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경대학을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2)
제1원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제2원사 강의실로 갔다.
오후 첫 강의는 이동신 강사의 강의시간으로 도산십이곡중 구곡을 부르고
충주지역의 탑펑리 7층석탑과 고구려비, 관아공원과
청풍문화단지의 역사성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동신 강사는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고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장소로
탑과 부도는 죽은자의 집과 같다면서
중국은 진흙이 많아 전탑이 많고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화강암이 많아 석탑이 많으며
일본은 지진이 많아 지진에 견딜수 있는 목탑이 많다고 하면서
탑이 먼저 만들어 지고 불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쳐 왔다고 하였다.
안동에는 법흥사 칠층전탑과 법림사 오층전탑, 조탑리 오층전탑이 현존하고 있으며
안동생명과학고등학교 이전시에는 임하사지가 발견되면서 전탑지도 발견되었고
이 지역을 '하이마'로 부르는 것도 하임하(下臨河)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안동지역에는 30여개소의 전탑과 모전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전파하면서 전래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통일신라 이전에 양지스님에 의하여 전파되었다는 힉설도 있으니
앞으로 연구과제이라는 설명도 덧 붙였다.
충주 중앙탑으로 불리는 14.5m의 탑평리 칠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8세기 후반의 석탑으로 추정되며
충주지역은 우리나라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탑이 있는 지역은 절터로 짐작되나 기록이 없어 사찰명을 알수 없다고 하며
기단과 탑신, 상륜부에 대한 탑의 구조에 대하여도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충주 고구려비는 높이 144㎝, 폭 55~59㎝, 두께 37㎝로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 후 남진을 계속하여 5세기 전반 충주지역을 점령하고
수도의 다음으로 가는 국원성(國原城)으로 승격시켜 신라공격의 전초기지로 정하고
남진정책의 성공을 기념하는 비로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 한다.
충주는 고구려와 신라가 국운을 걸고 싸우다가 신라 진흥왕이 국원성을 장악하였고
신라에서도 부도(副都)로서의 위상으로 유지하면서 중원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반면 국원성을 상실한 고구려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어 멸망하였다고 한다.
충주 관아공원은 충주목의 관아 터로 중앙공원이라고도 부르며
동헌으로 쓰이던 청녕헌(淸寧軒)과
귀빈들이 묶던 영빈관 역할을 하던 제금당(製錦堂)이 있으며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8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충주시에서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역사체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풍문화단지는 충주호 건설당시 수몰지역의 문화재들을 이전한 단지로서
청풍 한벽루는 1317년(충숙왕 4) 청풍현 출신 승려인 정공이 왕사가 되어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 동편에 세운 건물로
조선 태종 때와 인조 때, 고종 때 중수를 거쳐오면서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1983년 청풍 물태리로 옮겨 졌다고 하며
밀양 영남루와 남원 광한루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건물의 대표적인 예로 가장 간결하고 단아하다고 한다.
물태리 석조여래입상은 청풍면 읍리 대광사 입구에 있었던 불상을 이건한 것으로
10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3.33m로 두툼한 눈, 넓적한 코, 뚜렷한 인중은
자비로운 부처의 용모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통일신라의 불상의 힘을 느끼지만 고려시대의 양식을 지내고 있다면서
종교의 열정이 정신적으로 흐른 신라시대의 불상은 섬세하고
종교의 열정이 물질적으로 흐른 고려시대의 불상은 웅장하다면서
안동지역의 불상중에서도 북후 옥산사의 마애여래불이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하였다.
청풍부(1660년 승격)를 드나드는 관문이었던 팔영루, 1660년 관청의 정문이었던 금남루,
집무를 처리하던 동헌이었던 금병헌, 휴식공간이었던 응청각, 망월산성 등에 대하여
건물의 구조와 역사성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안동의 선성은 신라, 고구려, 고구려 양식들이 발굴되고 있어
신라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산성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복원계획중에 있고
학가산성은 신라의 북침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충주. 제천지역의 문화재들과 역사성을 설명하면서
안동지역의 역사를 함께 설명하여서
우리문화와 역사성을 익히는 유익한 시간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둘째시간에는 권갑현 교수님과 경제잠을 자장가 곡으로 함께 부르며 시작하여
오전에는 귀향길에 대한 공부를 하였고
전시간에는 귀향길 주변에 대한 역사공부를 하였으며
이번시간에는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한다고 설명하면서
퇴계선생이 귀향하실때 충청감사였던 유홍(兪弘)이 퇴계선생께 드린 시와
퇴계선생의 차운시에 대한 설명과
유홍이 퇴계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한달 남짓 지난 1571년 정월 16일
승정원우승지로 오건((吳健)이 왕명으로 지은 제문을 가져와서
'판중추부사증영의정이황'의 영전에 제사지냈던 제문도 해설하고
퇴계선생의 한벽루에 대한 시와
구담에서 이지번(이지함의 형, 이산해의 아버지)과 주고 받은 시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쳤다.
오늘도 코로나로 인하여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40명의 회원들이 거경대학에서 하루를 보냈다.
강의를 하여주신 강사님들과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린배를 움켜 잡고 살아오던 보릿고개에도 별식이 생기면 이웃과 나누었고
뜨거운 뙤양볕에 땀을 흘리며 일을 하다가도 새참을 가져오면
이웃에 일하던 사람들과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
사람이웃이든 토지이웃이든 이웃이 좋아야 한다며 살아왔으며
가을운동회에 줄당기기를 할때는 뭉쳐야 이긴다며 어영차를 외치면서
협동과 화합을 강조하며 살아왔는데
그러나 코로나 환국이 7여개월 이어지면서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는 구호가 생겨나고
추석명절에는 벌초도 대행시키고 성묘도 자재하며
가족들과도 만나지 말아야 한다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니
점차 마음마저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고
정치판은 니편 내편으로 쪼개고 가르기를 반복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깨어진 민심는 무엇으로 다시 회복시킬꼬 ???
거경대학에서 겸손과 섬김으로 살아오신 퇴계선생의 삶의 지혜를 배우면서
경(敬)의 자세로 도덕입국을 위하여 노력하시면서 본성을 되찾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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