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허망하게 날려버린 기회

오토산 2022. 5. 18. 09:39

삼국지(三國志) .. (410)
허망하게 날려버린 기회

 

오주 손휴(吳主 孫休)는 손침을 비롯한 나라의 역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의 기틀을 바로 세웠다는 사실을 서신으로 적어
촉한(蜀漢) 성도(省都)로 보냈다.

 

후주 유선(後主 劉禪)은 사신을 보내어 동오의 안정을 축하했다.
동오에서는 답례로 다시 설후(薛珝)를 촉에 사신으로 보냈다.
설후는 동오로 돌아와서 황제에게 복명했다. 손휴가 설후에게 묻는다.

 

"요즘 촉의 동향은 어떠하던가?"
설후가 아뢴다.

 

"요 몇 년 간 중상시 황호(中常侍 黃皓)의 세도가 드높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공경대신들조차 황호에게 아첨하는 자가 수두둑했사옵니다.

 

조정에서는 임금에게 직언을 올리는 신하가 없고,

궁궐 밖에서는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습니다.

이른바 '연작(燕雀, 제비와 참새, 소인배를 비유함)이 득실거리니,

큰집에 불이 나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 제격이었사옵니다."
설후의 말을 듣고 손휴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한다.

 

"제갈무후가 살아있었다면

촉이 그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터인데!"

 

손휴가 남의 나라 일에 한숨 지으며 걱정하는 것에는 다 까닭이 있었다.
지금 동오의 형세로는 단독으로 위나라의 침공을 막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지키려면 촉과 손을 잡고 힘을 합쳐야만 했다. 

 

그리하여 손휴는 서신을 적어 사신을 다시 촉으로 보냈다. 
위의 사마소가 가까운 시일 내에 제 주인의 자리를 빼앗고나면

위나라 백성들의 민심이 심하게 동요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마소는

백성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큰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사마소의 보여주기식 전쟁에 오와 촉이 당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방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오와 촉은 오랜기간 믿음으로 동맹을 맺어왔습니다.
그 믿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각기 준비태세를 잘 갖추었다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면 힘을 모읍시다.
강유는 동오의 손휴로부터 함께 싸우자는 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후주에게 재출병할 뜻을 담은 표문을 올렸다.
후주 유선은 강유의 청을 허락하였다.

 

황제의 윤허를 받아낸 강유는 즉시 장군들을 소집했다.
때는 경요(景耀) 원년 겨울이었다.
대장군 강유는 요화(寥化), 장익(張翼)을 선봉으로 삼고,

왕함(王含), 장빈(蔣斌)을 좌군으로, 장서(蔣舒), 부첨(傅僉)을 우군으로,

호제(胡濟)를 후군으로 삼았다.

 

자신은 하후패(夏侯覇)와 더불어 중군을 이끌기로 하고,

모두 이십만 대군을 일으켰다.
강유가 하후패에게 묻는다.

 

"어디를 먼저 치는 것이 좋겠소?"

 

"아무래도 기산(祁山)이 아니겠습니까.

기산이야말로 진격하기에 알맞은 곳입니다.

지난날에 제갈승상께서 여섯번이나

기산으로 나가신 것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곳으로 나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강유는 하후패의 말에 따라 삼군을 거느리고 기산으로 출진했다.
그리고 골짜기 어귀에 이르러 그곳에 영채를 세웠다.

 

그 무렵,

등애도 기산에 머물고 있었다.
등애가 수비군 영채에서 농우(隴右)의 군사들을 점검하고 있는데,

정탐꾼이 급하게 달려와서 등애에게 보고한다.

 

"촉군이 기산 계곡에 침입하여

골짜기 어귀에 영채를 세 군데나 설치해 놓았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등애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그저 하던 일을 멈추고 높은 곳에 올라가더니

촉군의 영채가 있는 쪽을 살펴보고 내려왔다.

그리고 영채의 장막 안으로 들어오더니 함박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역시나

내 예측 안에서 움직이는구나!"

 

사연은 이랬다.
등애는 언젠가 강유가 이끄는 촉군이

다시 기산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기산의 지형을 조사하고

촉군이 영채를 세우고 싶어할 만한 자리를 봐두었다.

 

그리고 아군의 기산 영채에서부터

촉군의 영채가 들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곳까지 땅굴을 깊게 파놓았다.
준비를 다 해놓은 등애는 이제 촉군이 기산에 침입해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등애의 입장에서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강유가 설치한 영채는 세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위군의 땅굴은 촉군의 왼쪽 영채 밑으로나 있었다.
그곳은 왕함과 장빈이 본영을 설치한 곳이었다.
등애는 아들 등충(鄧忠)과 사찬(師纂)을 불러다 명령을 내린다.

 

"각자에게 군사 일만씩을 줄테니

그들을 이끌고 좌우에서 돌격하라."
이어서 부장 정륜(副將 鄭倫)을 불러 명한다.

 

"땅굴을 팠던 군사 오백을 거느리고

오늘밤 이경에 땅굴을 통해 진격하라.
땅굴 밖으로 나가면 바로 촉군의 왼쪽 영채에 이를 것이다.
그대로 밀고 나가 기습하라."

명령을 받은 장군들은 기습할 채비를 갖추었다.

 

한편,

촉의 좌군장 왕함과 장빈은

밤이 깊도록 영채를 완전히 세우지 못했다.
방어시설이 부실한 틈을 타서 위군의 야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장병들에게는 모두 갑옷을 입고 무장한 채로

잠자리에 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밤 중 이경 무렵이 지나자 왼쪽 영채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왕함과 장빈은 재빨리 일어나 무기를 잡아들고 말에 올랐다.
두 장수가 영채 문 앞에 이르러서 밖을 보니,

등충과 사찬이 군사를 잔뜩 이끌고 와서는

좌우 양면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또 영채 안에서는 어디로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적군이 침투하여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왕함과 장빈이 죽기를 각오하고 대적했지만

안팎의 협공이 맹렬한 탓에 마침내 영채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유는 중군 영채 장막 안에 있다가 왼쪽 영채에서 이는 소란을 듣고

적이 안팎으로 들이닥쳤음을 알아챘다.
급히 말에 올라 중군 장병들을 집결시키고 명령한다.

 

"경거망동하는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

적군이 목책 가까이로 접근해 오거든 무얼 물을 것도 없이 활을 쏘아라."

 

그리고 이어서 오른쪽 영채에도 사람을 보내 같은 명령을 전달했다. 
위군은 십여 차례나 습격을 해왔다.

 

그러나 번번히 촉군 궁노수들이 쏘아대는 화살에

위군은 도저히 촉군의 영채에 진입할 수가 없었다.
위군은 습격을 계속 시도했지만 날이 밝도록

촉군 영채로 진입하는 것에 성공한 위군은 없었다.
그리하여 등애는 군사들을 철수시켜 자신들의 영채로 돌아왔다.
등애가 탄식하며 말한다.

 

"강유는 제갈공명의 병법을 깊이 체득했구나!

야습을 받고도 놀라지 않고, 안팎의 변고에도 장수들의 동요가 없다니,

강유야말로 참으로 뛰어난 장수로다!"

 

이튿날,

달아났던 왕함과 장빈이 패잔병들을 이끌고 강유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죄를 청했다.
강유는 두 장수에게 다가가 둘을 일으키며 말한다.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다.
지형을 잘 살피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그리고 두 장수에게 다시 군사를 주면서 영채를 다시 세울 것과

전사자들의 시체를 땅굴에 잘 묻어줄 것을 명하였다.
장막으로 돌아온 강유는 등애에게 도전장을 보냈다.
다음날 정식으로 싸우자는 강유의 요구를 등애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음날,

양쪽의 군사는 기산 앞 벌판에 포진했다.
강유는 제갈무후의 팔진법(八陣法)에 따라 천지(天地), 풍운(風雲),

조사(鳥蛇), 용호(龍虎)의 형상으로 진을 펼쳤다.
등애가 말을 달려나와 강유가 펴놓은 진을 보더니,

자기도 같은 팔진을 폈다.

 

강유가 창을 휘두르며

말을 휘몰아 달려나와서 등애에게 외친다.

 

"내 팔진을 그대로 흉내냈구나!
헌데 그 진법을 변화시킬 줄은 아는 것이냐?"
등애는 껄껄 웃으며 응대한다.

 

"설마 팔진법은 너 혼자 쓸 수 있는 줄 아는 것이냐?
내가 진을 펼쳤는데

변화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느냐?"

 

등애는 말을 마치더니 즉시 말을 돌려 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집법관(執法官)에게 명령을 내린다.

 

"좌우 초요기(招搖旗)를 휘둘러라!"

 

집법관이 깃발을 힘차게 휘두르니,

그것을 신호로 여덟 개의 진형이 팔팔이 육십사,

예순여섯 개의 진문으로 변화한다.
등애가 다시 강유 앞으로 나와 소리친다.

 

"내 진법 변화가 어떠냐?"

 

"비록 잘못된 곳은 없지만,

그 진형으로 나의 팔진을 포위할 수 있겠느냐?"
강유가 응수하자 등애는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못할 게 뭐 있겠느냐!"

 

양쪽 군은 제각기 대오를 정렬하여 진격했다.

등애는 중군에 자리를 잡고 군을 총 지휘했다.

양쪽 군사가 서로 돌격하는 가운데에서도

진형과 대오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위군 진영에서 좌우 양쪽 날개가

포위망을 쳐서 밀려들어오자 강유가 기를 한 번 휘두른다.

 

그러자 촉군의 진형이 순식간에

장사권지진(長蛇捲地陣,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양의 진)으로 변하더니

등애의 중군을 겹겹이 에워싸기 시작한다.

 

촉군이 압박해오며 내지르는 함성소리에

위군 장병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한다.
등애 또한 처음 보는 진법이라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촉군의 올가미는 적을 점점 좁혀 들어간다.

등애는 장수들을 거느리고 포위망을 뚫어보려 하였으나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다. 

 

"등애는 항복하라!"
촉군의 소리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등애는 혼자 탄식한다.

 

"내가 내 재주를 뽐내보려다

강유의 계책에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구나!"

 

등애가 진을 뚫고나가기를 거의 포기할 무렵,

서북쪽 모퉁이에서 한무리의 군사가 탄탄한 진을 깨치며 쇄도해온다.
등애가 보니 아군의 지원군이었다.

 

등애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포위망을 공격하여 진을 뚫고 나갈 수 있었다.
등애를 구출하러 온 것은 바로 사마망(司馬望)의 군대였다.
등애는 목숨은 건졌으나 기산의 아홉 영채는

모조리 촉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등애는 패잔병을 이끌고

위수(渭水) 남쪽으로 물러나 그곳에 영채를 다시 세웠다.
그러고나서야 등애가 사마망에게 묻는다.

 

"공은 그 진법을 어떻게 알고

나를 구출하신 거요?"

사마망이 대답한다.

 

"내가 젊을 적에 형남(荊南) 땅에서 공부하던 중에

최주평(崔州平)·석광원(石廣元, 공명이 초려에 있던 시절의 친구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때 이 진법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소.
오늘 강유가 변화시켰던 진은 장사권 지진이라는 것인데,

내가 다른 방향에서 그 진을 깨고자 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오.
나는 진형의 머리가 서북쪽에 있길래 그쪽을 공격한 것이오.

 

그 진형은 머리가 위태로워지면

다른 곳은 스스로 무너지기 때문에 머리를 공격해야 하오."
등애는 진심으로 사마망에게 사례하며 말한다.

 

"나도 진법을 배우기는 했으나

그 변화를 깊게 알지 못했소.

 

사마 공께서는 그 진법을 잘 알고 계시니

내일 그 진법으로 잃은 영채를 되찾을 수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리오."

 

"내가 익힌 정도로

강유를 깨칠 수 있을지 모르겠소."

 

"내일 공이 강유와 진법 대결을 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은밀히 기산 뒤로 돌아가 습격하겠소.
양군이 혼란한 틈을 타서 우리 영채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오."

 

사마망은 등애의 구체적인 계책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등애는 강유에게 다음날

진법을 대결하자는 도전장을 보냈다.

 

그리고 정륜을 선봉장으로 삼고,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어 기산 배후로 출동했다.
강유는 도전장을 들고 온 위군 전령에게 도전에 응하겠다는 답신을 주어

돌려보내고 나서 모든 장수들을 불러모아 말한다.

 

"제갈무후께서 내게 남기신 비서(秘書)에는

이 진을 변화시키는 법으로 삼백육십다섯 가지가 적혀 있소.
이는 천체가 한바퀴 도는 것에 따른 것이오.

 

등애가 진법으로 나와 겨루겠다는 것은

반문농부(班門弄斧, 노나라의 명공(名工) 반수 앞에서 도끼질한다는 뜻.

분수도 모르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 앞에서

함부로 재주를 부리는 것을 이르는 말.)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 틀림없소.
필시 속임수가 있을 것인데 그대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소?"
선봉장 요화가 대답한다.

 

"진법 대결로 우리를 붙잡아놓고 실은 기산 뒤로 군사들을 진격시켜

우리 뒤를 습격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강유가 빙그레 웃더니 말한다.

 

"그대 생각이 내 생각이오.
기산 뒤에 매복을 해야겠소."

 

강유는 즉시 장익과 요화에게 각자 군사 일만을 내어주고

기산 뒤로 돌아가서 매복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튿날,

강유는 아홉 개의 영채에 있는 군사들을 모조리 이끌고

기산 앞으로 나와 포진했다.

 

사마망도 군사들을 이끌고 위수 남쪽을 떠나 기산 앞에 도착했다.
사마망이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서며 강유에게 외친다.

 

"적장 강유는 이리 나와서 재주를 겨뤄 보자!"
강유가 전열 앞으로 나오며 말한다.

 

"패군한 대장이 나하고 진법을 겨루겠다는 것이냐?
우습구나. 어쨌든 나왔으니 네가 먼저 진을 펼쳐 보아라."

 

사마망은 깃발을 흔들어 팔괘진을 펼쳤다.

강유가 그 모습을 보더니 비웃으며 말한다.

 

"뭐 대단한 것이라도 들고 왔을 줄 알았더니

그것은 어제 내가 펴보인 팔진법이 아니냐?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을 보니 네 재주가 어디까지인지 알만하다."
사마망이 발끈하여 답한다.

 

"너 또한 남의 진법을 훔쳐 쓰는 주제에 말이 많구나."

 

"그렇다면 너는 이 진의 변화가

몇 가지인지 아느냐?"
강유의 물음에 사마망은 웃으며 곧장 답한다.

 

"내가 그 변화를 모르고 진을 펼쳤겠는가?

구구는 팔십일, 여든하나로 변화하지 않느냐."
강유 또한 웃으며 받아친다.

 

"그럼 어디 네 재주를 한 번 보자.
진을 변화시켜 보아라."

 

사마망이 진으로 들어가서

몇 가지 변화를 보여주더니 다시 나와 외친다.

 

"너는 내가 방금 보인 진을 알기나 하느냐?"
강유가 피식 웃더니 대답한다.

 

"나의 진법은

주천수(周天數, 천체가 한바퀴 도는 것)에 따라

삼백육십다섯 가지로 변화한다.

너 따위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가

그 현묘한 이치를 알 턱이 없겠지."

 

사마망이 촉군의 진형을 바라보니,

과연 자신이 전혀 모르는 진형이었다.

 

하지만 아군 장병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수는 없어서 허세를 부리며 말한다.

 

"일주천의 변화?
난 그 말을 못 믿겠으니 어디 직접 한 번 변화시켜 보아라."
위군의 계략을 예상하고 있던 강유는 느긋하게 말한다.

 

"너 말고 등애보고 나오라고 해라.

난 등애가 보는 앞에서 진을 펴보이겠다."
사마망을 당황하여 황급히 둘러댔다.

 

"등애 장군은 전술에 능통할 뿐,

진법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사마망의 말을 듣더니 강유는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하하하하하!
그 전술이라는 것이 이것이냐?
어디서 진법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배워 온 너를 앞세워 놓고

등애 저는 기산 뒤로 돌아와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

 

작전을 꿰뚫고 있는 강유의 말에 깜짝 놀란 사마망은

즉시 군사들을 휘몰아 싸움을 벌이려 했다.
그때 강유가 채찍 든 손을 번쩍 들어올리자
촉 진영의 양 날개에 있던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위군을 마구 무찔렀다.

 

기세에 놀란 위군은

무기를 내던지고 갑옷마저 벗어던지고 제각기 살 길을 찾아서 달아났다.
기산 배후로 향하는 등애는 선봉장 정륜을 독촉하여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다.
정륜이 산 모퉁이를 막 돌아나갔을 때였다.

 

느닷없이 포소리가 터지고 북소리와 뿔피리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리더니

숨어있던 촉군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촉에서 제일 앞에 선 장수는 요화였다.
요화와 정륜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서로를 향해 돌격했다.

 

두 장수의 말이 스치듯 지나간 순간

정륜의 머리가 바닥으로 그대로 떨어졌다.

요화가 한 번 휘두른 칼날이 정륜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 것이었다.
선봉장이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본 등애는 바로 군사들을 물리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장익이 군사들을 이끌고 쇄도하여

요화의 군사들과 협공해오니 퇴로를 찾기 쉽지 않았다.
결국 이 싸움에서 위군은 크게 패했다.

 

등애는 겨우 목숨만 챙겨서 적을 뚫고 나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에 화살이 네 대나 박혀 있었다.
등애가 위수 남쪽에 있는 영채로 돌아왔을 때에는

강유와 진법 대결을 펼쳤던 사마망 또한 이미 패전하고 돌아와 있었다.
등애와 사마망은 다시 촉군을 칠 방법을 상의했다.
사마망이 계책을 내놓는다.

 

"요즘 촉주 유선은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 지내면서

환관 황호를 가까이에 두고 총애한다고 하오.
이런 상황에서는 반간계(反間計, 적을 이간질하는 계책)가 제격 아니겠소?
강유를 성도로 불러들이게 하면 우리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오."

 

등애는 사마망의 말이 옳다고 여겨

즉시 모사(謀士)들을 불러들여 물었다.

 

"촉에 가서 황호와 내통해야한다.
누가 가겠는가?"
등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나선다.

 

"제가 가겠습니다."
대답이 나온 쪽을 바라보니 양양(襄陽) 출신의 당균(黨均)이었다.
등애는 흐뭇해하며 당균에게 금은보화를 갖추어

성도로 떠날 것을 명하였다.

 

성도에 잠입한 당균은

연줄을 이용하여 황호를 만나 금은보화를 안기며 부탁의 말을 했다.
재물에 매수당한 황호는

당균이 시키는대로 도성과 조정 안팎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유언비어는 강유가 황제를 원망하여

곧 위나라에 투항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황호는 자신이 낸 소문을 마치 백성들의 공론인 것처럼 후주에게 아뢰었다.
어리석은 후주는 사마의의 반간계에 속아 공명을 불러들였던 그 때처럼

강유를 성도로 불러들이라는 칙명을 내리고야 말았다. 

 

강유는 성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위군을 격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유가 계속 싸움을 걸어도 등애는 그에 응하지 않고 방어에만 주력했다.
강유가 적이 왜 방어만 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성도에서 칙사가 도착했다.

 

칙사가 가져온 칙령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 이유는 적혀 있지 않고

단지 서둘러 입조하라는 후주의 소환령만 적혀 있었다. 
강유는 영문도 모르고 철수할 준비를 시작했다.
강유가 퇴군 명령을 내리는데,

요화가 말한다.

 

"병법에 '장수가 전장에 나가 있으면

임금의 명이라도 받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將在軍君命有所不受]'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비록 어명이 내려졌으나 지금처럼
다 이겨 놓은 싸움에서 군사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곁에 있던 장익이 요화의 말을 듣고 말한다.

 

"대장군의 뜻에 따라 해마다 군사들을 동원했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우선 이 정도의 승리에 만족하고 군사들을 거두어 민심을 안정시킨 후에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화는 장익의 말에 답답함에 가슴을 쳤지만

강유는 군사들을 철수하기로 했다.

 

강유가 각 부대의 대오를 정연하게 갖추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요화와 장익은 뒤에서 등애의 추격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등애가 자신이 설계한 계략에 빠져 강유의 군사가

물러가기로 결정한 것을 알고 강유군의 뒤를 쫓았다.

 

멀찍이 촉군이 물러가는 모습을 본 등애는 추격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갑자기 추격 중단 명령을 내리자 여러 장수들이 등애에게 이유를 물었다.
등애는 촉군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기 물러가는 모습을 보아라.
기치가 질서 정연하고 인마도 침착하게 서서히 물러가고 있지 않느냐.
강유는 과연 제갈무후의 병법을 깊이 체득하고 있다."

 

등애의 말에 따르던 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산 영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도로 돌아간 강유는 바로 후주를 뵙고 자신을 불러들인 까닭을 여쭈었다.
후주 유선이 대답한다.

 

"짐은 경이 변방에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군사들이 그곳에서 고생하고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철수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오.

다른 이유는 없었소."

 

황제의 대답을 들은 강유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후주에게 말한다.

 

"신은 이미 기산에서 위군의 영채를 얻었고,

등애의 군대를 격파하여 마지막 공을 세우려던 참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중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등애의 반간계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강유의 말을 듣고 후주는 묵묵부답이다.

강유는 계속 말을 잇는다.

 

"신은 맹세코 역적의 나라를 무찔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소인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옵고,

신을 의심하지 마시옵소서."

 

후주는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한참을 말이 없다가 강유를 바라보며 말한다.

 

"짐은 결코 경을 의심하지 않소.
한중으로 돌아가 위나라에 변이 생기거든 다시 출정하시오."

 

"네. 알겠사옵니다."
강유는 어전에서 물러나와 길게 탄식하고는 한중 땅으로 돌아갔다. 

 

411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