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1 -
*밝혀진 집안 내력의 秘密
어머니로 부터 조부(祖父) 김익순에 대한 내력을 듣게된 병연(炳淵)은
비틀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벽을 바라보고 꿇어 앉아,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듯 고개를 꺽고 있었다.
희미한 등잔불은 가끔씩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여보,
밤이 깊었어요."
남편이 평소와 전혀 다른, 실성한 모습으로 벽을 향해 앉아 있자,
병연의 아내도 물끄러미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늘 집에 오실때
백일장에 참례하여 장원급제 하셨다고 좋아 하시더니" ..
병연의 아내는 불과 한 시각 전에 남편 모습이
어머니 방을 다녀온 후 돌변한 것이 의아했다.
그러나 병연은 대답이 없었다.
"여보,
어서 자리에 드세요."
아내가 다시 말하자 병연은 그제서야 아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잔불로 어두운 방안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알수 있었다.
"당신 아직까지 자지 않았구료."
"당신이 그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잠자리에 들 수 있겠어요."
"그렇군 ,
내 미안하오."
자조섞인 말투로 대답한 병연은 다시 아무 말없이 공연스레 고개를 몇번 끄덕이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아내에게 감추려는 듯 다시 시선은 천정을 향했다.
그리곤 한참동안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천정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보 !"
남편의 부름에 아내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얼굴과 시선을 병연의 등뒤로 향했다.
"오늘,
내 당신을 앞으로 고생 시키지 않고 호강시키리라 생각되더니
모두가 허사가 된 것 같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남편의 다정한 말을 듣자
더욱 궁금한 아내가 가슴 떨려하며 되물었다.
"장원급제의 기쁨도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소,
벼슬길도 이제 아득하게 멀어지고...
아까 부터 , 모든 것이 헛된 꿈이요
뜬구름을 쫒는 신세가 된 기분이오."
"저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내의 궁금증은 다시 입을 다물고 있는 병연의 모습으로 더욱 커졌다.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오."
아내가 뒤이어 아무 말 없자 병연은 한참후 입을 열었다.
"오늘,
백일장에 시제는
논공가산충절사
(論鄭嘉山忠節死),
탄김익순죄통우천
(嘆金益淳罪通于天)
이었소."
"제가 그런 어려운 글을 아나요" ..
아내가 이렇듯 대답하자
병연은 당연하듯 고개를 몇번 끄덕인후 다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입을 연 병연은,
"그 시제로 장원이 되었으나
알고보니 내가 절절히 탄핵했던 김익순이 사실은 나의 조부였소."
병연의 아내는
이제서야 남편이 그토록 괴로워한 까닭을 헤아린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하오,
당신을 고생시켜서" ..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남편의 말을 들으니
병연의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여보,저..."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무슨 말이오?"
병연은 천정을 쳐다본 채 물었다.
아내는 몇번인가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아기를?"
병연은 이제서야 아내를 향하여 돌아서며
자세를 고쳐 앉아 아내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병연이 마주보자 아내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깊게 떨구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한동안 아무말 없이 바라보던
병연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생각해 보면 백일장에서 장원급제 하였겠다,
아내는 태기가 있겠다.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 인가?
그러나 병연에게는 기쁨보다 슬픔이 앞섰다.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미천한 아비로 인해
신분이 제한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아내의 말을 듣고도 기쁨에 앞서 가슴만 더욱 메어왔다.
병연은 아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뜨거운 눈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차라리 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병연은 밤새 한잠 못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해가 산마루를 넘어왔다.
사립문 밖으로 나온 병연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새벽 안개속에 묻힌듯 뿌옇게 보였다.
어제 이시각의 병연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소생하는 만물처럼 야심찬 사나이였다
그러나 지금 가슴속에는 희뿌연 재만 남고 희망도 용기도 없는 타락한 몰골이었다.
잡목 숲을 얼마나 걸어다녔는지 모른다.
병연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아 .."
무거운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잠들었다기 보다 허탈감이 주는 공허함에 가사상태였다.
종달새 한마리가 하늘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병연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해는 이미 중천 높이 솟아 있었고
봄볕은 따사롭게 움트는 나뭇가지를 비추고 있었다.
넋을 잃고 망연히 눈 앞에 펼쳐진 봄풍경을 바라보던 병연은
문득 당시(唐诗) 한 수가 떠올랐다.
초색청청 유색황 (草色靑靑 柳色黃)
도화난 이화향 (桃花乱 梨花香)
동풍불위 취수거 (东风不为 吹愁去)
춘일편능 야한장 (春日偏能 惹恨长)
<풀빛은 푸르나 버들은 아직 황색인데, 복사꽃은 만발했고 배꽃은 향기롭네>
<동풍은 나의 시름을 불어내어 갈 줄 모르고, 봄날은 한도 많고 길기도 하여라.>
지금 처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시였다.
그렇다,
이 화창한 봄날은 그에게는 한도 많고 지루하도록 길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문득 단시 한 귀절이 떠 올라 읊조리는데
만사 개유정(万事 皆有定),
부생 공자망(浮生 空自忙)
<모든 일은 운명에 따라 정해지건만,
사람이 공연히 떠돌며 찾는구나>
방랑시인 김삿갓
《오늘부터 김삿갓을
심낙(㝷樂)교수본으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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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紹介
생몰언대:1807 ~ 1863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에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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