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 《괴철의 요언(妖言)》

오토산 2020. 6. 9. 10:03



초한지(楚漢誌) (112)

괴철의 요언(妖言)

한신은 제나라를 점령하고 나자,

제왕의 궁전이 있는 임치(臨淄`)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제나라의 궁전은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궁전안에는 고루 거각(高樓巨閣)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는데,

어느 것이라도 금은 보화로 장식이 되어 있어서 바라만 보아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에서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한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궁전을 한바퀴 돌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수행하던 괴철이 그러한 눈치를 재빠르게 알아 채고 한신에게 아뢴다.

 

"제나라로 말하자면 오악(五岳)을 등에 지고 바다에 임해 있는 동해의 웅지(雄地)이옵니다.

원수께서는 육국을 평정하시어 무위(武威)를 떨치고 계시오니,

이제는 한왕에게 표(表)를 올려 제왕이 되셔서 이곳에 오래도록 머물러 계시도록 하시옵소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제왕이 되시기가 어려울지도 모르옵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괴철의 말대로 한왕에게 표를 올리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한왕으로부터 조서가 왔다.
조서를 읽어 보니 한왕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그동안 몇 차례의 싸움에서 초나라의 수십 고을을 평정하였소.

그러나 나의 양친께서 아직도 항우의 손에 붙잡혀 계셔서 일시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소이다.

게다가 항우는 머지않아 대군을 일으켜 성고성을 먼저 점령한 뒤에, 나와 더불어 자웅을 결하자고 요청할 모양이오.

그리하여 여러 중신들과 숙의를 거듭한 결과, 성고성을 원수가 지켜야만 무사하리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소.

그러하니 원수는 대군을 거느리고 급히 귀환하여 성고성을 지켜 주기 바라오.

우리가 항우를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서로가 합동 작전을 펴는 길밖에 없으니

원수는 지체 없이 성고성으로 돌아와 성을 굳게 지켜 주어야 하겠소."

한신은 한왕의 조서를 받아 보고 성고성으로 떠나가기 위해 삼군에게 출동 준비를 명했다.
그러자 괴철이 다시 품한다.

 

"원수께서 이곳을 떠나시기 전에 한왕에게 표문을 올려,

<장래에는 원수를 제왕으로 봉한다>는 언약을 미리 받아 놓도록 하시옵소서.

그런 언약도 없이 이곳을 떠나셨다가는 후일에 이곳에 다시 돌아오시기는 매우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한신은 그러잖아도 제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참인지라,

괴철의 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한왕전에 표문을 올리려면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

 

"주숙(周叔)이 말을 잘하니까 그를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한신은 그날로 표문을 써 주면서 주숙으로 하여금 영양성으로 한왕을 찾아 뵙게 하였다.
한신이 한왕에게 올린 표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나라 대원수 한신은 삼가 대왕 전하께 글월을 올리옵니다.
나라에 주인이 없으면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렵사옵고, 권력이 약해도 백성들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법이옵니다.

신은 대왕의 천위(天威)에 힘입어 초장 용저를 유수에서 참살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사옵고,

제왕 전광(田廣)까지 생포하여 천위를 떨치는데 다소나마 공이 있었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옵니다.

신이 이번에 평정한 제나라는 국정(國情)이 매우 불안하여, 백성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형편이옵니다.

따라서 이곳은 강력한 군권을 가지고 진압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매우 외람된 청원이오나,

대왕께서는 신을 임시로나마 제왕으로 봉해 주시면 고맙겠나이다.
만약 신을 제왕으로 봉하여 주신다면,

신은 제나라의 민심을 신속히 진정시키고 나서 대왕 전하의 통일 성업에 전력을 기울여 노력하겠사옵나이다.        
                                                                       대원수 한신 올림

한왕은 한신의 표문을 읽어 보고 크게 노했다.
"한신이라는 자가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지금 곤경에 빠져 있는데 급히 달려와 도와줄 생각은 아니 하고

제나라에 눌러앉아 왕이 되려는 궁리만 하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나에 대한 배반 행위임이 분명하다."

 

장량과 진평도 한신이 보내온 표문을 읽어 보고 크게 놀랐다.

아니 놀랄 뿐만 아니라 한신을 몹시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장량은 불쾌한 감정을 억눌러 가면서 한왕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품한다.

"대왕께서 이미 초나라 영토 수십 고을을 평정하셨사오나,

항우는 아직도 광무(廣武)에 진을 치고 있어서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긴박한 판국에 제왕이 되고 싶어하는 한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아니하시면,

금후의 사태가 매우 복잡하게 될 것이옵니다.

하오니 한신을 일단 제왕에 봉하시어 통일 성업에 전력을 기울이게 하시옵소서.

만약 그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한신은 홧김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옵니다."

한왕은 장량의 간언을 듣고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선생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선생의 말씀대로 한신을 제왕에 봉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리고 한왕은 주숙을 불러들여,
"여이기 대부가 제왕의 손에 팽살(烹殺) 되었다고 하는데,

여이기 대부가 어째서 그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는가 ?"하고 물었다.
주숙이 대답한다.

 

"여이기 대부는 한신 장군에게 제나라를 무력 점령 하지 말도록 두 번이나 편자를 보냈으나,

한신 장군이 기어코 군사를 끌고 왔기 때문에 제왕이 크게 노하여 여이기 대부를 팽살하게 된 것이옵니다."
하고 말하니 한왕은 한신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한탄한다.

 

"여이기 대부는 다시없는 충신이었으니 나는 그의 공로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한왕은 여이기 대부의 억울한 죽음을 탄식만 하고 있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기에 장량에게 <제왕의 인수>를 내주며 말한다.

 

"선생의 말씀대로 한신을 제왕에 봉하는 <제왕 인수>를 만들었으니,

이것을  선생께서 직접 한신에게 가지고 가셔서 그의 마음을 잘 도닥거려 주시옵소서."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신이 한신 장군을 직접 만나 잘 위무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량은 임치로 한신을 찾아가,

제왕의 인수를 직접 전하며 말한다.

 

"대왕께서는 장군의 표문을 받아 보시고,

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한 공로를 높이 사시면서 장군을 제왕에 봉해 주셨소이다.

그래서 신을 직접 보내 오셨으니, 장군은 즉시 왕위에 오르시고 나서

성고성으로 달려가 항우를 막아내고 초나라를 평정해 주시오.

그리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장군의 공로는 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오."
한신은 제왕의 인수를 받아들고 크게 기뻐하며,

한왕의 조서를 읽어 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신 장군은 지금까지도 공로가 많았지만,

이번에 제나라까지 평정했으므로, 그 공로를 치하하는 마음에서 제왕으로 봉하는 바이오.

그러하니 제나라를 속히 안정시키고 즉시 성고성으로 달려와

마지막 남은 초나라를 평정하는 데 힘을 모아 주시오.>

한신은 한왕이 있는 남쪽을 향하여 사은 숙배를 올린 뒤에 장량에게 융숭한 주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장량은 임치를 떠나면서 한신에게 말한다.

 

"대왕께서 지금 영양성에 계시오나, 인질로 잡혀계신 태공 내외분  때문에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시오.

더구나 근간에 항우가 대군을 몰아 성고성을 공략하리라는 정보를 들으시고 부터는 밤잠도 못 주무신다오.

그러하니 장군은 성고성으로 속히 가셔서, 항우를 섬멸시키고 태공 내외분을 기어이 구출해 주시기 바라오."
한신이 즉석에서 대답한다.

 

"나는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 군사들을 추가로 많이 징발해 가지고

열흘 후에는 성고성으로 기필코 떠나도록 하겠으니, 대왕전에 그 말씀을 꼭 전해 주소서."

한신은 장량을 보내고 나자,

그날로 대전(大殿)에 올라 제왕으로서의 즉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한신은 본시 생각이 깊은 장수였다.

그렇지만 괴철의 감언(甘言)에 현혹되어 제왕의 자리를 무리하게 요구하였다.

한왕은 항우와의 결전을 앞둔 관계로 부득이 한신을 제왕에 봉해 주었지만,

심사는 매우 불쾌하였다.

한편, 항우는 한신이 제나라의 70여 성을 모두 휩쓴 공로로 제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하여 항백과 종이매를 불러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한신이라는 자를 대단치 않게 여겨 왔었는데, 용저 장군을 이겨낸 것을 보면 보통 놈이 아니다.

유방은 지금 영양성과 성고성에 대군을 주군시켜 놓고 있는데,

한신은 한신대로 제나라에 버티고 있으니, 어느 쪽부터 치는 것이 좋겠는가 ?"
항백이 대답한다.

 

"지금 우리 형편으로 두 곳을 모두 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러하오니 지금이라도 한신에게 세객(說客)을 보내어

그를 우리 편으로 끌어오는 작전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기울이며 반신 반의 하며,
"한신이 그동안 나에게 해 온 것을 보면 마땅치 않지만,

방법이 그밖에 없다면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려. 그러면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
종이매가 대답한다.

 

"대부 무섭(武涉)은 변설이 능한 사람이오니 그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무섭에게 많은  비단과 공물(貢物)을 주어,

한신을 유인해 오도록 임치로 파견하였다.

무섭이 임치에 도착하여 한신에게 면회를 요청하니,

한신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한다.

 

"무섭은 소문난 변론가가 아닌가 ?

그가 나를 만나러 왔다니, 항우가 나를 유인해 가려고 그자를 보냈음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나를 만나러 왔다니 이리로 데려오너라. 무슨 일로 왔는지 한 번 만나보기나 하겠다."
무섭은 한신의 앞으로 나오자 큰절을 올리고 폐백을 내놓으며 말한다.

 

"장군께서 이번에 제왕에 오르셨다는 말씀을 듣고 삼가 축하의 선물을 올리옵니다."
한신은 선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한다.

"나도 지난날에는 대부와 마찬가지로 초나라의 신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주인을 달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적이 되어 버렸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이오 ?"
무섭이 머리를 수그리며 말한다.

 

"대왕께서는 이미 제나라의 70여 성을 통치하고 계신데 어찌 지난날의 일만을 말씀하시옵니까.

이 선물은 항왕 폐하께서 대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동시에,

금후에는 초나라와 제나라가 화친을 돈독히 하자는 뜻에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한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한다.

 

"나는 이미 왕위에 올랐으니 이 이상 무엇을 바라겠소.

나는 누구와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새삼스레 화친할 뜻도 없다고 생각하오."
무섭은 한신의 말을 듣고 머리를 저으며 말한다.

"만약 대왕께서 소생의 권고대로 하신다면 왕위를 영원히 누리 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고 유방과 협동하여 초나라를 때려부순다면,

그때에는 대왕의 지위가 어떻게 될지 그것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한신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무섭이 다시 대답한다.

 

"항왕 폐하께서 소생을 대왕께 파견한 목적은,

두 분이 화친을 도모하여 유방과 더불어 천하를 세 사람이 나눠 가지고,

제각기 부귀를 영원토록 누려 보자는데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자 한신이 말한다.

 

"대부의 말씀은 그럴듯 하오만,

내가 지난날 항왕을 섬기고 있을 때에 벼슬은 고작 집극랑에 지나지 않았고,

항왕은 나의 계략에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소.

내가 초나라를 떠나 한나라로 옮겨 온 것은 그런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한왕은 항왕과는 정반대로 나를 대뜸 원수로 승격시켜 병권(兵權)을 모두 장악하게 해 주셨고,

나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면서, 나의 말이라면 뭐든지 잘 들어 주셨소.

 

게다가 이제 와서는 나를 왕위에까지 오르게 해 주셨으니,

내 어찌 그러한 은혜를 배반하고 초나라로 갈 수 있겠소 ?

죽으나 사나 나는 이제부터는 한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형편이니,

대부는 돌아가시는대로 항왕에게 그런 사정을 잘 말씀 드려 주시오.

매우 죄송스럽지만, 이 폐백은 받을 수 없으니 그냥 가지고 돌아가 주시오."

무섭은 한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 팽성으로 헛되이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마침 옆에 있던 괴철이 한신에게 말한다.

 

"신은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관상학(觀相學)을 배운바 있사옵는데,

관상학에 의하면 대왕은 놀랍도록 귀하게 되실 어른이시옵니다."
한신은 어리둥절해 하며 묻는다.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별안간 관상 애기는 왜 하시오 ?"
괴철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다시 말한다.

 

"그 옛날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으나 20년이 채 못 가 초(楚)와 한(漢)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초와 한의 운명이 모두 대왕의 손에 달렸으니,

그것은 천하를 삼분(三分)하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대왕께서는 그 점을 깊이 통찰하셔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시도록 하시옵소서.

기회란 언제든지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괴철의 말의 요지는 유방을 위해 부질없이 천하를 통일하려고 애쓸 일이 아니라,

한신도 자주 독립하여 천하를 세 사람이 나눠 갖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괴철의 유혹하는 말에 한신은 귀가 번쩍 트이는 것만 같았다.

 

괴철의 말대로 한왕을 배반하고 항우와 타협하여 천하를 세 사람이 나눠 가지면,

자신도 황제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괴철에게 말했다.

 

"한왕은 처음부터  나를 극진하게 대해 주었는데, 내 어찌 이욕(利慾)에 눈이 어두워 의리를 배반할 수 있으리오.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소이다."
그러자 괴철이 다시 말한다.

"얼마전까지, 항왕의 휘하에 있다가 한나라에 귀순한 상산왕(常山王)이었던 

장이(張耳)는 진여(陳餘)와 형제 지의를 맺은 바가 있었으나,

진여는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장이의 가족을 몰살시킨 일이 있사옵니다.

하물며 대왕과 한왕은 그런 사이도 아니면서 무엇을 주저하시옵니까 ?

자고로 사냥꾼은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반드시 잡아 없엔다는,

토사구팽 (兎死狗烹) 이라는 말도 있지 아니합니까 ?

만약 대왕께서 한왕을 위해 천하를 통일해 놓았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그때에는 대왕의 신변이 지극히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을 왜 모르시옵나이까 ?"
한신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음 ..... 공의 말을 들어 보니 과연 그럴 것도 같구려.

그러나  이 문제는 너무도 중대한 일이니, 며칠 동안 말미를 두고 신중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한신은 며칠을 두고 궁리해 보았으나, 자기를 키워 준 한왕을 배반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리하여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는데, 괴철이 다시 찾아와서 들쑤신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옵니까 ?

기회라는 것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옵고,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라야 그 결단의 효과가 배가(倍加)되는 것이옵니다.

쓸데없는 의리에 현혹되어 유리한 계획을 제때에 단행하지 못하면,

오히려 100가지의 화를 초래할 뿐이옵니다.

성패(成敗)는 반드시 시기에 달려 있는 법이오니,

대왕께서는 천재 일우의 기회를 절대 놓쳐 버리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한신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왕을 위해 수많은 전공을 세워 왔었다.

한왕은 그때마다 나의 지위를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를 고깝게 여기는 기색을 한 번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관후(寬厚)하고 인자한 한왕을 어떻게 배반하고 등을 돌린단 말인가 ?)

한신이 마음을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에 잠겨 있는데,

문득 방문이 발칵 열리면서 대부 육가(陸賈)가 선뜻 방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
한신은 육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

대부가 별안간 웬일이시오 ?"

대부 육가가 불현듯 나타난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한신만이 아니었다.

한신에게 배반을 종용하던 괴철도 혼비 백산할 정도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육가는 한왕의 충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육가가 두 사람의 밀담을 엿듣기라도 했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

육가는 한신과 괴철 앞에 우뚝 멈춰 서더니, 먼저 괴철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신에게 얼굴을 돌리며 분노에 찬 어조로 말한다.

 

"소생은 조금 전에 대원수를 찾아 뵈러 왔다가, 문전에서 두 분이 주고받는 말씀을 죄다 엿듣게 되었습니다.

대원수께서는 괴철의 요언(妖言)에 현혹되시어, 인신(人臣)의 절개(節槪)를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그 말에 한신의 가슴이 철렁하였고, 괴철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육가는 그런 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계속한다.

 

"소생은 대원수께 꼭 여쭤야 할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릇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그 실세와 그 외형을 올바르게 관찰해야 하는 법이옵니다.

오늘날의 천하의 대세를 관찰하건데, 초나라는 강한 듯이 보이나 실세가 허약하기 짝이 없사옵고,

한나라는 약한 듯이 보이오나 실제는 놀랍도록 강한  편이옵니다.

게다가 대원수 자신은 아직 새로운 나라에서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형편입니다.

한왕이 지금 일시적으로 불리한 듯이 보이기는 하오나, 천하의 인심은 이미 한왕에게 기울어져 있사옵니다.

더구나 한왕에게는 소하라는 만고의 명재상이 계신데다가, 장량,진평 같은 명모사(名謀士)가 있사옵고,

영포, 팽월, 번쾌, 주발, 왕릉, 관영, 조참과 같은 만부 부당(萬夫不黨)한 명장들이 수두룩한 판인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당해 낼 것이옵니까 ?

괴철은 조금 전에 대원수께 미친 소리를 지껄인 듯 싶사오니,

대원수께서 만약 이 미친 사람의 광언에 속으셔서 한왕을 배반하신다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한신은 육가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대부는 참으로 나에게 좋은 충고를 해 주셨소이다.

대부의 충고가 없었던들 나는 광부(狂夫)의 요언(妖言)에 현혹되어

어떤 과오를 범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소."

한신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괴철은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 밖으로 번개같이 달아나 버렸다.

만약 모든 비밀이 한왕에게 알려지는 날이면 능지 처참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그제서야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분명히 깨닫고 육가에게 조용히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삼군을 거느리고 영양성으로 대왕을 찾아가

함께 초나라를 쳐부수기로 할 테니, 대부도 나와 함께 떠나십시다." 
                    ...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