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 (411)
거침없는 사마소와 강유의 얻은 것 없는 승리( 2 )
등애는 왕관이 보낸 밀서를 받아보았다.
서신을 읽고 기뻐하며 등애가 장수들에게 말한다.
"8월 15일,
담산 골짜기로 대군을 이끌고 가서
먼저 가 있는 왕관과 협력하여 촉군을 칠 것이다!"
등애가 받은 서신은 물론 강유가 제 입맛에 맞게 고친 것이었다.
8월 15일, 등애는 오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담산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찰병을 산마루에 올려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돌아온 정찰병이 등애에게 보고한다.
"군량을 실은 수레가 끝없이 많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꼴자기의 후미진 사잇길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등애는 직접 말을 타고 산을 올라 군량 수송대의 모습을 살펴봤다.
과연 정찰병의 말대로 군량을 수송하는 수레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리고 그 수레들을 운반하는 자들은 모두 위군이었다.
그것을 함께 본 좌우에 있던 장수들이 말한다.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얼른 가서 왕관과 협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등애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한다.
"앞쪽의 산세가 험하니 혹시라도 복병이 있으면 급하게 후퇴하기 어렵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기로 하자."
등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사 둘이 말을 달려와서 급보를 전했다.
"왕관 장군의 수송대가 막 경계를 넘고 있는데,
배후에서 촉군이 뒤쫓고 있습니다.
속히 구원해 주십시오."
등애는 크게 놀랐다.
계략이 뒤늦게 탄로나서 쫓기고 있는 것이라면 빨리 손써야만 했다.
그리하여 담산 골짜기에서 기다리려던 생각은 버리고
급히 군사를 재촉하여 달려나갔다.
때는 사방에 어둠이 깔릴 시간,
초경이었으나 보름달이 마치 낮에 뜬 해처럼 밝았다.
갑자기 산 뒤에서 함성이 일고 병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등애는 왕관이 산 뒤쪽에서 격전을 버리고 있는 줄 알고
급히 말을 휘몰아 달려가는데, 문득 숲속으로부터 한무리의 군사가 뛰쳐나왔다.
뛰쳐나온 무리의 선봉에 있는 것은 촉장 부첨이었다.
부첨이 등애를 보고 외치며 달려온다.
"등애 이놈!
너는 이미 우리 대장군의 계책에 걸려 들었다!
그만 포기하고 말에서 내려 죽음을 받아라!"
등애가 깜짝 놀라 말을 돌려 달아나는데,
군량 수송대의 수레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일제히 불길이 치솟았다.
그것을 신호로 양쪽 산에서 촉군이 물밀듯 쏟아져 내려와서는
위군을 마구 쳐죽였다.
등애조차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으니
위군의 일개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 곳곳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등애를 사로잡는 자에게는
상으로 천금을 주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하겠다!"
등애는 혼비백산을 해서 갑옷과 투구를 벗어버리고
말도 내버린채 보병 틈에 섞여 산을 기어올라 달아났다.
강유와 하후패는 등애가 맨몸으로 도망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말을 타고 앞장 서 있는 자 중에 등애가 없는지 찾으러 다녔다.
강유는 승리에 들떠있는 군사들을 모아서
왕관이 수송하고 있는 군량과 마초를 받기 위해 길을 나섰다.
왕관은 등애와의 약속에 따라 8월 20일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도록
군량과 마초를 수레에 실어놓고 거사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심복 한 명이 달려오더니 급하게 보고를 올린다.
"계획했던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등애 장군은 보름날 담산에 도착했다가 대패하시어
지금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왕관은 황급히 여러 부하들을 보내 더 자세한 사실을 알아오도록 했다.
곧 여러 곳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오는데, 하나같이 기가 막힌 소식들 뿐이었다.
"지금 촉군이 세 갈래로 포위하여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배후에서 흙먼지가 일고 있는 것을 보면
도망갈 길이 모두 막힌 것 같습니다."
왕관은 좌우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군량 수레에 불을 놓아라!
싹 다 불태워 없애 버려라!"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다.
하늘까지 닿을 기세로 화염이 솟구치는 가운데,
왕관이 절규하듯이 외친다.
"사세가 급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왕관은 군사들을 휘몰아 서쪽으로 돌진했다.
그 뒤를 강유군이 세 갈래로 나뉘어 추격했다.
강유는 왕관이 살기 위해 당연히 위나라로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관이 향하는 곳은 한중이었다.
게다가 왕관은 촉군의 유일한 통로인 잔도(棧道)에 불을 질러 길을 끊어 놓고,
관문마다 불을 지르며 가는 것이 아닌가? 강유는 대경실색하였다.
등애와 왕관에게 또다른 계책이 있는 것은 아닌지,
기산을 얻으려다가 기산은 얻지도 못하고 한중 땅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결국 강유는 일단 등애를 추격하는 것은 포기하고 왕관부터 잡기로 했다.
추격대를 밤낮 가리지 않고 좁은 샛길로 휘몰아간 끝에,
마침내 왕관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왕관은 사면에서 밀려드는 촉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흑룡강(黑龍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왕관의 나머지 군사들은 촉군에 붙잡혔으나,
극심한 분노에 차 있는 강유로 인해 투항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모두 생매장 당하고 말았다.
강유는 등애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왕관이 지른 불로 인하여 숱한 군량과 마초를 잃고 잔도마저 파괴된 터라,
하는 수 없이 군사들을 한중으로 물리고 말았다.
등애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초라한 몰골로 기산 영채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죄를 청하고 스스로 벼슬을 깎았다.
조정의 모든 결정권은 사마소에게 있었기에 사마소는 등애가
지금껏 큰 공로를 세운 것을 고려하여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많은 상을 하사하여 노고를 위로했다.
등애는 상으로 받은 재물들을 모두 이번 싸움에
희생된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마소는 촉군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하여 등애에게
오만의 군사를 더 내어주며 요충지를 굳게 지킬 것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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