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거경대학에서 고봉 선생 묘소를 다녀와서

오토산 2019. 11. 19. 00:18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2405




거경대학에서 고봉선생 묘소를 다녀와서



월봉서원을 나와서 서원우측 숲속으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었다.


고봉묘소는 백우산 중턱 귀전암을 오르는 곳에 경사가 완만하고 넓직하게 조성된

묘소는 정부인 함풍이씨와 두개의 묘소로 묘좌유향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상석은 표면이 물결을 치는 듯한 거친 돌로 조성되어 있었으며

묘비는 오래되어 우측에 새로이 새워져 있었고

문인석 후면의 총탄자국은 6.25때 이 곳에서의 전쟁이 치열하였음을 말하고 있었다.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은 나주출신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

호는 고봉, 존재(存齋)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고 

퇴계의 문인으로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 1558년 식년문과 급제하였으며

사헌부 집의 우부승지 등 여러관직을 거치다가 1572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대사간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김인후, 이항 등과 태극설을 논하였고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보고 퇴계선생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으며 그 뒤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퇴계선생이 귀향할때 석별의 시를 주고 받았고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퇴계선생의 묘갈명을 짓기도 하였다.


이 곳은 고봉선생이 귀전암을 들렸다가 내려오면서 터를 잡아 큰 아들에게 알려

주었던 곳으로 1573년 묘소를 썼으며 칠송당은 시묘살이를 하던곳으로

지금은 정자가 지어져 있었으며 우리는 참배를 하고 묘소를 둘러 본 후

산을 내려와 해설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필암서원을 찾아갔다.


세상사 한마디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가마난

백년(百年)이 못 되어 무덤 우회 밧즐가니

하물며 여나믄 장부(丈夫)야 닐러 무삼하리오

<묘소 입구의 고봉 기대승 선생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