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수립과 3·1
독립운동
100년
맞아
<프롤로그>
설 다음날 이재업 유교문화원 원장과 만나 세배한
후 임청각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안동의 독립운동 이야기로 이어졌다.
안동은 최초의 독립운동
발상지이면서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성지다.
2015년 기준으로
독립운동 관련 포상을 받은 유공자가 353명,
미포상 독립유공자가
678명이다.
이는 천만도시 서울
342명과 견주어도 독보적인
수치다.
평화로울 때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가 어려우면
배운 도리를 다한다는 우환의식의 발로가 가문 중심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2019년은 3·1
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3대 수반이면서 초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을 중심으로 가문 중심의
안동 독립운동의 한 실례를 살펴보았다.
안동정신의 대의를
일깨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임청각
석주 이상룡(1858~1932)은 고성이씨 임청각의 17대 종손이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1년 1월5일 99칸의 임청각과 전답을 모두 팔고
52세에 전 가족을 데리고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서간도에서 석주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를 이회영과 함께 건립해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경학사를 만들고
한족회회장,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다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아들인 이준형은
1942년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이준형의 이들이면서
석주에게는 손자와 손부가 되는 이병화와 허은 여사 역시 선대의 뜻에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허은 여사는
이육사의 어머니인 1)허길이 종고모가 되는 한말 대표적 의병장
2)왕산 허위,
3)허형 가문의 손녀이다 보니 독립운동은 필연일수 밖에
없었다.
시댁 친정 모두 서간도로
망명을 온 탓이었다.
시할아버지
이상룡,
시아버지
이준형,
남편 이병화 선생의
독립운동에 허은 여사의 뒷바라지가 있었다.
말년에 독립운동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를 출판했는데 독립투쟁 때 실생활들을 기록한
것이었다.
1915년부터
1932년까지 17년을 만주에서 서간도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아 임청각이 배출한 10번째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현재 임청각
21대 종손은 이철증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이도증의 후사를 이어 임청각 종통을 계승한 이창수(51)씨다.
2.
향산고택
석주 이상룡의 막내 처제이며 백하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인 김락(1863~1929)은 15세 되던 해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 의병장
이만도의 맏아들인 이중업에게 시집왔다.
향산은
1896년 예안의병을 창의하고 대장을
맡았다.
예안의병은 경북 상주
태봉의 수비대를 습격했고,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안동과 예안 일대 1천여가구를 방화했다.
1910년 국권이
박탈되자 향산은 죽음으로 불의에 항거하고자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은
24일간 계속되었으며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항거의
대의는 순절로 마감되었다.
향산의 기개는 다시 그
자손들로 이어졌다.
아들 이중업은 안동 일대
의병을 모으는 ‘당교격문(唐橋檄文)’이란 명문을 남겼으며 김창숙과 함께 파리장서를
추진하는 중심에 섰다.
손자 이동흠과 이종흠은
김창숙을 주축으로 한 독립자금 모금운동인 제2차 유림단사건에 연루돼 오랜 기간 옥고를
치렀다.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
벼슬을 지낸 3종질 이중언도 순절을
선택했다.
1919년 안동에서는
3월17일과 22일 예안장터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 시위에 참여했던
향산의 며느리 김락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실명했다.
향산 가문은 임청각과
더불어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이다.
김락 여사를 중심으로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
남편
이중업,
아들
이동흠,
이종흠,
사위 학봉종손
4)김용환이 모두 독립투사였다.
몇 해 전 도청안동이전을
위해 헌신하다 숙환으로 별세한 이동석씨가 향산의 주손이다.
3.
백하구려
여성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높은 김락은 석주
이상룡의 아내인 김우락(1854~1933)의 막내 동생이다.
그리고 김락과 김우락의
집안 또한 독립운동 가문으로 명망이 자자한 임하 천전(내앞)
백하구려다.
그러니까 이들 자매의 큰
오빠가 바로 백하가 호인 김대락(1845~1914)이다.
백하와 석주는 처남 매부
사이인데 독립운동을 위해 일가를 모두 데리고 서간도로의 망명은 손위 처남인 김대락이 먼저 나섰다.
만삭인 손부와 손녀는
물론 집안 청년자제까지 모두 데리고 떠난 길이었다.
이때 백하의 나이
66세였다.
석주는 이듬해 문중
30여 가구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백하와 석주는 전 재산을
팔아 조성한 자금으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독립의 터전을 다졌다.
류인식,
김동삼이 실무책임자로
경학사를 이끌고,
신흥강습소를
신흥중학교,
무관학교로
발전시켰다.
백하에게는
김우락,
김순락,
김락
3명의 여동생과 김효락,
김소락,
김정락
3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김대락
4형제 가운데서만 5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으며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전체에서는 33명의 유공자가 나왔다.
주석1,3)
허형의 딸인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
석주 이상룡의 손자 며느리 허은 여사의 종고모가
되는 육사 어머니 허길은 범산 허형,
1843~1922)의
딸이다.
허형은 허필의 형이며
허훈·허겸·허위와는 종반간이다.
허형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이 허민은 고종의 명으로
명정전과 명정문의 현판을 쓸 만큼 명필이었다.
차남
허발,
삼남 허규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딸 허길은 진성이씨
이가호에게 출가하여 이원기·이원록·이원일·이원조·이원창·이원홍을 낳았다.
그중 저항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육사 이원록과 이원기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건국포장을 받았다.
허형은 을사조약 이후
오적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08년
5월 허위가 체포되어 10월 순국하자 허겸은 1912년 허위의 가족인 제수와 네 아들 및 두 딸을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허형도
1915년 아들 허발과 허규,
그리고 동생 허필의
가족과 함께 망명,
종제 허겸 및 허위의
가족과 합류하였다.
주석2)
왕산
허위
왕산 허위는 한말 대표적
의병장이다.
허위 가문은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다.
허위의 맏형 허훈은 진보
의진의 창의장이었고,
셋째 형 허겸은 형과
아우를 도와 의병 투쟁에 참여하였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허겸·허형·허필은 그 일가를 이끌고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허위가 순국한 뒤 만주로 망명한 이들 일가는
국내외를 통해 조국 광복에 헌신하였다.
특히
허겸·허형·허필은 북만주 이역의 하늘 아래 뼈를
묻었고,
그들의 아들들은 만주와
노령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주석
4)
김락의 사위
학봉종가 종손 김용환
김용환은 안동지역 의병의 지도자인 서산 김흥락의
손자이자 김락과 이중업의 맏사위다.
그에게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아버지 고모의 손자이기도
했다.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가의 13대 종손인 그는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엄청난 종가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1896년 6월 일경이 학봉종택을 급습하여 김회락 의병
대장을 체포한 사건은 김용환을 독립지사로 키운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할아버지
서산은 동생을 숨겼다는 죄목으로 일경에게 결박당한 채 마당에서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했다.
1907년 이강년 의진에
입진해 안동 영양 예천 문경 등의 전투에 참전했고,
1909년엔 김상태
의병과 함께 봉화 서벽전투에 참전했다.
1909년엔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용의단을 조직해 매국노 일진회 간부들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1919년
1월엔 만주로 망명하려다 신의주에서 체포돼
압송됐는데 4번째 구금이었다.
학봉후손 가운데서
17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