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漢誌) (114)
광무산 대전
항우는 대군을 거느리고 광무로 이동해 오자, 팽성과의 수송로를 타개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수송로 확보를 결정짓기 전에 비마가 급히 달려와 아뢴다.
"유방과 한신이 우리를 치려고 대군을 발동하여 이곳으로 오는 중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며 항백과 종이매를 불러 상의한다.
"유방이 우리와 결판을 내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우리가 군량만 넉넉하다면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 군량이 없어 가지고서는 싸울 수 없는 일이 아니오 ?"
종이매가 머리를 조아리며 품한다.
"폐하께서는 지금 유방의 부모를 팽성에 잡아 두고 계시옵니다.
그들을 이리로 급히 불러다 놓고, <유방이 군사를 철수시키면 태공을 석방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유방에게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
"그런 조건을 유방이 들어 주지 않으면 어떡하오 ?"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부모에 관한 일이므로, 유방이 우리의 요구에 반드시 응해 줄 것이옵니다.
만약 끝까지 들어 주지 않을 경우에는 <두 늙은이를 우리 손으로 죽여서
유방은 만고의 불효 자식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할 것이다>고
말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대군을 철수하고야 말 것이옵니다."
항우는 종이매의 계교를 옳게 여겨, 유방의 부모를 팽성에서 데려다 놓고 말한다.
"그대의 아들 유방은 그대가 나에게 붙잡혀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덤벼오고 있다.
유방이 그대들의 신변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그대는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군사를 즉각 철수시키도록 알려라.
유방이 군사만 철수 시킨다면 그대와 여후(呂后)를 모두 성고성으로 돌려보내
그리운 가족들을 기쁘게 만나도록 해 주리다."
태공이 즉석에서 대답한다.
"내 아들이기는 하지만, 유방은 어려서부터 재물과 여색만을 좋아하고, 아비 어미를 돌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애는 아비와 어미를 잊어버린 자식이므로 내가 편지를 보내 보았자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이옵니다."
"효력이 있고 없고 간에 일단 편지를 쓰시오.
아무 효과가 없으면 나로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태공은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가지고 항우의 검사를 받았다.
항우는 태공이 쓴 편지를 두 번 세 번 읽어 보고,
"이만 하면 됐다.
유방이란 놈이 이 편지를 읽어 보고 나서도 철군을 아니 한다면,
그것은 금수(禽獸)이지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하고 매우 만족스러워 하면서,
대부 송자련(宋子連)을 시켜서 유방에게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다음날 송자련은 성고성으로 찾아와
<태공의 편지를 전해드리기 위해 한왕을 만나 뵙겠다>며 면회를 신청하였다.
"뭐야 ?
태공께서 나에게 서한을 보내 오셨다구 ?"
한왕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즉시 장량과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태공께서 나에게 서한을 보내 오셨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
장량이 심사 숙고하다가 대답한다.
"태공께서 서한을 보내 오셨다면, 그것은 항우가 우리 군사를 철수하게 하려는 술책임이 분명하옵니다.
대왕께서는 그 서한을 읽어 보시고 슬퍼하시거나 눈물을 보이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만 응답하시면, 태공께서는 늦어도 열흘 안으로 돌아오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설사 돌아오지 못하시고 항우의 손에 억류되어 계시더라도 생명에는 결코 위험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장량은 한왕에게 자세한 대책을 품고하였다.
한왕은 그제서야 송자련을 불러 들여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건네 주는 태공의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늙은 아비는 유방에게 편지를 보내노라.
일찍이 순(舜) 임금께서는 효도를 하기 위해 천하를 헌신짝처럼 내버리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너는 왕이 되어서도 부귀와 영화만 탐낼 뿐, 어미 아비가 포로가 된 지 3년이 넘도록 일체 소식이 없으니,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우리 두 늙은이는 다행히 초패왕 폐하의 각별하신 배려로 편히 지내 오고 있기는 하다마는,
여후(呂后)만은 주야로 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어서,
옆에서 보기에도 간장이 녹아 내리는 것만 같구나.
나는 지금 항왕 폐하를 모시고 광무성에 와 있다.
그리고 네가 지금이라도 군사를 철수시키면 폐하께서는 나를 너에게 돌려보내 주시겠다는 특별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나 네가 불응하고 끝까지 싸우려고 덤빈다면
폐하께서는 나를 죽여 머리를 성루(城樓)에 높이 매달아 놓고 너의 불효를 만고에 알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순(舜) 임금님의 거룩하신 고사(故事)를 본받아,
군사를 즉각 철수시킴으로써 우리 부자가 기꺼이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
여후(呂后)도 그렇게 해 주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으니 꼭 그렇게 해 주기를 거듭 당부한다.
부귀와 영화가 아무리 좋기로 그로 인해 네가 불효자의 오명을 천추에 남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
효성이 극진한 한왕으로서는 태공의 편지를 읽어 보고,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송자련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므로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한왕은 장량이 미리 일러준 대로 짐짓,
태공의 편지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며 송자련에게 말했다.
"이따위 편지를 가지고 와서 나더러 어떡하란 것이냐 ! "
송자련은 한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서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그러자 한왕은 송자련을 꾸짖듯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대는 내 말을 똑똑히 듣거라.
항왕과 나는 일찍이 의제 앞에서 형제의 의를 맺은 사이이다.
따라서 나의 아버지는 항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가 초나라에 있거나 내 곁에 계시거나, 아들의 곁에 있기는 뭐가 다르겠느냐 ?
항왕이 만약 나의 아버지를 죽여 버린다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욕하기보다는 먼저,
항왕을 향하여 <아버지를 죽인 놈>이라고 욕하게 될 것이다.
항왕은 일찍이 영포를 시켜 의제를 시해한 일이 있기 때문에 제후들은 아직도 항왕에게 이를 갈고 있는 판인데,
이제 나의 아버지까지 죽인다면 인심이 어떻게 될 것이냐 ?
맹자께서는 일찍이 <남의 아비를 죽이면 세상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비를 죽인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느니라.
그대는 돌아가서 태공에게 꼭 이렇게 말씀드려라 <태공께서는 어디에 계시거나
아들의 곁에 계시기는 마찬가지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편하게 계시라>고 말이다.
내 말 알아듣겠느냐 ?"
한왕은 그 말만을 남기고 시종들의 배행을 받으며,
횡하니 방을 나가버린다.
송자련은 어처구니가 없어 장량과 진평을 돌아보며,
"대왕은 부모님에게 효성이 너무도 부족하신 것 같은데,
두 분께서 다시 한번 간곡히 품고해 보시죠."하고 말했다.
그러자 장량이 퉁치듯 이렇게 말해 버린다.
"그러잖아도 나 역시 군사를 철수시키고 태공을 모셔 오자고 여러 차례 품고해 보았다오.
그러나 대왕께서는 끝끝내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송자련은 어쩔 수 없이 헛되이 돌아와,
항우에게 태공의 서한을 받아 본 한왕의 태도에 대해 자초지종을 낱낱이 보고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종이매가 항우에게 이렇게 품한다.
"폐하 !
지금 송자련의 보고를 듣고 보니, 유방은 결코 큰일을 해낼 인물이 못 되옵니다.
부귀와 주색만 알고 부모도 모르는 위인이 전쟁인들 어찌 잘 치러 낼 수 있으오리까.
그러니 우리가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하늘이 도와,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항우도 고개를 끄덕인다.
"허기는 그래 !
유방이라는 자는 옛날부터 부모는 아무렇게나 여기면서도 계집이라면 사족을 못 써 왔었지.
그러면 장군의 의견대로 정면으로 싸우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항우는 군량 사정이 몹시 나쁨에도 불구하고
한군과 정면으로 싸울 것을 결정하고 전 군사에게 비상 동원령을내렸다.
한편, 한왕 역시 전쟁을 각오하고 송자련을 쫒아 보낸 뒤에 한신을 불러 대책을 강구한다.
"이제야말로 초를 정벌할 절호의 기회가 왔소이다.
작전 계획을 어떻게 세우는 것이 좋겠소이까 ?"
한왕의 질문에 한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항우는 지금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광무에 진을 치고 있기는 하오나,
군량 사정이 몹시 궁핍하여 오랜 기간 싸울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게다가 우리 편의 사기는 매우 왕성하므로,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초군을 섬멸시킬 자신이 있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다면 오늘이라도 전쟁을 일으키도록 합시다.
나는 원수만 믿을 테니, 모든 작전은 원수의 뜻대로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이 필승을 기할 터이니, 대왕께서는 후진(後陳)으로 따라와 주시기만 하시옵소서."
한신은 그날로 군사를 출동시켜,
광무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모든 장수들을 불러 긴급 작전령을 내린다.
"적은 우리가 먼 길을 오느라고 몹시 지쳐 있는 줄로 알고 오늘밤에 반드시 야습(夜襲)을 감행해 올 것이다.
모든 부대는 그런 줄 알고 전투 태세를 철통같이 갖추고 있으라."
이리하여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물샐틈 없이 갖추고 있었다.
한왕은 본진 뒤에 후진으로 따라와 별도로 진을 쳐놓고
소하,장량, 진평 등과 함께 한자리에 모여 앉아 작전 계획을 의논하다가,
"한 원수의 계략을 들어 보게 원수를 이 자리에 모셔오도록 하오."하고 명했다.
그러나 연락 장수는 한참 후에 돌아와,
"한 원수께서 어디를 가셨는지 지금 진중에 계시지 아니합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
"뭐야 ?
원수가 진중에 없다면 어딜 갔다는 말이냐 ?"
"막료 장수에게 물어 보온즉,
한 원수는 해가 저물 무렵에 수십 기의 기마병을 데리고 동남쪽으로 나가셨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대답이었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대경 실색하며 장량에게 묻는다.
"자방 선생 !
한 원수가 대전(大戰)을 앞두고 행방 불명이 되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
설마 항우와 내통하여 우리를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
"한 원수가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아무튼 중요한 때에 최고 사령관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직무 태만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한왕이 보기에는 장량의 대답은 모호하게 들리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좌불 안석이 된 한왕은 다시 한번 사람을 보내 보았으나, 심부름을 갔던 사자는 즉시 돌아와 아뢴다.
"모든 부대가 전투를 앞두고 긴장감이 고조되어 경비가 삼엄하기 이를 데가 없으나,
한 원수만은 어디로 가셨는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왕은 무슨 변고가 발생할지 몰라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방금 다녀온 사자에게 다시 명한다.
"그대는 다시 달려가 기다리고 있다가, 한 원수가 돌아오거든 나에게 즉각 알려라."
한왕은 사람을 보내 놓고 한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있기를 학수 고대 하였다.
그러나 밤이 깊도록 감감 무소식이더니 삼경이 지나서야 연락이 왔는데,
"한 원수가 조금 전에야 돌아오셨습니다."하고 알리는 것이 아닌가 ?
"어디를 다녀 온다고 하던가 ?"
"감히 그것까지는 여쭤 보지 못했사옵니다."
한왕은 생각할수록 한신의 거동이 수상스러워 승상 소하를 불러 말한다.
"한신 장군이 오랜시간 어디를 다녀 왔는지 몹시 궁금하오.
승상이 직접 한 장군을 만나 보고 오셨으면 좋겠소."
소하는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호위병을 데리고 한신을 찾아갔다.
한신은 그때까지도 자지않고 있다가 소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승상께서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오셨사옵니까 ?"
소하가 대답한다.
"대전을 앞두고 장군이 한동안 행방 불명이 되었다가 이제야 돌아오셨다고 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일부러 찾아왔소이다."
한신은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불쾌감이 일었다.
(한왕이 나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승상을 일부러 보낸 것이 분명하구나 ! )
그러나 한신은 자신의 기분을 표정에 나타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일이면 항우와 결전을 벌여야 할 판인데, 아시다시피 항우는 천하 제일의 맹장이기에,
사전에 적정을 상세하게 알아보려고 초저녁에 염탐을 나갔다가 이제야 돌아오게 된 것이옵니다."
"그래 좋은 결과를 얻으셨소 ?"
"적정을 살펴 보고 좋은 계략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것이 확실합니다."
"어떤 계략을 세우셨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그러자 한신이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작전 계획이란 극비에 속하는 일이므로 사전에 말씀드릴 수는 없사옵니다.
승상께서는 그 점을 양해하시고, 내일 결전 현장에 주공을 모시고 오셔서
제가 항우를 격파하는 광경을 직접 보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후진으로 돌아와 한왕에게 자세히 보고하니,
한왕은 그제서야 안심하는 것이었다.
한신은 적의 야습에 대비하느라고 그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그러나 다행히 적의 야습은 없었다.
날이 밝자 한신은 대장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작전 편성을 새로했다.
제 1 전대 번쾌와 관영
제 2 전대 주발과 주창
제 3 전대 근흠과 노관
제 4 전대 여마통과 양희
제 5 전대 장이와 장창
제 6 전대 번창과 누번
제 7 전데 하후영과 왕릉
제 8 전대 조참과 시무
제 9 전대 구강왕 영포
한신은 모든 장수를 총동원하여 전투 편대를 새로 짜놓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투에는 대왕께서 친히 가담하시도록 부탁드려 놓았다.
대왕께서는 정병 5천을 거느리고 광무산 기슭에서 대기하고 계시다가,
총공격의 포 소리가 울리면 우리들과 행동을 같이해 주실 것이니,
여러 대장들은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라."
편대 구성만 보아도 이날의 전투가 건곤 일척(乾坤一擲)의
일대 결전이 되고도 남을 것임은 짐작하기에 충분하였다.
한편, 항우도 이날은 결판을 낼 생각에서 계포와 함께 선두로 달려 나와 큰소리로 외친다.
"내가 한왕에게 할 말이 있으니 한왕은 이리 나오라."
그러나 한왕 대신에 한신이 달려 나가 말한다.
"무슨 말인지,
용무가 있거든 내게 말하시오."
항우는 한신을 보자 꾸짖듯이 외친다.
"그대는 본시 나의 부하가 아니었더냐.
나는 무섭을 보내 그대를 나에게 돌아오라고 종용했거늘,
그대는 끝내 내게 돌아오지 않고 오늘 나와 직접 승부를 할 작정이더냐 ?"
한신이 대답한다.
"폐하는 당대의 제왕이시오. 제왕이란 본시 외침(外侵)이 일어나게 되면 대장들로 하여금 막아내게 하는 법이거늘,
폐하는 어찌하여 직접 일선으로 달려 나와 싸우려고 하시오?
그러고 보면 당신은 제왕이라기 보다는 장군감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오 ?"
항우는 한신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고 크게 분노하며 외친다.
"이놈아 !
네 놈은 주둥아리만 열렸느냐.
네 놈이 나하고 싸워서 10합까지만 버틸 수가 있다면,
나는 나의 모든 영토를 한왕에게 내 주겠다."
한신이 다시 대꾸한다.
"자고로 참다운 용장은 큰소리를 치지 않는 법이오.
폐하가 만일 나에게 진다면, 영웅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게 아니오 ?
그러니 차라리 다른 장수를 내보내고 폐하는 진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어떠하겠소 ?"
폐하라는 정중한 지칭 뒤에 비야냥 거리는 한신의 소리를 듣던 항우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장극을 번개치듯 휘두르며 한신에게 맹호처럼 덤벼들었다.
한신은 2,3합쯤 싸우다가 대번에 못견디는 척하고 광무산(廣武山) 방향으로 쫒기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맹렬히 추격해 가며,
"내가 오늘은 저놈을 반드시 생포하여 원한을 풀겠으니,
삼군은 총동원하여 나의 뒤를 따르라 ! "하고 명했다.
그 명령에 따라 항백, 항장, 주란, 주은, 우자기, 종이매, 환초, 정공, 옹치,등
모든 대장들이 군사를 이끌고 항우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한신은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아니하고, 자꾸만 광무산 산속으로 쫒겨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한신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종이매가 급히 따라오며 항우에게 간한다.
"폐하 !
산속에는 나무와 숲이 우거져, 복병이 있을지 모르니 추격을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항우는 워낙 격분한지라 종이매의 간언이 귀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한신이란 놈을 내버려두고 여기서 멈추다니,
그대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
그러던 항우는 한신을 추격하다가 깊은 숲속에서 그만 한신의 뒤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좌고 우면(左顧右眄)하면서 한신의 행방을 찾고 있노라니까 문득 배후에서,
"대왕 전하 !
우리의 후속 부대가 적장 번쾌와 관영에게 여지없이 격파되었습니다."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
"뭐야 ?
후속 부대가 적에게 당했다구 ?"
항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전방에서 일발 포소리가 나더니 사면 팔방의 숲속에서 한나라 군사들이
진고를 두드리고 함성을 요란스럽게 울리며 구름떼 같이 몰려오며 항우를 향해 집중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용맹한 항우도 이때만은 크게 당황하였다.
종이매가 급히 달려와 말한다.
"앞 길은 산으로 가로막혔고,
사방에서는 적군이 벌떼처럼 아우성을 치고 덤벼오고 있으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이옵니까 ?"
항우가 비장한 각오로 말한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는 끝까지 한신을 추격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가자 ! 앞으로 가자 ! "
항우가 험준한 산길을 얼마쯤 달려 올라가노라니까 또다시 숲속에서 포 소리가 나더니,
북쪽에서는 번쾌,관영,주발,조참의 부대가 함성을 울리며 들고일어나고,
서쪽에서는 근흠,노관,여마통,양희의 부대가 들고일어나고,
좌측에서는 장이, 장창의 부대가 들고일어나고, 우측에서는 하후영,왕릉 부대가 들고일어나고,
저 멀리 후방에서는 한왕 자신이 군사들을 몰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항우는 크게 화를 내며 종이매,항백과 함께 저돌적으로 반격을 가하며,
"내 지난날 진나라의 대군도 격파한 일이 있거늘, 어찌 한나라 군사 따위에게 쫒길 것이냐 !"하고
몰려오는 적병을 닥치는 대로 후려갈기며 앞으로 달려 나오려니까,
문득 구강왕 영포가 앞을 가로막는다.
항우는 영포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이 역적놈아 !
네 놈이 무슨 낯짝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느냐 ! "
그러자 영포는 장검을 꼬나잡으며 외친다.
"당신은 나를시켜 의제를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모두 나에게 뒤집어 씌우지 않았더냐 !
나는 오늘 그 원한을 풀려고 왔노라! "
항우와 영포가 단독으로 맞붙어 싸우기를 50여 합. 그래도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번장과 누번이 한 무리의 군사를 몰고 싸우고 있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항우를 도우려고 급히 달려오던 환초와 계포가 그것을 보자 항우에게 외친다.
"폐하께서는 뒤로 물러가 계시옵소서.
저놈들은 저희가 해치우겠습니다."
항우는 싸움을 물려 주고 언덕위로 말을 달려 올라갔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니,
초나라 장수 계포와 환초가 한나라 장수 번장과 누번간에 네 명의 장수가 두 패로 나뉘어
창검에 불꽃을 튀기며 백병전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 용맹함이 난형 난제하여 좀체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영포,조참,시무 세 장수가 많은 군사들을 몰고 달려들어
계포와 환초를 사방에서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
초장 종이매는 언덕위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항우에게 달려와 급히 말한다.
"폐하 전세가 불리하여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광무산으로 올라가는 소로(小路)가 저기 있사오니,
우선 산성으로 속히 피신하시옵소서."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산상으로 말을 몰았다.
그런데 정작 산상으로 올라오며 보니,
한신은 저 멀리 산꼭대기에 있는 정자(亭子)에서 홀로 앉아
한가롭게 술잔을 부어 놓고 거문고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
항우는 그 광경을 보자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즉석에서 종이매에게 명한다.
"한신이란 놈이 나를 모욕하려고 일부러 저 따위 짓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도다.
그러니 모두들 뛰어 올라 저놈을 붙잡으라 ! "
명령이 떨어지자,
항우를 따르던 군사들이 한신을 잡으려고 산상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한신의 주위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일시에 들고일어나 바위와 통나무들을 연방 굴려 내리는 바람에,
산상을 기어 오르던 초군 병사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항우는 이런 광경을 지켜 보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
"저놈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나 혼자서라도 달려 올라가 저놈을 물고를 내고야 말겠다."하고
몸소 산상으로 달려 오르려고 하였다.
종이매가 급히 달려와 말고삐를 움켜 잡으며 간한다.
"폐하 !
한신이 저렇듯 방자하게 구는 것은, 폐하를 노엽게 만들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일단 후퇴했다가 후일을 기약하셔야 합니다."
"저놈을 그냥 내버려두고 가다니,
무슨 소리를 하느냐 ! "
"폐하께서 산상으로 올라가시기만 하면
적은 철포와 화전(火箭)을 빗발치듯 퍼붓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가 종이매의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리려니까,
적은 항우가 도망가는 눈치를 채고 일시에 화전을 빗발치듯 퍼부어서,
산 전체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항우는 불을 피하여 급히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를 달려 내려오노라니까,
이번에는 적장 누번이 한무리의 군사들과 함께 앞길을 가로막으며 외친다.
"역적 항우는 어디로 가느냐 !
목숨이 아깝거든 이 자리에서 항복하라."
항우는 악이 받칠 대로 받쳤다.
그리하여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누번에게 달려들었다.
"이놈아 !
너는 역발산 기개세의 항우를 못 알아 본다는 말이냐 ?"
항우와 누번은 정면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번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누번이 항우와 7,8합을 겨루다가 항우의 철퇴를 맞아 말에서 떨어져 버리려는 바로 그 순간,
이번에는 멀리서 부터 시무와 왕릉이 비호같이 달려오며,
"항적(項賊: 항우의 본명)은 죽지 않으려면 항복하라 !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
한신은 군사들을 어떻게나 용의 주도하게 분산해 배치해 놓았는지,
항우가 가는 곳마다 한나라 군사들이 몰려 들었던 것이었다.
항우는 눈물을 머금고 또다시 쫒기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를 쫒기다 보니 날이 저물어 달빛이 훤히 밝은데, 산골짜기의 강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강물은 깊고 세차게 흘러서 그냥 건널 수는 없었다.
(아아 !
앞은 강이 가로막고, 뒤에서는 적이 추격해 오고...
나는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 )
항우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그러자 그때,
이번에는 엉뚱한 방향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자신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
"네놈들은 누구냐 ?"
항우는 자신도 모르게 전투 태세를 갖추며 외쳤다.
그러자 두 명의 장수가 가까이 다가오며,
"폐하 ! 저희들은 주은과 환초이옵니다.
폐하께서 쫒기신다는 소리를 듣고 폐하를 도우려고 급히 달려왔사옵니다."
"오오, 그대들이 이곳에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구나.
고맙다, 고마워 ! "
항우가 부하 장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항우는 주은과 환초가 거느리고 온 5천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또다시 도망을 치는데,
날이 밝아서 보니 광무산에는 가는 곳마다 한군의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항우는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을 머금고 주은에게 말한다.
"나는 오늘날까지 여러 천 명의 장수들과 3백여 회의 대전을 치러 왔지만,
한신처럼 용병술이 능한 장수는 처음 보았다."
그 말에 주은이 대답한다.
"한신은 폐하와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리할 자신이 없으니까,
계획적으로 우리를 산속으로 유인하여 복병 작전을 썼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여기서 지체하시다가는 또다시 당하시게 될지 모르오니,
이곳을 빨리 벗어나시어 권토 중래(捲土重來)의 재기를 노리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산을 돌아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산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홀연 깊은 숲속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또다시 함성을 울리며 들고일어나며,
"항적은 어디로 도망을 가느냐 !
네 목위에 얹은 하나도 쓸데 없는 대가리를 우리에게 빨리 바쳐라 ! "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
항우는 하도 여러 차례 당하는 일이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공격 태세를 갖추며,
"네놈들은 어떤 놈들이냐 ?"하고 고함을 질렀다.
두 명의 장수들이 저만치서 말을 우뚝 멈춰 서더니,
"우리들은 한나라의 대장 주발과 주창이다.
우리들은 한왕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네 놈의 머리를 가지러 왔노라 !
그러니 너는 아무 소리 말고 목아지를 길게 내밀어라 !"하고
징그러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항우는 이제껏 듣지 못했던 너무나도 모욕적인 말에 울화가 불끈 치밀어 올라서,
"이놈들아 !
네놈들의 목은 내가 잘라 주겠다 ! "하고
외치며 폭풍같이 덤벼 들었다.
그러자 주발과 주창은 2,3합쯤 싸우다가 날쌔게 쫒겨 달아난다.
워낙 지독한 욕설을 들은 항우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이들을 맹렬히 추격해 가는데
돌연 또다시 철포 일발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사방에서 복병들이 들고일어나
항우를 에워싸고 총공격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근흠과 노관이 거느린 복병이었다.
여기서 양군은 일대 혼전을 벌였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들은 사전에 매복하고 지형을 익혀두는 등,
사전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으로 초군은 지리 멸렬 참패를 면치 못했다.
항우는 적장 근흠과 노관에게 각각 깊은 상처를 안겨 주기는 하였으나
결국은 도망치는 그들을 붙잡지는 못하였다.
결국 항우는 이들을 계속하여 쫒지 못하고 다시 말머리를 돌려, 도망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려가면 달려가는 대로 어디선가 계속 화살이 날아와 항우는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다.
이러면서 20여 리를 쫒겨 가니,
항우를 따라오던 주은과 환초도 무수한 상처를 입고 항우앞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항우는 발을 구르며 탄식한다.
"내 한평생을 전야에서 살아왔지만,
이렇게 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침 그때, 계포와 종이매가 한무리의 군사를 거느리고 쫒겨 왔는데,
그들 역시 5천여 명이던 군사가 1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
항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은 일단 본진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내 조만간에 한신이란 놈에게 오늘의 설욕을 갚고야 말겠다."
한편, 한신은 완승(完勝)을 거두고 나자,
즉시 한왕에게 달려가 승전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한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원수의 신출 귀몰한 작전이 아니었던들 어찌 이와 같은 승전을 거둘 수가 있었으리오.
이제 앞으로 항우는 <한나라 군사>라는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감히 싸우지를 못할 것이오."
한신이 다시 아뢴다.
"모든 것이 대왕 전하의 천위(天威)의 덕택인줄 아뢰옵니다.
그러나 항우를 이번 싸움에서 완전히 패망시키지 못한 것은 천추의 유한이오니,
이 기회에 항우를 계속 공격하여 초나라를 완전히 평정하도록 허락을 내려 주시옵소서."
한왕이 즉석에서 대답한다.
"나는 원수만 믿겠소.
원수는 모든 계획을뜻대로 수행하여 주시오.
나는 빨리 천하를 통일하여 모든 창생들을 도탄 속에서 하루 속히 구해 주고 싶은 생각뿐이오."
그리하여 한신은 토초 작전(討楚作戰)을 또다시 세밀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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