우리가 장난을 하거나 줄이 삐뚤어지면 한 대씩 맞아가면서

목적지인 진남교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즐겁게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다고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박 선생님은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이 죽는다고 고함을 치며 다른 5, 6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둑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한참 만에 박 선생님이

 다 죽은 아이를 물속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인공호흡을 해 물을 토하게 하니,

그제야 깨어나는 아이를 보니 선생님이 하느님같이 고마웠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박정희의 제자 정극모다.

2016년 12월 중순 기자가 다시 찾은 진남교(鎭南橋)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 안내판을 보니 2017년 5월 2일까지 공사가 진행된다고 적혀 있었다.


진남교 바로 옆에 콘크리트 다리가 높다랗게 세워져 차량이 쉴 새 없이 지나고 있었다.

진남교는 상대적으로 낡고 왜소해 보였다. 우기가 지난 겨울이어서 그런지

강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수심이 얕았고 물결은 잔잔했다.

문경읍 지곡2리로 차를 몰았다.


조복순 할머니는 6·25 때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의 제자 정극모의 아내다.

전사했다는 풍문과 달리 그는 6·25 당시 입대해 5년간 군복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1남3녀를 키웠다고 한다.

쉰둘 되던 1978년 중풍으로 사망했다.
  
 조 할머니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아흔한 살”이라며

“생전 남편이 진남교 아래 강물에 빠졌다가 살아난 얘기를 자주 했었다”고

회상했다.


“(남편이) 자꾸 물속으로 빠져들더래요.

그때 (박정희) 선생님이 물에 뛰어드셔서 살았다고 했어요.”
  
  ― 부모님도 기뻐하셨겠네요.  
  “그럼요. (시)아버님이 9남매를 낳으셨지만 모두 죽고 슬하에 외아들뿐이었어요.

그 귀한 아들을 낳으려 살던 집도 버리고

영산(靈山)이라는 주흘산으로 들어가셨대요.


산의 정기를 받아 낳은 아들이 제 남편입니다.

아버님은 큰 눈이 오면 아들이 학교에 등교할 수 있게

주흘산에서 마을 입구까지 눈을 다 치우시던 분이셨어요.


그만큼 아들을 사랑하셨어요.

그렇게 귀한 아들인데, (물에 빠져) 죽다가 살아났으니

얼마나 기쁘고 놀랐겠어요.
 
  아버님이 박 선생님을 찾아가 고맙다고 선물을 하셨대요.

그 시절, 선물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고욤나무 열매를 따다가

함지박에 둬 삭으면 노란 물이 배는데 그 물이 조청보다 달고 맛있어요.

그걸 사기 됫병에 담아 선물로 드렸대요.”
 
  조 할머니는 “(남편이) 평소 ‘죽었을 몸인데 (살아났으니),

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곧잘 했다”고 말했다.


조 할머니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청운각에서 열리는

10·26 추모식에 남편 대신 금번도 참석했다고 한다.
  
  
  대통령 시절, 가난한 제자에게 금일봉 보내


박정희 하숙집에 있는 살구나무 고사목.


  기자는 박정희의 하숙집인 청운각에서 권순영(61·문경인쇄소 대표)씨를 만났다.

그는 이 지역 유지들과 박정희 제자들의 모임인 ‘청운회’ 사무국장이다.
 
  ― 청운회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나요.
  “처음엔 ‘문경 박달회’ 모임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께서 교사 시절,

소사로 근무했던 분이 황금달(작고)씨입니다.


박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청와대에서) 박달나무를 구해달래서

그분하고 그분 동생이 몇 그루 구해줬다고 합니다.

요즘 청와대에 그 나무가 있니, 모르니, 그런 말이 있어요.


어쨌든 그런 인연으로 문경 유지, 제자들 몇 분이서

 ‘박달회’라는 모임을 하다가 1978년인가 79년인가 주흘회로 이름을 바꿨어요.


높이 1106m인 주흘산은 조령산, 포암산, 월악산 등과 더불어

소백산맥 중심을 이루는 산세가 아름다운 산입니다.

그 주흘산 이름을 딴 주흘회가 나중 청운회로 다시 바뀌었어요.”
 
  ― 교사 박정희를 기억하는 여러 증언이 많더군요.

 미화된 것도 있지 않을까요?
 
  “당시 제자들 나이가 7~14세까지니까, 어슴푸레 기억하는 것을

누가 이야기하면 어떻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미화된 것이 많을 수 있는데,

제가 알아보기로 근거 없는 미화는 없더군요.”
박정희는 부임 첫해(1937년)에 3학년을 담임, 이듬해에

 2학년과  5학년의 합반 담임, 마지막 해에 1학년을 담임했다.
 


1979년 10월 30일, 문경 주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를 슬퍼하며

 분향소를 나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권 국장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박정희 교사가 조선어 시간에 강변을 하다가 (교실에 걸린) 일본 천황 사진(틀)을 부쉈어요.

그분 성격이 다혈질적인 면이 있단 말이죠. 교장이 알고 난리가 났어요.

당시 소사 하던 황금달씨가 박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청소하다가 깼다’고 했대요.

그렇게 해서 무마가 됐는데, 그게 증언으로 나왔어요. 근거 있는 말이었어요.
 
  이런 얘기도 있어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에 다닐 때

문경을 다시 찾았는데 그때 경찰서장 격인 일본 경찰을 불러 혼을 내줬다고,

박정희에게 빼마리(따귀)를 맞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관련 증언을 직접 듣진 못했어요.”
 
  ― 박 대통령이 천황 사진 액자를 부쉈다고요?
 
  “네. 그래서 (박 대통령이) 2군부사령관 시절에 황금달씨에게 큰 사례를 했다고 해요.

그분 손자 말이, ‘당시(1961년으로 추정) 돈으로 600환을 받았다.

논 여섯 마지기 땅을 사고도 남았다’

그래요. 문경에는 산이 많아 논농사 지을 땅이 별로 없어요.

여섯 마지기라고 하면 이곳에서 큰 부자입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한 해 전인 1978년 11월, 문경에 오셨어요.

그때 제자들이 많이 모였는데 한 제자가 대통령 일행 주위를 기웃기웃하니까

박 대통령이 ‘쟤는 지금 뭐하노?’ 하고 물으셨대요.

그 제자가 학창시절 달리기를 잘해서 기억에 남았다고 합니다.

곁에 있던 다른 제자가 ‘시집가서 가난하게 산다.

집에 비가 샌다’고 말씀드렸는데 박 대통령이 나중 그 제자에게 돈을 부치셨대요.

그리고 몇 달 뒤 새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집 지을 만큼 돈을 주셨나 봐요. 그렇게 정이 많으신 분이셨어요.

선생님이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랬는지 10년 뒤에야 제자가 그 사실을 공개했어요.”
  
  박정희 책걸상이 청운각에 기증된 사연


초임교사 시절 박정희.(사진 왼쪽)


  청운각에 전시된 교사 박정희의 유품 중 낡은 책걸상이 눈에 띄었다.

매우 단단해 보이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지만 안정감을 주는 책걸상이었다.

그 책걸상을 보니 분필가루 날리는 칠판, 양은도시락,

손때 묻은 풍금 같은 따스한 이미지가 오버랩됐다.

이 책걸상은 초임교사 박정희와 하숙방을 함께 썼던 동료 교사

유증선(柳增善·2000년 작고)씨가 보관하던 것이라고 청운각 관계자는 설명했다.
 
  서울로 올라와 유증선씨의 장남 유호문(柳浩文·85)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서울대 공대를 나와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산업입지국장을 지냈다.

한국의 산업화 시대를 이끈 엔지니어다. 10·26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대한준설공사(한진중공업) 대표, 한진종합건설 대표 등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선친과 동료 교사셨던 박 선생님은 제 초등학교 1학년 은사”라며

“선생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기억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나실 때 문경서 쓰시던 책걸상과 책들을

모두 우리 집에 주시고 가셨어요. 책 중에는 선생님이 평소 읽으시던 시조집이 있었고,

필경을 하여 등사기로 밀어낸 두꺼운 동요집도 있었어요.

‘누나 누나 사촌 누나 시집살이 어떱뎁까’라는 ‘시집살이요(謠)’ 한 구절이 기억납니다.
 


박정희 교사가 쓰던 책걸상.


  제가 공직에 있을 때 공업단지를 조성하는 책임을 맡았었는데,

공장을 가동하려면 산업용수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송수관 파이프 발주를 많이 했는데

그때 박 대통령의 장조카 박재홍(朴在鴻·76)씨가 강관 파이프 공장을 해서

만날 일이 많았어요. 하루는 그분이 ‘문경에 보존가옥을 만든다’고 해서

제가 박 선생님 책걸상을 기증했죠.”
  
  ― 선친(유증선)과 박 대통령은 어떤 사이셨나요?
  
  “아버지가 (박 대통령보다) 5년 선배 됩니다.

대구농림학교를 나오신 뒤 다시 대구사범에 가셔서 먼저 발령을 받으셨는데

전남 영암에서 근무하시다 문경으로 발령이 나셨어요.

한동안 집을 구하지 못해 박 대통령과 함께 사셨어요.
 
  선생님이 만주로 떠나자 선친은 경북 영주로 발령이 나셨고

해방 후엔 대구에서 근무하셨어요. 나중에 안동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하셨어요.”
  
    선생님과 맞담배 피운 유일한 제자


1939년 1학년 학급 담임을 맡았던 박정희 선생(오른쪽 끝). 왼쪽 끝이 동료 교사 유증선, 가운데 학생이 1학년 유호문이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유증선의 이런 증언이 나온다.
 
  〈…박 선생은 교사들과는 비사교적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어린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코흘리개들과도 사근사근 이야기를 잘도 하는 것이었다. …

소풍을 가면 박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노래 부르는 것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2권 제5장 ‘산촌’ 중에서)
  
  계속된 유호문씨의 회고다.

 
  “박 선생님이 인정이 참 많으셨어요. 그때는 시골에 다방이 있었나…

오갈 데가 없었던지 우리 집에 자주 오셨어요. 어머니하고 친하셨는데

어머니가 ‘박 선생, 박 선생’ 하고 정겹게 부르던 말투가 기억나요.
 
  학예회 때 옛날 동화 같은 이야기를 발표하는데

박 선생님이 써준 것을 달달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혼난 적이 없었어요, 한번도.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박정희의 동료 교사 고 유증선의 아들 호문씨.



  공직에 계실 때 박 대통령과 만나신 적이 있나요?
 
  “그럼요. 한번은 (건설부로) 초도순시를 오셔서 절 찾으셨어요. 

부모님 안부를 물으시더니 저녁에 초대하겠다고 약속하셨죠. 
그래서 공직사회에 제가 문경초등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졌어요.
 
  10·26 나던 그해 7월인가 선친이랑 저, 그리고 문경초등 동기 
몇 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셨어요. 그날 오후 5시부터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오래 추억을 나눴어요.”
  
 

 

 

그때 기억나는 일화가….

 
  “박 대통령이 저더러 담배를 피우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계신 자리에서….

기어코 담배를 권하시며 덧붙이시길 ‘어른 앞에서 담배 안 피우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다. 옛날엔 담뱃대가 길어 맞담배를 피우면

건방져 보였겠지만 지금은 (담배 한 개비가) 조그마한데 무슨 상관이냐.

같이 안 피우니 아랫사람이 밖에 나가 피운다. 부자간에도 피워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셨어요. 할 수 없이 피웠죠. 대통령 앞에서,

선생님 앞에서 담배 피운 제자는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하하하. 참 인정이 많으셨어요.”
 
  ― 공적인 업무로 만난 일은 없나요?
 
  “제가 건설부에 있을 때 산업화 초기, 우리나라 공업단지 조성 업무를 도맡아 했습니다.

울산공업단지, 포항제철 입지를 제가 다 찾아냈어요.

일본 북해도에서 구주까지 안 가본 곳이 없고 일본 제철공장을 다 방문했어요.

처음엔 경남 삼천포(1995년 5월 행정구역 개편 때

사천군과 합쳐져 사천시로 개편되면서 지명이 사라졌다)에

정하려던 걸, 다시 찾은 게 포항입니다.

그래서 포항에 입지를 찾아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했습니다.

 포항제철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잊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죽음과 박 선생님 추억 


1979년 10·26이 있기 전인 7월, 박정희 대통령은 문경초등학교 제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박 대통령 바로 곁에 앉은 이가 동료 교사 유증선이다.

 그 옆이 제자 유호문(당시 건설부 국장 시절)이다.


  “교사 박정희가 교실에 걸린 일본 천황 사진 틀을 부쉈고

이를 일본인 교장이 발견했지만

학교 소사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었다.


기자는 《월간조선》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공동 주최한

시민강좌(‘근대화의 국부 박정희를 다시 본다’)에

참석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유성희(柳盛熙) 이사장을 통해

박정희 제자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서 놀라운 증언을 들었다.
 
  경기도 이천의 율면초등학교 교장, 용인교육청 교육장 등을

역임한 이응주(李應疇·87) 선생은 주흘산 아래 위치한 팔령리 두메산골 출신이다.

문경초등 30회 졸업생으로 1938년 2학년 때 박정희와 사제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첫인상은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든든한 큰형님 같았습니다.

학생들에겐 젊고 멋진 ‘오도코노 보쿠 센세이(男の 朴先生·남자 박 선생님)’로

인기가 많으셨죠.

강조하신 말씀이 ‘공부를 잘하라’보다

‘무엇이든 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라’셨어요

. 또 ‘힘이 모자라면 도움을 받아서라도 이겨라’

‘사내는 3년에 한 번 웃을까 말까 해야 한다’는 말씀도 떠오릅니다.”
 
  ― 철봉도 잘하시고 나팔도 잘 부셨다는 증언도 있어요.  
  “체육시간 때는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동기를 불어넣으셨고

가을 운동회 때는 목총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지도했는데

실전을 방불케 했어요.

특기는 단거리요

, 악기를 잘 다루셨는데,

특히 나팔을 잘 불고, 또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철봉, 기계체조 등 만능 체육인으로 기억됩니다.”
그는 “박 선생님은 모교 뒤를 병풍처럼 두른 주흘산을 좋아하셨는데

어린 저희와 등반을 자주 하셨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게 특히 강조하신 걸 단어로 요약하자면

정의로움, 달성과 투지, 규율, 민족혼, 협동정신입니다.

제가 43년 동안 교직생활을 하고 정년퇴직했는데

대과(大過) 없이 물러날 수 있었던 것도 박 선생님 덕이라 생각합니다.”
 


1938년 2학년 때 담임 박정희와 만났다는 이응주 선생.


  이응주 선생은
“사람들이 박 선생님을 친일파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속이 상한다”면서 오래된 기억을 소개했다.
 
  “왜놈들이 한국인을 자기네 사람으로 만들려고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학교나 집에 걸어두고  그 앞에서 절하고 손뼉 치며 기도하게 했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당직이셨는데, 그걸 때려 부쉈어요.
 
  그때 교장선생 이름이 ‘아리마’였는데 이튿날 아침 그걸 발견했어요.

소사를 불러 추궁하니 딴사람 같으면 고자질했을 텐데,

박 선생님이 간밤에 숙직 선 것을 알았기에

‘(총채로) 먼지를 털다가 떨어뜨렸다’고 둘러댔답니다.”
 
  권순영씨는 일본 천황 사진 틀을 부쉈다고 했고,

이응주 선생은 ‘천조대신’ 위패를 부쉈다고 했다.

두 증언이 다소 엇갈렸으나 일제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는

의미는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 어떻게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합니까.

누구한테 들은 건가요?

  “그때 그런 얘기가 (친구들 사이에) 있었어요.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친구들은 기억 못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워낙 할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기억합니다.”
 
  그는 자신의 조부인 이원규(李源圭·1874~1907) 선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독립운동가인 이원규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구한말 호서창의대장으로 추대됐던
의병장 이강년(李康年·1858~1909) 장군이

휘하에서 당신의 재산 모두를 독립자금으로 헌납하시고

몸소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셨어요.


당신 슬하에 3형제를 두셨는데 장남과 차남은 일제 핍박으로

고향을 등져야 했고, 막내인 아버지는 딸 여섯 둔 15촌 아저씨의

집으로 양자를 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전사하셨을 때 아버지는 겨우 첫돌이 지났을 나이셨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힘든 시절을 견디시며

농사꾼으로 나라 잃은 세월을 이겨내셨습니다.

어린 시절, 상투 튼 집안 어른들께서 저를 무릎에 앉히시며

‘응주야, 너는 커서 네 할아버지의 원수를 꼭 갚아라’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당시 박 선생님의 일화를 잊을 수가 없지요.”
 
  이응주 선생은 “박 선생님은 일제에 복수하기 위해선

힘을 기르는 방법 외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만주로 떠나셨지 친일하러 가신 게 아니다”고 했다.
 
  “박 선생님은 하늘에서도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을 위해 잠 못 이루고 계실 겁니다. 

 이제는 우리 선생님이 아닌 ‘대통령 박정희’ 선생님이십니다.”⊙
 
[월간조선 2017년 1월호 / 글=김태완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