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거경대학에서 영양 두들마을을 다녀와서

오토산 2018. 5. 2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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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경대학에서 영양 두들마을을 다녀와서



5월20일 거경대학에서 버스 두대와 승용차와 봉고등 차량 4대로 백여명이 영양

 두들마을과 연당마을, 주실마을을 답사하면서 영양가있는 답사를 할 계획이다.

첫번째 두들마을에서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광산문우등을 답사하였다.


위대한 어머니를 만나는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는 석계선생 13세 종손님께

두들마을의 유래와 여중군자 장계향의 일생에 대한 설명을 듣고

 경전독송시간을 가진후 영양군 직원의 해설을 들으며 마을 답사를 하였다.


장계향 여중군자1598년 경당 장흥효와 안동권씨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19세에 영해 재령이씨 가문에 출가하여 7남3녀를 훌륭하게 양육하고 말년에는

최초의 한글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하고 1680년 83세로 돌아가시자

'영남의 신사임당'으로 비견되면서 유림에서 '여중군자'로 숭상하였고 1689년

셋째아들 현일의 관직이 대사헌(종2품)겸 성균관 쇄주(정3품)에 임명돼자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고 한다.


교육원에서 도토리광장을 거쳐 두들책사랑옆의 광산문우(匡山文宇)를 찾았다.

광산문우는 소설가 이문열의 문학연구와 문학도 양성을 위한 공간으로

마당에는 물을 담아 방화에 이용도 하고 물을 담아 놓으면 귀신이 찾아와서

물에 비친 자기얼굴을 보고 놀라 도망쳤다고도 하는 드무가 있었고

붉은빛이 숨어 있다는 자은헌(紫隱軒)은 시상을 떠올리는 공간이라 하며

백송(흰소나무)과 작약꽃, 불도화등 여러가지 꽃들도 볼수 있었으며

이문열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석간고택(石澗古宅 海上古宅)은 항재 이숭일의

7세손이고 이문열의 5대조인 이수영의 살림집이였으나 한국전쟁후 인척인

석간 이철호가 매입하였으며 한국전쟁의 충격으로 이문열은 영양, 안동,

밀양등으로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다고도 한다.


석천서당(石川書堂)은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1674)선생이 영해에서

석보로 이사와 세운 석계초당을 후손들과 유림이 중건하였다고 하며 마루쪽

창호는 들어열개문으로 하여 전체를 한칸으로 사용할수 있게 하고 있으며

현판글씨의 석(石)자에 점이 하나 더 찍혀 있는것은 낙관을 대신한 표식이라는

 의견과 공간배치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 광장 인근에는 꿀밤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었으며

 절벽밑에는 선비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덕목으로 삼고 궁불실의(窮不失義)를

 령으로 실천하라는 뜻 담긴 낙기대(樂飢臺)가 있었으며 건너편에는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지향하고픈 마음을 냇물로 씻어 내기위해 바위에 앉아

대자연을 감상하였던 곳으로 조망이 한눈에 들어오고 심신이 상쾌하고 잡념을

잊고 마음을 씻을수 있다는 에서 이름지어졌다는 세심대(洗心臺)가 있었다. 


두들마을 답사를 마치고 12시 40분에 출발하여 영양입구 삼거리를 경유하여

선바위관광지의 선바위가든에 도착하여 산채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더니

더 없이 맛있는 점심이 되었으며 오후에는 연당마을 서석지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세상사 한마디

여중군자로 칭송받는 장계향에서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까지

음식 하나에도 접빈의 도리를 찾고 고택마다 선비의 자부심을 쌓는곳

풍토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풍토를 가꾼다는 것을 알게 하여준 곳

시대를 초월한 향기가 느껴지는 전통을 이어온 언덕 "두들마을"




































아궁이와 굴뚝이 한곳에 배치되어 돌아올구들이라 한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