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58 -
[각 도(道) 의 이름이 지금처럼 불리는 이유]
김삿갓은 원주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때는 가을도 깊어져 초겨울 이었지만
산속 오솔길을 비추는 햇볕은 봄날 처럼 따듯했다.
호젓한 산길을 얼마간 걷다가 어떤 촌로 한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는데,
원주에 사는 친구의 환갑 잔치에 간다는 것이다.
노인은 길을 가면서 김삿갓에게 물었다.
"노형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저는 한양으로 가는 길입니다."
"허, 한양을 가신다니 부럽소이다.
나는 육십 평생에 원주 나들이 조차 처음이라오.
원주가 경기도 땅이지요? " 하고 묻는다.
김삿갓은 촌로의 무심함에 적잖이 놀라면서,
"아닙니다.
원주는 강원도 땅입니다.
본디 강원도라는 이름은 원주라는 고을 이름에서 따온 것 입니다."
촌로는 김삿갓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며 되물었다.
"강원도라는 이름이
원주에서 따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 "
김삿갓은 걸어 가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옛날에 각 도의 이름을 지을 때,
영동 지방을 뭐라고 부를까 생각하다가,
강릉의 머리 글자 "강" 과 원주의 머리글자 "원" 자를 한 자씩 따가지고
"강원도"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원주는 강원도 땅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촌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러면 함경도나 평안도 등도
그런 식으로 생겨난 이름인가요 ? "
"물론이죠.
임금님이 계시는 한양 일대만은 '경기도'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고
나머지는 모두 지역에 사람들의 왕래와 활동이 빈번한 고을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지은 것 입니다."
"그거 참 재미있구려.
이왕이면 다른 도명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노인장의 소원이라면 그렇게 합시다.
함경도는 '함흥'과 '경성'에서 한 자씩 따가지고 '함경도'로 부르게 되었고,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에서 한 자씩 따가지고 '평안도로 부르지요.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에서 한자씩 따가지고
'황해도',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에서 한 자씩을 따서 충청도,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에서 한 자씩을 따왔고,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한 자씩 따가지고 '전라도'로 부르게 된 것 입니다."
촌로는 김삿갓의 설명을 모두 듣고나서,
"오늘은 노형 덕분에 늙은이가 좋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김삿갓은 원주 부근에서 촌로와 작별하고, 발길을 여주로 돌렸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고을을 되도록 피해 가면서
명승지가 많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여주의 대표적 명승지는 신륵사(新勒寺) 이다.
신륵사는 봉미산(鳳尾山) 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눈 앞에는 한강의 상류가 흐르고 있어 산수의 조화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곳이다.
게다가 강가의 바위 위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멋들어진 정자까지 있는 곳이었다.
강월헌 근처까지 다다른 김삿갓은
주변 경치에 취해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그만, 하룻밤 묵을 곳을 찾지 못 하였다.
때는 이미 많이 지나, 서산 넘어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창공의 달은 마치 대낮 같이 주변의 사물을 고요히 비추고 있었다.
(강월헌 이라더니 제대로 날을 잡았군,
내친 김에 오늘은 강월헌 정자에서 달 구경을 하며 하룻밤을 보내야 하겠구먼)
이렇게 생각한 김삿갓은
천천히 발걸음을 강월헌이 있는 여강(驪江)으로 향해 갔다.
그런데 한참 앞서 옷을 하얗게 차려 입은 아낙네 하나가
부지런히 강월헌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로 강월헌에 가는 것인가 ?
아녀자 혼자, 초겨울 달 경치를 구경하기는 너무 늦은 시각인데 ..)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 김삿갓은
불현듯 일종의 호기심이 일어 여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강월헌에 올라선 여인은 그곳에서
누가 기다리던 모양인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해요 ...
아이 숨차 !" 하고
소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누구인지는 알길 없으나 어둠속에서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늙수구레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길게만 느껴지는군,
바삐 오느라고 숨이 무척 가쁜 모양이구먼, 어서 이리 와 앉아요."
두 남녀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이 확실해 보였다.
김삿갓은 적당한 위치에서 몸을 숨기고,
정자 위에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바라 보다가 다음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달빛이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으나 젊은 아낙네와 정답게 마주 앉은 남자는
속인이 아닌 가사 (袈裟) 적삼을 걸친 노승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치렀던 저의 집 양반 사십구 제(齊) 때에는
스님께서 여러가지로 보살펴 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르겠어요."
여인이 그렇게 말을 하자 중은
"무슨 소리요.
그대의 일을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 주겠는가?
그대의 일이 즉 나의 일이니 앞으로도 어렵게 생각지 말고 나를 자주 찾아 오라구." 하고
말한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
그런데 오늘밤은 무슨 일로 저를 여기까지 오라고 하셨습니까."
"그대가 무척 외로워 보이기에,
내가 위로를 해주려고 만나자고 한 것 아닌가 ! "
중은 그렇게 말하며 대뜸 여인을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는지
한동안 말이 없더니 한참이 지난 후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스님들은 여자를 모른다고 했는데,
스님만은 여자를 잘 알고 계시는가 보네요."
그러자 노승이,
"무슨 소리! 많은 신도들에게
자비(慈悲) 를 베풀어야 하는 내가 여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
옛날에 석가여래의 고제자였던 아난은 마등이라는 음녀(淫女)와
수없이 정을 통해 왔는데,
아난은 중이 아니며 마등은 계집이 아니더란 말인가?
오늘날 내가 그대와 이렇게 함께 하는 것도,
모두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해 보이는 것이라네 ! "
중은 해괴하고 괴상망측한 자신의 짓을 이런 궤변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여인은 짐짓 놀라는 소리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그러면 스님은 남녀간의 재미를 속인들 처럼
샅샅이 알고 계신다는 말씀인가요 ? "하고,
교묘한 말로써 사내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아무렴 !
내가 여자를 얼마나 잘 아는지 실증해 보이면 될 것이 아닌가 ?"
그리고 중은 여인의 손에 자신의 신물(神物)을 직접 쥐어 주기라도 했는지,
여인이 별안간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마 !
스님은 누구를 죽이려고 이런 참나무 방망이를
다리 사이에 숨겨 가지고 다니세요 ?"
그 사내 놈에 그 계집년이라고나 할까.
계집년의 수작도 보통이 아니었다.
서방이 죽은지 두 달도 못되어
한밤중에 호젓한 정자로 중을 만나러 올 정도이니,
여인의 행실은 고대 소설, 가루지기 타령의 변강쇠 마누라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젊은 계집의 앙큼한 수작을 듣는 순간
옛날에 읽어 본 가루지기 타령이라는
고대 소설의 한 장면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천하의 잡년이었던 변강쇠 마누라는
서방의 신물을 어루만져 보며 다음과 같은 익살스러운 사설을 늘어 놓았다.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케도 생겼네. 전배사령(前陪使令)을 서려는지,
쌍걸랑을 늦게 차고,
오군문군노(五軍門軍奴) 이런가 복떠기를 붉게 쓰고 ,
냇물가에 방아인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철고비를 둘러치고
감기가 들었는가 맑은 코는 뭔 일 일꼬,
어린에 젖 게우듯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장이 궁기 그저 있다.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고 소년 인사 배웠는지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댄지 검붉기는 무슨 일꼬,
칠팔 월 알밤인지 두 쪽이 한데 붙어 있네..."
천하의 잡년 이었던 변강쇠 마누라는 서방의 신물을 어루만지며
위와 같이 해괴한 일장 사설을 익살맞게 늘어 놓았으나,
이 젊은 여인은 그만한 말재주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물을 어루만질수록 믿음직스러운 실감이 났던지
"도데체 이 방망이의 이름을 무어라 하옵니까 ? " 하며,
앙큼스럽게 묻는다.
이에 늙은 중이 자신감에 찬 소리로
콧노래를 섞어 이렇게 뇌까리는 것이 아닌가 ?
"이 방망이로 말하면 만천하의 여인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생살 여의봉(生殺 如意捧) 이라고 하느니라..
선가에는 극락 세계가 있으니,
모든 여자들을 극락 세계로 인도하는 이 물건을 일컬어
생살 여의봉이라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야 ! "
그러자 여인의 새침한 소리가 들렸다.
"스님은 이 물건으로 모든 여성들을 극락 세계로 인도하셨습니까 ?
이 물건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여성들을 위한 물건이라면
저는 죽어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아니하옵니다."
여인이 갑자기 질투심 어린 소리를 하자,
노승이 크게 당황하는 듯 하더니
젊은 여인을 와락 끌어 안으며 이렇게 뇌까려 대었다.
"중생이 천만이 되어도 인연은 제각기 따로 있는 법.
나룻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넜다고 모두가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은 아니오.
나는 봉(鳳)이요, 그대는 황(凰)이 아닌가 ?
자고로 봉과 황은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인연임을 그대는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내 이제, 우리 두 사람은 삼생(三生)의 인연임을 그대에게 실증으로 보여 주리라."
그러면서 늙은 중은 여인을 마루 바닥에 깔아 눕히고
위로 덮쳐 올라 여인의 옷을 벗기는지, 부스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잠시후 여인은 별안간,
"으흐흑 !"하고
외마디 감탄사를 지르더니 잠시 후에는 콧소리로 말을 한다.
"스님은 사람을 죽이시네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스님인줄 알았는데,
이렇듯 죽게 만드시니 이 무슨 일이오니까 ? "
노승은 만족스런 대답을 하는데,
"생살 여의봉이란,
신통방통 영험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수도 있으니
그대가 조금전 까지는 죽을 것 같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다시 살아났으니,
앞으로도 살아갈 재미가 있을 것이야...
그래서 이것을, 생살 여의봉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 "
하면서 도도하게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외간 남녀의 야합을 더이상 지켜 볼 흥미를 잃었다.
그러면서도 불도에 정진하며 수양을 하여야 할 중의 파계도 문제이지만,
남편의 사십구 제를 계기로 만난
늙은 중과 눈이 맞아 돌아가는젊은 여인의 행실에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삼강 오륜은 이미 땅에 떨어졌구나 ! "하고
중얼거린 김삿갓은 중놈과 계집이 모르게 강월헌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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