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 (413)
공명의 가르침 보국안민(保國安民) -2
낙성(樂城)을 지키고 있던 촉의 장수 왕함(王含), 한성(漢城)을 지키고 있는 장수
장빈(蔣斌)은 위군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감히 나가 싸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성문을 굳게 잠그고 지키기만 했다.
촉의 방어태세를 본 종회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린다.
"전쟁은 신속성이 가장 중요하다.
지체하지 말고 성을 공격해가라!"
종회는 전군장 이보(前軍將 李甫)에게 낙성을, 호군 순개에게 한성을 포위하게 하고,
본인은 대군을 직접 이끌고 양안관을 공략하기 위해 떠났다.
양안관을 지키던 촉장 부첨은 부장 장서(副將 蔣舒)와 방어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장서가 말한다.
"위군의 숫자가 굉장합니다
. 그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우니
응전하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낫겠습니다."
부첨이 말한다.
"그렇지 않소.
위군은 장거리를 이동해왔으니 필시 모두 지쳐있을 것이오.
병력이 많으나 두려워 할 정도까지는 아니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한성과 낙성은 함락되고 말 것이오."
장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때 급보가 들어왔다.
위의 대군이 벌써 관문 앞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부첨과 장서는 서둘러 문루(門樓)에 올라서서 밖을 내려다 보았다.
종회가 채찍을 공중으로 번쩍 치켜 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종회가 기세 좋게 외친다.
"내가 십만 대군을 몰고 왔다!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에게는 벼슬을 주겠다.
어리석게 항복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너희들에게 곧 재앙이 닥칠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부첨은 장서에게 명한다.
"그대는 관문을 단단히 지키시오.
나는 군사 삼천을 이끌고 가서 저 놈들을 휩쓸어 버리겠소."
부첨의 군사가 일제히 쏟아져 나오자 종회는
군사들을 이끌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부첨이 기세를 몰아 추격하는데,
흩어져서 도망가던 위군이 다시 합쳐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뭉친 위군은 부첨의 군사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부첨은 황급히 군사들을 되돌려 관문을 향해 갔다.
하지만 관문은 꽉 닫힌 채 잠겨 있었다.
부첨이 위를 올려다 보니
성루 위에 난데없이 위나라의 깃발이 올라가 있었다.
잠시후 장서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부첨에게 외친다.
"나는 위나라에 투항했다!"
부첨은 노발대발하며 소리를 지른다.
"이 배은망덕한 도둑놈아!
네가 무슨 낯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겠느냐!"
부첨은 다시 말을 돌려 위군 진영으로 달려나갔다.
위군은 부첨의 군사들을 사방에서 에워싼 뒤 점차 포위망을 좁혀 들어왔다.
부첨은 죽을 힘을 다해 위군을 깨쳐보려 하였으나
소수의 병력으로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거느린 군사들 대부분이 죽거나 다쳐서
더 이상 적을 맞설 힘이 없었다.
부첨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탄식한다.
"촉의 신하로 태어난 나는
죽어서도 촉의 귀신이 되겠다!"
그리고 다시 말고삐를 단단히 쥐고 위군 속으로 돌진했다.
위군의 창과 칼에 부첨의 갑옷과 투구는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타고 있던 말이 쓰러지자 부첨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을 택했다.
종회는 드디어 양안관을 점령했다.
양안관 안에는 군량과 마초, 병기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종회는 기뻐하며 삼군을 배부르게 먹였다.
그날밤,
종회의 군사들은 양안관에 머물렀다.
군사들이 잠들어 있는데 홀연 서남쪽에서 함성이 크게 울렸다.
종회가 깜짝 놀라서 급하게 장막에서 나와 밖을 살폈다.
허나 밖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밤공기마저 고요했다.
하지만 위군 장병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밤,
또 서남쪽에서 함성이 일었다.
종회는 사태를 파악해 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새벽녘에 사람을 보내
무슨 사정인지 알아보게 했다.
이윽고 정찰대가 돌아와서 종회에게 보고한다.
"십 리 밖까지 나갔지만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틀 밤이나 서남 방향에서 사람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무도 없다니 종회는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직접 서남방 일대를 순찰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얼마쯤 갔는데 눈 앞에 우뚝 솟은 산이 나타났다.
그 산을 중심으로 모든 방향에서 살기(殺氣)가 일더니
먹구름과 안개가 산봉우리를 뒤덮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종회가 말을 세우고 향도관(鄕導官)에게 묻는다.
"이 산은
무슨 산인가?"
"이 산은
정군산(定軍山)입니다.
옛날에 하후연(夏侯淵)이
제갈공명의 계략에 속아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향도관의 말을 듣고 종회는 어쩐지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감회에 젖어 잠시 정군산을 바라보던 종회는
말머리를 본영 방향으로 돌렸다.
종회 일행이 산비탈을 막 돌아나오는데,
갑자기 광풍이 일더니 수천 명의 기병대가 함성소리도 없이
곧장 위군을 향해 돌진해 왔다.
깜짝 놀란 종회와 그 부하들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 나머지 말에서 떨어진 장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종회가 겨우 양안관에 이르러서 부하들을 살펴보니
사람이나 말 모두 조금 다치거나 투구를 잃은 정도이지,
그 이상의 더 큰 피해는 없었다.
종회는 뒤로 쳐졌다가
뒤늦게 들어온 병사를 불러다 묻는다.
"뭔가 본 것이 있느냐?
촉군은 아니더냐?"
"촉군은 확실히 아니었고
사람 같지도 않았습니다.
검은 구름이 이는 가운데에서 기병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가까이 다가와서도 사람을 헤치지 않았습니다.
곁을 스쳐지나갈 때 보았는데, 기병이 회오리바람으로 바뀌더니
먹구름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종회는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서
촉에서 투항해온 장수 장서에게 묻는다.
"정군산에 신령을 모신 사당이 있느냐?"
장서가 대답한다.
"사당은 없고,
제갈무후의 묘가 그곳에 있습니다."
종회가 깜짝 놀라더니 말한다.
"아까 본 것은 틀림없이 제갈무후께서
현성(顯聖)하신 것이다!
내가 그 분 묘 앞에서 제를 올려야겠다."
다음날,
종회는 제물을 성대하게 갖추어 정군산으로 향했다.
산 아래에 이르니 또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었다.
종회는 제갈공명의 묘에 재배하고 제를 올렸다.
그러자 광풍이 사라지고 먹구름도 흩어지더니 맑은 바람이 일고 이슬비가 촉촉히 내렸다. 그리고 이내 날씨가 맑게 개었다.
종회와 위군은 크게 기뻐하며 모두 제갈공명
의 묘에 절하여 사례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그날밤,
종회는 장막 안에서 책상에 엎드려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줄기의 맑은 바람이 불어오더니 웬 사람 하나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머리에는 윤건(綸巾)을 쓰고, 손에는 우선(羽扇)을 들고, 몸에는 검은 띠를 두른 학창의를 걸치고, 발에는 흰 신을 신고 있었다.
얼굴은 관옥(冠玉)처럼 말쑥하고, 입술은 붉고, 눈썹이 짙고 눈은 맑고 깨끗했으며 신장은 팔 척이 넘어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신선 같았다.
종회가 일어나서 그 사람에게 묻는다.
"공은 뉘신지요?"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종회에게 말한다.
"오늘 나를 정성껏 돌봐주어 고맙다.
내가 그대에게 일러줄 말이 있어 왔노라. 한(漢)나라의 운수가 이미 쇠하여 천명(天命)
을 거스를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촉천(蜀川)의 애꿏은 백성들이 전란에 고초를 겪을 터이니 참으로 가련하고 애달프도다.
그대가 촉나라의 경계에 들어서더라도 무고한 백성을 죽이는 일은 없도록 하라."
그 사람은 말을 마치더니 소매를 떨치고 사라져 버렸다.
종회가 붙잡으려고 하다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종회는 꿈 속에 나타났던 인물이 제갈공명인 것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종회는 바로 영채 앞에 커다란 백기(白旗) 하나를 내걸었다.
거기에는 '보국안민(保國安民)'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군사들을 모두 불러들여 엄명을 내린다.
"앞으로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인명을 해치는 자가 있으면 목숨으로 그 죗값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 이후로 종회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한중 백성들은 성에서 나와 절하며 영접했다. 종회는 백성들을 일일히 위무하고, 장병들도 무고한 백성의 목숨과 재물을 범하지 않았다.
생전에 백성을 사랑했던 공명이 죽어서도 촉한의 백성들을 지켜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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