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영주 이산서원과 김해허씨 묘소를 다녀와서

오토산 2020. 6. 19. 13:56

영주 이산서원과 김해허씨 묘소를 다녀와서

 

 오계서원을 출발한 버스는 담수중이라고 하나

아직은 물은 보이지 않고 잡목만 무성한 영주댐 구역을 지나서 이건중인 이산서원을 찾았다.

 

이산서원(伊山書院)은 이산면 내림리에 위치한 영주지역의 첫 서원으로 옛 부터 영주는 문예를

숭상하는 기운이 높았으나 학업을 연마하는 관사가 없어 매번 고을 의원을 빌려 사용하여 오던중

새로 부임한 군수 안상이 선비들과 부로(父老)들의 뜻을 수렴하여 1558년(명종 13) 퇴계선생의

자문을 받아 동쪽 5리 번고개에 이산서원을 건립하였고 1572년(선조 5) 퇴계선생의 위패를 봉안,

1574년(선조 7) 사액서원으로 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 내림리로 이건하였고 1871년(고종 8)

훼철 되었다가 1936년 복원하였으나 영주댐 건설로 현재의 자리로 이건 복원중에 있었다.

서원건립시 서원명, 건물명, 서원원규 등을 모두 퇴계선생께서 손수 정하였으며

이산서원의 원규는 우리나라 서원원규의 시초가 되었다. 

 

위패가 봉안되지 않아서 알묘는 할수가 없었고 건축중인 강당 앞에서 이원봉 별유사로 부터

이산서원의 유래를 설명듣고 건너편 두월리에 있는 정경부인 김해허씨 묘소를 찾아갔다.

 

정경 김해허씨 묘소는 지난해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행사때 찾아 보았던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두월리를 가는길에는 뽕나무 오디가 까맣게 익어가고 있었으며 묘소입구에는

'창계 문경동선생 묘소, 퇴계선생배위 정경부인 김해허씨 묘소'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고

묘소를 오르는 길은 오늘답사를 위하여 어제 제초작업을 하여서 큰 부담없이 오를수 있었다.

 

퇴계선생은 1521년 영주 초곡(草谷 현 조암동 사일마을)에 살던 진사 허찬(許瓚 1481~1535)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허씨부인은 혼인한 이듬해인 1523년 장남 준()을 낳고

5년뒤 둘째 채()를 낳다가 산독을 풀지 못해 향년 27세로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한다.

 

장인 허찬은 의령에서 살다가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을 하고 청풍군수를 지낸 영주사람

문경동(文敬仝 1457~1521)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로 이거하였다고 하고

 장인은 딸 둘인 집안의 맏사위가 되었고 퇴계선생도 딸 둘인 집의 맏사위가 되었다고 하며

정경부인 김해허씨의 묘소 아래는 외조부인 문경동공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묘소를 참배하고 난 뒤 이원봉 별유사와 권갑현 교수는 퇴계선생의 장인이 영주로 이거하게 된

경위과 김해허씨와 자식들에 대한 설명을 하였고 외조부의 묘소가 아래에 위치하게 된 사연을

설명하면서 외조부가 김해허시의 묘 자리는 명당이긴 하지만 본인이 갈수 없는 자리라 하시며 

귀한분이 오실 자리이라며 본인의 묘자리를 잡았다고 전하여 옛 사람들의 풍수사상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하였다.

 

또 묘소에서 바로 보이는 남쪽에 퇴계선생을 모신 이산서원이 위치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하며 영주시내 '청운불고기'에서 육회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꽃게 가격폭등으로 추가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오전에는 퇴계선생을 모신 이산서원과 정경부인 김해허씨 묘소를 방문하면서 퇴계선생의

사상과 덕행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으며 

오후에는 소고선생 시비와 가흥리 마애삼존불을 담사하고

장말손유물각과 인종장씨 종가와 무섬마을을 담사할 계획이다.

 

이 석물의 용도가 무엇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