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거경대학에서 퇴계묘소와 하계마을을 다녀와서

오토산 2018. 4. 22. 22:20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1287

 

 

 

거경대학에서 퇴계묘소하계마을을 다녀와서

 

 

 

4월22일 고종황제가 우정총국을 개설(1884.4.22)을 명령한날을 기념하여

1956년 '집배원의 날'로 시작하여 '체신의 날'로부르던 '정보통신의 날'이며

1970년부터 사작된 새마을 운동의 지속적인 실현을 위하여 2011년 제정된

'새마을의 날'이기도 하다.

 

거경대학에서 4월담사로 퇴계선생의 향기를 느낄수 있는 도산지역을 찾아서

하계마을, 퇴계묘소, 육사시상길, 이육사문학관, 월란정사, 노송정종택,

온계종택을 탐방하는 시간을 가지며 첫번째로 하계마을과 퇴계묘소를 찾았다.

 

下溪마을은 퇴계선생이 초년에 잠시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살았던 마을이고

사후에 체백을 모신곳으로 어느마을보다 퇴계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며

퇴계선생의 손자 동암 이영도(1559~1637)가 터를 열어 400여년동안 조선시대

문과출신자 15명, 일제암흑기 독립운동가 25명을 배출하는등 많은 학자와

 관료를 배출하여 영남의 유림문화를 주도했던 마을이었으나 이 마을 사람들의

 역사와 삶의 흔적들이 안동댐 수몰로 사라지게 되고 마을앞에는

'독립운동기적비'만 쓸쓸히 자리하고 있었다.

 

기적비앞에서 마을현황에 대하여 설명을 하던 이태원 도산서원별유사는

.이 마을 사람들은 '배우고 알알던 것을 실천하였을 뿐'이라며 독립운동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겸손의 표현을 하여 왔다고 덧붙였다.

하계마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퇴계선생묘소로 올라갔다.

 

퇴계선생묘소를 오르는데 가파른 계단옆으로는 안동시에서 난간을 설치하였고

참배를 하고 돌아보니 묘소에는 서울시시설관리공단에서 잔디보식으로 정비되어

있었으며 관직을 쓰지 않고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간결하게 적혀있는 묘전비는

 측면에 서향으로 서 있었으며 손자대까지의 묘비들도 측면에 설치하여 겸양의 뜻을

 전하고 있다고 하며 묘비는 비두와 비신이 한개의 돌로 되어 있었다.

 

 예장을 하지말고 상사에 유밀과를 쓰지말며 비석을 간단히 쓰도록 유계(遺戒)를

 남기시고 1570년 12월 8일 좌서(坐逝)하시었다고 전하며 1571년 3월 현위치에

 장사지내며 예장을 사양했으나 조정에서 허가하지 아니하고 석인, 석상,

혼유석이 너무크고 사치스러워 선생의 조카 영이 눈물을 뿌리며

 '이럴줄 알았으면  유계가 없는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고 한다.

 

내려오면서 '사후에도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다'라는 유언으로

선생의 묘소아래 누워계시는 며느리(봉화금씨)의 효성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는 육사의 시상길 윷판대를 자나서 육사 문학관으로 향했다.

 

설명을 하여주신 이태원 별유사님과 권갑현 지도교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답사를 함게 하신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사 한마디

현대를 살아가는 선비정신

修己治人(수기치인) : 먼저 인격수양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라

薄己後人(박기후인)             : 자기에게 박하고 남에게 후하게 살아라

先憂後樂(선우후락)      : 궂은 일을 먼저하고 즐거운 일은 나중에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