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안동)’의 세 가지 뜻 ◪
[김언종/고려대명예교수]
우리 고향의 이름, ‘安東’은 역사에서
언제부터 등장하였을까?
서기 668년에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략하고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그 시작이었다.
당나라는 동쪽의 안동도호부 뿐만 아니라,
서쪽에 안서도호부, 남쪽에 안남도호부 등
여섯 개의 도호부를 변방에 설치하고 영토 확장을 도모하였다.
즉 안동도호부는 당 제국이 동쪽 고구려 땅을 경략하고
북진하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었는데,
그 후 나당(羅唐) 전쟁에서 신라에게 밀리자
작전상 현재의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으로 옮겼고,
뒤에 정치 군사적 상황 변동에 따라 현재의
무순(撫順) 조양(朝陽) 의현(義縣) 등지로 옮겼으며,
761년에는 더 이상 유지 할 수 없게 되자 폐지하였다.
이쯤에서 우리가 눈치 챌 수 있는 것은 ‘安東’이란,
‘동쪽을 안무(按撫)하기 위한
군사행정기지’라는 뜻을 가진 말이라는 것이다.
‘安’은 ‘누르다’ ‘어루만지다’
‘진압하다’를 의미하는
안(按)과 같은 의미를 가진 글자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천년도 더 지난 1876년에
청나라가 압록강을 마주한 의주 건너편에
‘안동현’을 설치하였고,
1937년에 만주국(滿洲國)이 안동현의
일부를 ‘안동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신중국은 이 도시의 명칭을 안동에서
‘단동(丹東)’으로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의 사정을
알아보자. 글자로 기록된
이 지역의 첫 이름은 삼국시대 초기의 창녕국(昌寧國)이다.
이때의 국(國)은 요즘의 시 군 정도의 면적이었다.
삼국 이전부터 많은 ‘국’이 있다가 신라 고구려 백제에게 병합되었다.
창녕국은 염상도사(念尙道士)가 세웠는데, 뒤에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던
신라에 병합되고 부터 고타야군(古陀耶郡)이라 불렸다.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이 중앙집권을 위해
주(州) 군(郡) 현(縣)의 명칭을 재정비할 때
옛 창녕국이란 의미의 고창군(古昌郡)으로 바꾸었다.
그 뒤 고려 때엔 영가(永嘉) 길주(吉州)
복주(福州) 등으로 개명되기도 했다.
그러면 ‘안동’이란 명칭은 언제 처음 생긴
것일까? “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임금 견훤과 더불어 이 고을 땅에서 싸워서 견훤을 패배시켰다.
그 때 이 고을 사람 김선평, 김행 ,장길이 태조를 도와서 전공이 있었으므로 …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로 삼았다가, 뒤에 영가군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顯宗) 이후에 다시 안동부로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그 뒤 안동부는 이른바 ‘남적(南賊)’이라 불렸던 신라 재건 세력인
김사미(金沙彌) 효심(孝心)의 난(1193-1194) 평정에 공로를 세워 안동도호부로,
역시 신라 부흥을 위해 거병했던 패좌(孛佐)와
이비(利備)의 난(1202-1204)을 평정하는데
공이 컸다고 하여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했다.
뒤에 한동안 복주목(福州牧)으로 바뀌었다가
공민왕이 제2차 홍건적의 난(1361-1362)을 피해
모후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함께 몽진(蒙塵)했을 때
이곳 백성들의 충성에 감동하여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공민왕의 휘호 ‘안동웅부(安東雄府)’는 이러한 사정을 대변한다.
이후 ‘안동’은 줄 곳 이 지역의 지명이다. 930년
즉 고려 태조 13년의 안동 명명 이래, 안동은 668년의 당나라에서의
최초 사례와 같이 ‘동부 지역 경략(經略)의 중요 지역’이라는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동쪽 지역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이지만 그 이면에는
‘동쪽지역을 진압하는 행정 군사적 요충지’라는 속뜻을 가졌다.
고려의 안동 경영의 결과 신라는 그로부터
5년 뒤에 멸망하고 만다.
고려 태조 23년에는 상주를 안동도독부로 삼은 적이 있고,
현종 3년에는 경주를 안동대도호부로 삼은 적도 있다.
이처럼 안동이 고정된 한 지역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신라부흥운동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安東’은 ‘征東’과 다름없는 말이며 여기서의
‘東’은 당연히 한반도 동남부 지역이다.
몽고와 고려가 일본 정벌을 시도하던 13세기 말에는
그 의미에 일본까지 포함되기도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건국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전 이후
서구 열강의 패권주의에 반대한다고 천명하였다.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반식민지로 몰락한 치욕에 절치부심하면서
미국과 소련에 상대적으로 약소한 자국의 처지를 미봉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신중국의 이미지를 선양하기 위해서였다.
요녕성 동쪽 끝,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접경한 그 곳에
청과 만주국이 설치한 안동, 제국주의 냄새가 풀풀 나는
‘안동’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65년 1월부터 안동을 ‘단동(丹東)’으로 바꾸었다.
그 의미를 ‘동쪽을 경략하기 위한 전초기지’에서
‘동방의 붉은 성(紅色東方之城)’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우리의 안동에 먼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있던 중국의 안동은
그때부터 제국주의의 유물로 역사책의 갈피로 사라졌으나
이 시대 미중쟁패(美中爭霸)의 정세 변화에 따라 그런 뜻의 기지(基地)로
언제든지 재등장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대한민국 안동인임이 자랑스럽다.
그 이유는 안동이 ‘한반도 동쪽 지역을 안정시키는 큰 군사 요충 고을’ 이어서가 아니라,
16세기에 이르러 그 이전과 반대되는 새로운 차원의 안동의 의미를 생성하여
후대에 길이 영속될 가치 있는 유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지되어 있듯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에서 강학한
이후에 본격 형성된 메시지,
즉 유학(儒學)에 바탕 한 선비문화를 울흥(蔚興)시켜 동방 안정의 중심이 되는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자랑스럽고,
이 전통을 계승 고양(高揚)하여 국망기(國亡期)의 구국운동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대표적 지역으로
승화(昇華)된 ‘안동’이 더욱 자랑스러운 것이다.
【재경안동향우회보 제9호.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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