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열전

한고조 열전 (漢高祖 列傳) 《장량의 은퇴와 진짜 미인계 》

오토산 2020. 6. 25. 09:49


한고조 열전 (漢高祖 列傳) (130)

장량의 은퇴와 진짜 미인계

어느 날, 장량은 한왕 희신이 오랑캐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희신을 한왕에 봉해 주도록 한제에게 천거한 사람이 장량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희신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나를 보아서도 그럴 수가 있을까 ...! )

 

장량은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도 극심하여,

며칠 동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냥 있을 수 만은 없어서 가까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입궐하여 석고 대죄(席藁待罪)하고 유방에게 아뢰었다.

 

"폐하 !

희신이 오랑캐 두목인 묵특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하오니, 신은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희신을 한왕으로 천거한 사람은 바로 신이었사오니, 신에게 엄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유방이 웃으며 말한다.

 

"선생이 희신을 믿고 천거했던 것이니, 선생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나쁘다면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희신이 나쁠 뿐이니, 선생은 너무 쾌념치 마시옵소서."
그러나 장량은 머리를 조아리며 숙연한 자세로 다시 아뢴다.

 

"폐하께서는 오직 신을 믿으시고 희신을 한왕으로 봉해 주셨던 것이오니,

신에게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사옵니까.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시기 위해서라도, 신에게 반드시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더욱 크게 웃으며 말한다.

 

"선생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처럼 준엄하시니, 진실로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천하를 통일한 것이 누구의 덕택인데 감히 선생에게 벌을 내릴 수 있으오리까.

희신의 반란 문제는 내가 적당히 처리할 것이니, 선생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장량은 너무도 우악(優渥)한  유방의 말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러나 신이 중죄를 범한 것만은 분명하오니

, 차후로는 모든 공직(公職)을 사퇴할 것을 용납해 주시옵소서."하고 말했다.
장량으로서는 당연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장량의 그러한 심정을 재빨리 알아채고 걱정스럽게 만류한다.

 

"오늘날까지 선생은 오로지 나를 위해 중책을 맡아 주셨던 것이지,

영화가 탐이 나서 공직을 맡아 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공직을 사퇴하시는 것이 마음에 편하시다면, 선생께서 편하신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중대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변함없이 도와주시옵소서.

이것만은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리하여 장량은 그날부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자연을 상대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며 생각해 보니,

인생이란 것이 도무지 허무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부귀와 공명이 무엇이기에, 세상 사람들은 부귀와 공명을 위해 그렇게도 악착스럽게 싸우는 것일까 ?)
장량은 혼자서 산속을 거닐며 지나간 몇 해 동안의 일들을 곰곰히 회고해 보았다.

돌이켜 보면 지나간 몇 해 동안은 그야말로 파란 만장했던 세월이었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독점하려고 혈전(血戰)의 혈전을 수백 번이나 반복해 온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고,

육국의 왕자들도 저마다 각축(角逐)을 벌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그들이 그처럼 악착같이 싸워서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유방과 항우만이 최후까지 남아 싸우다가, 결국은 항우도 죽고 유방만이 남았다.

천하를 통일했다는 점에서는 유방은 최후의 승리자인지 모른다.
그러나 천하를 얻은 유방조차도 몇 해가 지나면 항우와 마찬가지로 죽게 될 것이 아닌가 ?

 

(아아, 와각지쟁(蝸角之爭 :달팽에 뿔위에서 다투는 것과 같은 허망한 다툼)이라는 말이 있더니,

다툼이 지나고 되돌아 보니 만사가 너무나도 허무하구나 ! )

장량은 문득 그 옛날에 <적송자(赤松子)>라는 선인(仙人)이 있었다는 것을 연상해냈다.
적송자는 부귀와 영화를 뜬구름처럼 여기면서,

깊은 산속에서 오로지 도(道)를 닦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왔었다.
그러기에 장량 자신도 이제부터나마 적송자를 본받아 여생을 수도(修道)로 보낼 결심이었다.

*글 중간에 붙여...
내가 살고 있는 집, 골목길 맞은 편에는 나의 집과 외형은 조금 다르지만

집의 구조는 거의 같은 3층 다세대 주택이 있다.

이 집은 나의 집을 지어서 판 건축주가 내 집보다 일년 뒤에 지었으니,

그 집은 보나마나 내가 사는 집의 구조와 <붕어빵>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이곳에는 내가 30년 전 처음 이 골목으로 이사 온 직후, 

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군부대에서 수송부 선임하사로 정년을 하고,

개인 택시를 한 대 받아 가지고 나온, 80객 노인 부부가 살고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30년 전쯤 군에서 정년을 하고 나오게 되면,

특히 수송부 선임하사로 나올 때 쯤에는 정부로부터 한 몫 톡톡히 챙겨 가지고 제대했다.
이렇게 정부로부터 받은 개인 택시로 <뎀벙뎀벙> 놀며놀며, 일하는 영감님의 모습을 지켜 보던 나는,

일말의 부러움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정부에서 군인 연금도 받겠다,

개인 택시도 몰고 다니면서 돈도 벌겠다,

허 참, 사람 팔자가 왜 이렇게 차이가 심한 것인가 ?)

당시 30대 초반의 나는,

생활의 안정을 가져가기 위해서, 바지 가랑이 사이에서 종소리가 나도록  바쁘게 지낼 때 였다.

그때는 나의 초년운(運)도 좋지않아 여기저기로  일을 잔뜩 벌여 놓기만 했을 뿐이지

  제대로 된 것이 없던 시기였다.
그후, 나는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부귀를 위해 쫒다 보니,

중년에 접어들 무렵,

조그만 사업으로 규모에 비해 상상도 못할  돈도 한때  벌었지만,

자신감을 너무 앞세우다 보니, 지금 지나와 생각하면 남은 것은 인생의 경험 뿐이다.

이렇게 지내다가 중년 막바지에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현재는 완전히 정착되어직업과 생활의 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앞집 영감님 내외분을 보게 되면 저럴 수가 있는가 ?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영감님은 얼마전에 알량하게 일하던 개인 택시를 팔아 치운 모양이다.
그러더니 다시 얼마 전부터는 자기집 차고에 폐지와 고물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가 신문등 종이 나부랭이를 담은 것을 가져다 주면서 물었다.

 

"웬일로 폐지를 모으세요 ?"

( 먹고 살 만 하시잖아요 ?)

 

"아,

놀기 심심해서요."

그러려니했다.
그런데, 얼마 전 부터는 영감님께서 새벽같이 행거를 끌고,

온 동네를 돌아 다니며 고물과 종이 나부랭이를 주워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마나님까지 구질구질한 고물과 폐지를 주워 모으는데 동참시키는 것이 보였다.
    ...

나도 영감님 만큼은 안 되겠지만 국민연금을 조금씩 받고 있고,

일이 없는 노후에 쓸 생활비를 만들기 위해 60세가 되는 달부터,

생존 자금 명목으로 한 달에 얼마씩을 꼬박 저축 하고 있다.

아프고 병들 때를 대비한 노후용으로 보험도 이미 몇개 들어있고,

곧 만기가 되는 사적 노후 연금보험도 있다.
앞으로 내가 일을 못하게 되면 , 아내도 지금처럼 생활비를 <펑펑>쓰면서 살 수는 없겠지만,

우리 부부는 노년에 아이에게 손 벌리지 않고 구차하게 지내지 않을 준비를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앞집 영감님 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
할 일을 그 따위로 소일하지 말아야지...
근데 뭘 해야 할까 ?
장량 처럼 산 속에 들어가 살아야 할까 ? 

 

(나는 자연인이다...? )
그런데 나는 이웃과 떨어져 산 속에서 외톨이로 격리되어 살기는 싫다.
이 글을 보시는 독자께서는 ,좋은 의견을 주시기 바란다.
소주병이 직업 일선에서 물러나면 어떻게 소일하며 지내는 것이 좋을지 ?
            ...


그러던 어느 날 장량은 유방의 부름을 받고 오랜만에 조정으로 나갔다.
유방이 장량에게 말한다.

 

"천하를 통일하는 데 있어서 선생의 공로는 누구보다도 지대하셨기에,

선생에게 왕작(王爵)을 드리려고 합니다.

선생은 어느 나라의 왕작을 원하시는지 솔직히 말씀해 주시옵소서."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모든 것이 천우(天佑: 하늘의 도우심)의 덕택이었지, 결코 신의 공로는 아니었사옵니다. 

더구나 신은 이즈음에 와서, 인생 만사가 물거품 같이 여겨져서

오직 옛날의 적송자와 같이 여생을 유유 자적(悠悠自適)하며 보내고 싶은 생각뿐이옵니다.

더구나 나이를 먹음에 따라 몸이 점점 쇠약해져서 봉작(封爵)에는 전혀 생각이 없사오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유방이 왕작을 아무리 권해도 장량은 끝끝내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장량이 왕작을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 사정을 아는 맏아들 <장벽강>이  아버지를 나무란다.

 

"아버님은 지금까지 왕사(王師)로써 누구보다도 커다란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왕작을 받으셔서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시다가,

그 자리를 저희들에게 물려 주심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좋은 자리를 마다하시고,

빈손으로 돌아오셔서 이런 산중에서 외롭게 지내시려는 것이옵니까 ?

저희 후손들로서는 아버님의 처사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사옵니다."

아들로서는 당연한 불평인지 모른다. 
장량은 아무런 말도 아니 하고 잠시 아들의 얼굴을 바라 보기만 하였다.

이렇게 한참을 아들의 얼굴만 바라보던 장량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벽강아 !

너는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니, 이제부터 애비가 일러 주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부귀와 공명은 세상 사람들이 다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귀해지면 영화에 눈이 어두워 누구나가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환락과 유흥을 일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허실(虛實)을 알게 되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는 것이다.

달(月)도 차(滿)면 반드시 기우는 법이요,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떨어지게 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천리(天理)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앉으면 그를 헐뜯는 사람이 무수히 생겨나서

결국은 자기 몸을 망치게 될 뿐만이 아니라,

처자식들 조차 불행하게 만드는 사실(史實)이 얼마든지 많았느니라.

높은 자리란 이처럼 비참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인데, 너는 그러한 천리를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

벽강은 머리를 수그린 채 대답이 없다.
장량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

 

"생각하면 부귀와 영화처럼 허망한 것이 없느니라.

나는 지금 이 조용한 산속에서 아침 저녁으로 일월(日月)을 즐기고 밤과 낮으로 운수(雲水)를 벗삼아 살고 있는데,

이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때로는 호숫가를 거닐며 공상에 잠겨 보기도 하고,

때로는 창가에 기대 앉아 책을 펴들고 노자(老子)의 현허 정신(玄虛精神)을 배우기도 하니,

이러한 즐거움이 어찌 부귀와 영화에 비길 것이겠느냐.

이 애비가 너희들에게 벼슬을 물려 주어 영화를 누리게 하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벼슬 자리에는 반드시 흥망과 번뇌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기에 이 애비는 차라리 너희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싶구나."

아들을 설득하는 쟝량의 말에는 육친의 애정이 절절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벽강은 부친의 깊은 애정을 그제서야 알아채고 머리를 수그리며 대답한다.

 

"아버님의 고매하신 정신을 소자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사옵니다.

앞으로는 아버님의 고매하신 정신을 쫒아 모든 것을 가르침 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오냐 고맙다 내 아들아 !

나는 너의 말을 듣고 기쁘기 한량이 없도다. 부디 그대로 하거라."

장량은 크게 기뻐하며, 그날 부터는 더욱 기쁜 마음으로 전원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장량은 마치 선인처럼 날마다 산과 들을 거닐며,

때로는 산과 들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을 즐겁게 감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호숫가에 머물며 철새들이 노니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런 때에는 장량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연에 동화되어 버린 자연의 일부분 같기도 하였다.

하늘이 새파랗게 깊고 깃털 구름이 드문드문 깔린  맑게 개인 어느 가을날 ...
이날도 장량은 아침부터 산과 들을 산책하다가,

문득 옛날의 스승이었던 황석공(黃石公) 노인을 생각하였다.

 

(황석공 선생 !

그렇다. 내가 오늘날 천하를 통일하는 데 많은 공을 세우고, 여생을 지금처럼 한가롭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그 옛날 <이교>라는 다리 위에서 황석공 선생을 만났던 덕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그 어른께서는 지금은 어떻게 지내실까 ?)

장량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불현듯 천곡성(天谷城)이라는 곳을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황석공 선생이 헤어지기 전에 한 말이 기억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량은 그날로 천곡성을 향하여 나그네의 길에 올랐다.

천곡성은 옛날과 다름없는 쓸쓸하고 한적한 시골이었다.

장량은 거리를 한참 배회하다가 그 옛날 이교를 발견하였다.

그때 황석공은 그 다리위에 앉아 있다가 장량을 보자,

다리 아래에 떨어진 신발을 세 번씩이나 주워다 달라고 하였다.

장량은 그때마다 떨어뜨린 신발을 공손히 집어다 주었더니 황석공 노인은 크게 감동하여,

 

"자네는 열심히 공부하면, 먼 장래에는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상(相)일세.

내가 귀서(貴書) 세 권을 줄 테니, 자네는 이 책을 열심히 공부하게.

그러면 참다운 군주(君主)를 만나 명성을 만고에 떨치게 될 걸세."라고 말하며

장량에게 죽간서(竹簡書) 세 권을 주지 않았던가 ?

그때, 장량은 하도 감읍하여,
"제가 만약 성공을 하여 후일에 선생님을 찾아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 하고 묻자,

황석공 노인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던가.

 

"내가 거처하는 곳을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행운 유수(行雲流水), 거주 무심(去住無心)이라고나 할까,

운수승(雲水僧)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무슨 일정한 거처가 있겠는가 ?

자네가 나를 굳이 만나 보고 싶다면, 지금으로부터 13년 후에 천곡성이라는 곳을 찾아가면,

성문 동쪽에 누런 바위가 하나 있을텐데, 그 바위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 주게."

장량은 그 옛날 황석공 노인이 들려주던 말을 회상하며

이교다리 부근을 아무리 배회하여도 황석공 노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 내가 황석공 노인을 만난 것은 이미 15년 전의 일이 아니었던가 ?

그렇다면 이 다리 위에서 선생를 찾으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천곡성 동쪽 문 밖으로 가서 누런 바위가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장량은 이교를 떠나 천곡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하여 천곡성 동문을 나와 얼마쯤 가다보니,

과연 조그만 언덕위에 누런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아 !

이 바위가 바로 황석공 선생의 화신 (化身)이란 말인가 ?"
장량은 자기도 모르게 감격어린 소리를 지르며,

그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누런 바위를 <황석공 선생의 화신>이라고 확신한 장량은

바위 앞에 정성스런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제자(弟子)로서 은사(恩師)에 대한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에서

그곳에 황석공의 사당(祠堂)을 짓기로 결심을 하고,

사람을 시켜 아담한 사당을 지어 놓았는데

지금도 천곡성 동문 밖 언덕 위에는 장량이 지어 놓은 사당이 고적으로 남아 있다.

장량은 황석공의 사당을 지어 놓고 사람을 시켜,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해 놓고 집으로 돌아오자,

돌연 유방의 부름을 받게되었다.
유방은 장량을 기쁘게 맞으며 말한다.

 

"선생을 못 만난지가 너무도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은 건강이 어떠십니까 ?"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성려(聖慮)를 베풀어 주시는 덕택에 무양(無恙)하게 지내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국무(國務)에 얼마나 분망하시옵니까 ?"
유방은 이때다 싶어서 새삼스럽게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러잖아도 나라에 번거로운 일이 생겨서,

오늘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일부러 모셨습니다."

 

"번거로운 일이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

 

"선생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지난번 묵특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진평 대부가 미인계(美人計)로 교묘하게 쫒아 버렸는데,

묵특이 속임수에 넘어간 것을 크게 분개하여, 또다시 대군을 몰고 침범해 온다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이까 ?

선생께서 신묘한 계책을 말씀해 주소서."

유방의 표정은 매우 심각하였다.
장량은 오랫동안 심사 묵고하다가 머리를 정중하게 조아리며 대답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시국변화(時局變化)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지 못하여 ,

전체적인 정국의 흐름에 둔감해졌사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진평 대부가 잘 알수 있을 것이오니,

그에게 하문(下問)해 주시옵소서. 진평 대부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모사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에 적잖이 섭섭한 빛을 보이며 말한다.

 

"물론 진평 대부와도 상의는 하겠소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도 선생의 말씀을 먼저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오."
장량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과분하신 말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나 신은 현직을 떠난 지가 오래 되어,

피아간(彼我間)의 정세에 너무도 어둡고 보니 어찌 좋은 계책을 꾸며 낼 수가 있으오리까 ?

옛글에 결자 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묵특의 문제는 애초부터 진평 대부가 취급해 왔으니,

이번에도 진평 대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뢰옵니다.

북방 오랑캐의 문제에 대해서는 유경(劉敬) 대부도 매우 정통한 분이오니,

그 두 사람과 상의하시면 반드시 좋은 계책이 나올 것이옵니다."
유방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진평과 유경을 불러 상의하니 유경이 즉석에서 이렇게 아뢴다.

 

"우리는 천하를 평정하느라고 너무도 오랜 세월을 싸워왔기 때문에,

이제 다시 묵특을 정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싸우기 보다는 지략으로써 묵특을 너그럽게 포섭하는 방법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너그럽게 포섭하는 방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수법을 말하는 것이오 ?"
그러자 유경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보이며 어렵게 말을 꺼낸다.

 

"폐하께서 진노(震怒)하실까 두려워 아뢰옵기 죄송하오나,

묵특을 포섭할 방법이 있기는 하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환해지며 물었다.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내 어찌 경의 말에 노여워하리오.

아무 걱정 말고 어서 기탄 없이 말해 보시오."
유경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말한다.

 

"묵특은 본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입니다.

그가 진평 대부의 미인계 술책에 넘어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니 이번에는 <거짓 미인계>가 아닌

<참된 미인계>를 쓰면 묵특을 원만하게 포섭할 수가 있으리라 보옵니다."

 

"참된 미인계란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오."

그러나 유경은 말하기가 몹시 거북한 듯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유방의 재촉하는 시선이 느껴지자 다음 순간 눈 딱 감고 이렇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사랑하는 미화 공주(美華公主)를 묵특에게 보내 주시면 만사는 쉽게 해결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요 ?

내가 사랑하는 미화 공주를 묵특에게 보내란 말이오 ?"

유방에게는 미화 공주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딸이라고는 그것 하나뿐이기에,

눈에 넣어도 아픈 줄을 모를 정도로 사랑하는 열 여섯 살의 절세 미인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미화 공주를 다른 사람도 아닌 오랑캐 두목에게 보내 주라고 하니,

유방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방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유경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다가,
"경은 지금 자기 정신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오 ?

나는 천하를 통일한 만승 천자(萬乘天子)요.

미화 공주는 만승 천자인 내가, 쥐면 꺼질새라 불면 날아갈새라, 

금지 옥엽(金枝玉葉 )처럼 사랑하는 이 나라의 유일한 공주님이오.

그러한 미화 공주를 어떻게 북방의 오랑캐 두령에게 내주라고 말씀하시오 ! "하고

정색을 하며 나무랐다.

 

"......."

유경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머리만 무겁게 수그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서 듣고만 있던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유경 대부의 제안은 매우 신묘한 술책인 줄로 사료되옵니다.

폐하께서 미화 공주를 묵특에게 보내 주시기가 무척 괴로우실 줄로 알고 있사오나,

미화 공주를 어찌 국가의 흥망과 바꾸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폐하께서는 각별히 통촉하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며 말한다.

 

"경도 유경 대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는 말씀이오 ?"
진평이 결연히 대답한다.

 

"유경 대부께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북방 오랑캐들은 군사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지금 형편으로는 그들과 싸워 보았자, 우리가 쉽게 승리할 가망은 매우 희박하옵니다.

설사 싸워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때에는 우리 나라의 재정이 매우 피폐해 질 것이옵니다.

그러나 유경 대부의 말씀대로 묵특을 사위로 삼으시면,

우리는 통일 국가를 안전하게 보존해 가면서 북방 오랑캐의 광대한 봉토까지

우리의 영향력 아래에 넣게 될 것이니, 그보다 더 좋은 술책이 어디 있으오리까."
진평의 말에 유방은 크게 수긍되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 사랑하는 공주를 오랑캐에게 내주고 싶지는 않아서,
"만약 두 분 말씀대로 미화 공주를 오랑캐에게 내준다면 천하의 제후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을 것이오.

미화 공주가 불쌍하게 여겨져서,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되겠소이다."하고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그 바람에 방안에는 침통한 정적이 오랫동안 흘렀다.
그러다가 유경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며 큰소리로 외치듯 말한다.

 

"폐하 !

미화 공주님을 묵특에게 보내지 않고도 위기를 타개할 방도가 방금 떠올랐사옵니다."
유방은 유경의 말을 듣고 반색을 하며 반문한다.

 

"그래요 ?

미화 공주를 묵특에게 보내지 않고도 위기를 타개할 방도란 무엇이오 ?"
유경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묵특을 포섭하려면 미인을 보내 주어야 하는 것만은 바꿀 수 없는 조건이옵니다.

그러나 미화 공주님만은 절대로 보내 주실 수 없으시다면,

민가(民家)에서 미화 공주님처럼 잘 생기고 얌전한 규수를 한 명 구해 가지고

단기간에 황실 규범을 가르쳐서 묵특에게 보낸다면 효과는 똑같을 것이옵니다."

 

"과연, 경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절묘한 방법이구려 ! "
그리고 진평 대부를 돌아다보며 묻는다.

 

"진평 대부는 유경대부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 "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유경 대부의 제안에는 신도 감탄해 마지않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리하여 미화 공주 대신에 민가에서 아름다운 규수를 구하여 묵특에게 보내 주기로 결정하였다.
민가에서 미화 공주처럼 생긴 처녀를 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미인 선택이 끝나자, 유방의 양녀(養女)로 삼아, 황실 법도를 단기간에 가르쳐서
유경으로 하여금 유방의 조서와 함께 양녀를 대동하고 묵특을 찾아 가도록 하였다.
양녀와 함께 묵특에게 보내는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일 백등성 전투 때에 그대를 속인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소.

이에 짐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나의 공주를 그대에게 보내기로 하였으니,

그대는 공주와 백년 가약을 맺음으로써 양국간의 평화를 길이 도모해 주기 바라오.>

묵특은 유방의 조서를 받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곧 문제의 <공주 아닌 공주>를 만나 보았다.
묵특은 본디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보통 여자가 아닌

<공주>라는 바람에 묵특은 입이 찢어지게 좋아하며 유경에게 말한다.

 

"대한 황제께서 공주를 보내 주시면서 나를 사위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으니,

내 어찌 이런 영광을 사양하겠소이까.

이제 나는 황제 폐하의 사위가 됨으로써 우리 두 나라는 영원히 옹서지의(翁壻之誼)를 누리게 될 것이오.

대부께서는 돌아가시는 대로 나의 이 맹세를 황제 폐하께 분명하게 품고해 주시오."

그리고 길일을 택하여 혼례식을 성대하게 올렸다.
유경은 중대한 사명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 그간의 경위를 황제에게 고하니, 유방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북방 오랑캐의 문제는 이로써 원만히 해결되었으니,

오늘 밤부터는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소이다

그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