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천운(天運)의 순환(循環)

오토산 2022. 5. 31. 07:46

삼국지(三國志) .. (417)
천운(天運)의 순환(循環)

종회, 강유의 반란과

이를 저지하려는 위군의 싸움으로 죽은 자가 수백이 넘었다.
쌓여있는 시체가 궁궐 담 밖에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감군 위관(衛瓘)이 남은 군사들에게 명한다.

 

"모든 군사는 각자의 영채로 돌아가서

왕명이 내릴 때까지 대기하라."

 

하지만 일부 장병들은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보복을 멈추지 않았다.
원수를 갚는다며 자결한 강유의 시체를 찾아다가 그 배를 갈랐다.
놀랍게도 강유의 뱃속에서 나온 쓸개는 달걀만큼이나 컸다.
강유의 배를 갈랐던 그 무리들은 이번에는 강유의 가족들을 모두 찾아내어 몰살했다.

등애의 부하들은 종회와 강유가 죽는 것을 보고

등애 부자가 실려가고 있는 함거의 뒤를 쫓았다.
등애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이 소식은 금세 위관에게 전해졌다.
위관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등애 부자를 잡은 것이 바로 나다.
그들이 목숨을 건지는 날이면 나는 죽어서 묻힐 땅도 없을 것이다."

곁에 있던 호군 전속(護軍 田續)이 위관의 말을 듣고 말한다.

 

"강유성(江油城)을 공격할 때,

등애가 저를 죽이려 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장수들이 말려서 겨우 목숨을 건진 적이 있습니다.
그 원한이 사무쳤는데 오늘이 그 한을 풀 때인가 봅니다."

 

전속이 스스로 앞으로 나서자 위관은 기뻐하며

군사 오백을 주어 등애의 뒤를 쫓도록 했다.
전속과 그의 군사가 면죽땅에 이르러서 보니,

등애 부자는 이미 부하들의 도움으로 함거에서 빠져나와

성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등애는 달려온 전속이 자기 편인 줄로만 믿고

싸울 태세는 전혀 갖추지 않았다.
등애가 전속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물으려는데

전속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나와 등애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군사들이 어지러이 흩어지는 가운데

등애의 아들 등충 역시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강유의 죽음 이후로 다른 촉의 장수들도 차례로 생을 마감했다.
백전노장 장익(張翼)이 어지러이 싸우는 중에 죽었고,

태자 유선(劉璇)과 관운장의 후손 한수정후 관이(漢壽亭侯 關彝)도 위군에게 잡혀서 죽었다.
큰 혼란 속에서 성도의 군민들이 서로 싸우고 짓밟히는 동안

죽고 다친 사람의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열흘 정도가 지나서야 가충(賈充)이 성도에 와서

방문(榜文)을 내걸어 동요하던 민심을 잠재웠다.

 

그리고 위관으로 하여금 성도에 남아 그곳을 지키게 하고,

폐주 유선(廢主 劉禪)을 낙양으로 압송했다.
낙양으로 가는 유선을 따르는 촉의 옛 신하는

상서 번건(尙書 樊建), 시중 장소(侍中 張紹),

광록대부 초주(光祿大夫 譙周), 비서랑 극정(秘書郞 郤正) 정도였다.

 

요화(寥化), 동궐(董厥)은 병을 핑계 삼아 따라가지 않았는데,

후에 모두 울화병으로 죽었다. 
이때 위는 경원(景元) 5년(264)을 함희(咸熙) 원년으로 개원했다.

오나라 장수 정봉(丁奉)은 수춘성을 공략하던 중,

촉이 이미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중서승 화핵(中書丞 華覈)이 오주 손휴(吳主 孫休)에게 아뢴다.

 

"우리나라와 촉은 입술과 이 같은 관계였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인데[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져 버렸으니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해야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사마소가 오를 칠 날이 머지 않은 듯 하옵니다." 

 

손휴는 화핵의 제안에 따랐다.
육손(陸遜)의 아들 육항(陸抗)을

진동대장군 영형주목(鎭東大將軍 領荊州牧)으로 삼아

강어귀를 지키게 하고,
좌장군 손이(左將軍 孫異)에게 남서(南徐)각 군의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장강(長江) 유역에

수백 개의 영채를 세워 군사들을 주둔하게 하고,

노장 정봉에게 총 지휘를 맡겨 위의 침략을 대비하게 했다.

촉의 건녕 태수 곽익(建寧 太守 霍弋)은

성도 함락 소식에 상복을 입고 서쪽을 향해 사흘을 통곡했다.

곽익 수하의 여러 장수들이 곽익을 찾아가 묻는다.

 

"군주가 대위(大位)를 잃었는데

왜 속히 항복하지 않으십니까?"
곽익은 눈물을 그치지 않고 대답한다.

 

"길이 끊어져서 우리 주군의 안위를 모르는데

내가 어찌 벌써 거취를 결정하겠는가?
위주가 우리 주군을 예로써 대한다면
나도 성을 내놓고 항복하겠지만,
우리 주군에게 해를 끼치고 욕을 보인다면

나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옛 말에도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을 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곽익의 대답에 장수들도 모두 수긍했다.

낙양에 사람을 보내 후주 유선의 안위를 알아오도록 했다.

한편 낙양으로 압송된 후주 유선은

사마소 앞에 끌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마소가 유선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호통을 친다.

 

"공은 황음무도하여 어진 신하를 내쫓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실패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유선은 사마소의 호통에 안색이 납빛으로 변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모여 있던 문무관원들이 사마소에게 아뢴다.

 

"촉주(蜀主)는 나라의 기강을 잃었으나

속히 항복해왔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시고 귀순을 허락해 주옵소서."

 

사마소는 문무관원들의 청에 못이기는 척 유선의 귀순을 승낙했다.
그리고 유선을 안락공(安樂公)에 봉하고
집을 하사하였으며, 달마다 생활비를 주고

비단 일만 필, 시종 일백 명을 내려주었다.

 

유선의 둘째 아들 유요(劉瑤)와

촉의 신하 번건, 초주, 극정 등은 후작(侯爵)에 봉했다.

그리고 환관 황호(黃皓)에게는 능지처참형을 내렸다.
나라를 좀먹고 백성에게 해를 끼쳤다는 죄목이었다. 
건녕 태수 곽익은 유선과 촉의 신하였던 자들이

작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위나라에 항복했다. 

작위를 받은 다음날,

유선은 사마소의 부중으로 찾아가 절을 올리며 사례했다. 
사마소는 크게 잔치를 열어 유선을 극진히 대접했다.
음식과 술이 차려지는 가운데, 위나라의 노래에 위나라의 춤이 곁들여졌다.
사마소는 유선과 옛 촉 신하들의 기색을 가만히 살폈다.
촉의 신하들은 흥겨운 음악과 춤 속에서도

모두 애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유선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사마소는 이번에는 촉의 노래와 춤을 공연하도록 지시했다.
촉의 음율이 흘러나오자 촉의 신하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선만큼은 희희낙락(喜喜樂樂)이었다.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사마소가 모사 가충에게 넌지시 말한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정할 수가 있나!
설령 제갈공명이 살아있었다해도
저런 어리석은 임금을 보필하여

나라를 온전히 지키기는 어려웠을 것인데,
강유 따위가 어림이나 있었겠나?"

사마소의 말에 가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소가 유선을 돌아보고 묻는다.

 

"촉의 노래를 들으니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지는 않소?"
유선은 태연하게 답한다.

 

"이렇게 즐거운데 촉으로

가고싶은 마음이 들 까닭이 있겠습니까?"
순간 애통해하는 촉나라 신하들의 시선이 유선에게 향했다. 

 

잠시 후,

유선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자리를 나서는데

극정이 급히 복도로 따라나와 유선에게 묻는다. 
"폐하, 촉으로 가고 싶지 않느냐는

사마소의 물음에 왜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만약에 또 같은 질문을 받으면 그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선친의 무덤이 멀리 촉땅에 있으니 서쪽을 바라보면

비통한 마음이 든다고 대답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면 진공은 폐하를 촉으로 보내줄 것입니다."

 

"아...... 알았소."

 

유선은 극정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술자리로 돌아왔다.
술에 취한 사마소가 유선에게 같은 질문을 또 한다.

 

"촉이 그립지 않소?"

 

후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극정이 말한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입으로만 울음 소리가 날 뿐,
눈에서 눈물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더니 사마소가 씩 웃으며 유선에게 말한다.

 

"극정이 그렇게 대답하라 하였소?"
유선은 사실을 들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사마소의 말에 대답한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유선의 대답에 그 자리에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촉의 옛 신하들만 유선의 말에 웃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사마소는 잔치에서 관찰한 유선의 솔직한 태도를 보고

그 후로는 유선을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위의 조정 대신들은 위주 조환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 내용인즉슨,

사마소가 촉한을 평정한 것에 큰 공로가 있으니

사마소를 왕(王)으로 책봉하라는 것이었다.

 

조환은 허울 뿐인 황제고,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실권은 없다시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론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는 사마소에게

책잡힐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리하여 사마소는 진왕(晉王)에 책봉되고,
그 아비 사마의(司馬懿)에게는 선왕(宣王),

그 형 사마사(司馬師)에게는 경왕(景王)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마소의 아내 왕씨는 왕숙(王肅)의 딸로, 두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 사마염(司馬炎)은 체격이 크고 단단하며,

일어서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면 땅까지 드리웠고,

두 손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게다가 총명하고 무예가 출중했으며 담대하고 도량이 컸다.

 

둘째아들 사마유(司馬攸)는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사마소는 둘째 사마유를 특히 사랑했다.

 

형 사마사가 자식 없이 죽자

사마소는 사마유를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잇도록 했다.
사마소는 평상시에 '천하는 내 형 사마사의 것이다'라고 공언해왔다.
그래서 진왕에 오르자 형의 양아들 사마유를 세자로 세우고자 했다.

 

그러자 산도(山濤), 가충, 하증(何曾), 배수(裴秀)를

비롯한 측근의 신하들이 사마소에게 아뢴다.

 

"큰아들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내세우는 것은 예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훗날 상서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의 원인이 됩니다."

 

"큰아드님의 총명함과 뛰어난 무예 실력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의 경지를 뛰어넘었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제왕의 기품을 타고 나시어

결코 남의 신하로 계실 분이 아닙니다."

 

신하들의 간언에 사마소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자 태위 왕상(太尉 王祥)과 사공 순의(司空 荀顗)가 재차 간했다.

 

"역사적으로 봤을 떄,

형을 두고 동생을 내세워 나라가 혼란에 빠진 적이 많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다시 생각하십시오."

 

여러 신하들이 돌아가며 사마소에게

사마염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간하니,

사마소는 마침내 장자 사마염을 세자로 삼았다. 
대신 하나가 사마소에게 아뢴다.

 

"올해 초,

양무현(襄武縣)에 기인이 나타나서 '내가 백성의 왕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천하의 왕을 바꾸면 태평성대가 오리라'라고 말하며

저잣거리를 사흘 간 돌아다니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하께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전하께서는 십이면류관(十二冕旒冠)을 쓰시고 천자의 깃발을 세우며,
출입 시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하시고

 

여섯 필의 말이 끄는 금근거(金根車, 임금이 타는 수레)를 타십시오.

또, 왕비를 왕후로, 세자를 태자로 삼으십시오."

 

사마소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이윽고 사마소가 궁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먹던 음식이 목에 걸리더니 중풍(中風)이 들어 쓰러지고 말았다.

깨어나서도 말을 하지 못하고 이튿날에는 병세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왕상과 하증, 순의 등의 대신들이 궁으로 들어와 문안했다.

 

사마소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한 채

손으로 사마염을 가리키더니 그대로 죽고 말았다.

8월 신묘일(辛卯日)의 일이었다.
하증이 말한다.

 

"대권이 진왕에게 있었으니,

태자에게 진왕의 작위를 잇게 한 뒤에 장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대신들이 모두 하증의 말에 수긍하여 그날로 사마염은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진왕 사마염은 하증을 승상(丞相)에 임명하고,

사마망(司馬望)을 사도(司徒)로, 석포(石苞)를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진건(陳騫)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그리고 부친에게는 문왕(文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장례를 마치고 사마염은 가충과 배수를 궁으로 불러들여 묻는다.

 

"일찍이 조조(曹操)가 '천명(天命)이 내게 있다면

나도 주(周) 문왕처럼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다던데, 과연 그것이 사실이오?"
가충이 대답한다.

 

"조조는 대대로 한나라의 녹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역적이라고 수군거릴 것이 두려워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에는 아들 조비(曹丕)에게

'명분 상 나는 사양할테니,

네가 천자가 되어라'하는 뜻이 숨어 있던 것입니다."
사마염은 고개를 한 번 끄덕하더니 다시 묻는다.

 

"나의 부왕(父王)과 조조를 놓고 보면 어떠한가?"
가충이 대답한다.

 

"조조의 공이 천하를 덮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오나 백성들은 그 위엄을 두려워했던 것일 뿐,

은덕을 사모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 아들 조비는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역을 부과하였고,

해마다 동서로 정벌 전쟁을 일으킨 탓에

군민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선왕(宣王, 사마의)과 경왕(景王, 사마사)께서는 거듭 큰 공을 세우시고

은덕도 두루 베푸셔서 천하의 인심이 이쪽으로 쏠린 지 오래입니다.
문왕(文王, 사마소)께서도 촉을 평정하신 공이 천하를 뒤덮었으니,

어찌 조조와 같은 자와 비할 수 있겠습니까?"
가충의 말에 사마염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 조비 같은 자도 한나라의 대통을 이어받았는데,

나라고 위의 대통을 잇지 못하겠는가?"
가충과 배수가 두 번 절하더니 아뢴다.

 

"전하, 옛적에 조비가

한나라를 계승한 일을 본받아 수선대(受禪臺)를 쌓으시고,

대위에 오르시는 뜻을 천하에 널리 알리십시오."

가충과 배수의 청을 들은 사마소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튿날,

사마염은 칼을 찬 채로 궐내로 들어갔다.
위주 조환이 황망히 자리에서 내려와 사마염을 맞이했다.
사마염이 황제와 마주 앉더니 묻는다.

 

"누구 덕에 위나라 천하가 되었습니까?"
조환은 시선을 한 군데 두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대답한다.

 

"모두 진왕의 부친과 조부의 덕이오."
사마소가 큰 소리로 껄껄 웃더니 말한다.

 

"내가 보기에 폐하께서는

문(文)으로는 도(道)를 논할 수준이 되지 않고,
무(武)로는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는데

어찌하여 재주와 덕을 갖춘 사람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십니까?"

 

조환은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무 대꾸도 못하고 눈만 크게 뜨고 있는 황제를 대신하여

곁에 있던 황문시랑 장절(黃門侍郞 張節)이 호통을 친다.

 

"진왕의 말은 틀렸소!

옛날 무조(武祖, 조조)께서 동쪽을 치고, 서쪽을 평정하고,
남북을 정벌하셨으니, 이 천하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오.

 

또, 지금의 황제께서는 덕이 있으시고 죄는 아무 것도 없으신데

무슨 까닭으로 남에게 양위(讓位)한단 말이오?"
사마염은 장절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며 고함을 지른다.

 

"이 사직이 누구의 것이었나!
바로 한(漢)의 것이었다!
조조가 황제를 협박하여 제후들을 호령하다가

스스로 위왕에 올라 한실을 찬탈한 것이 아니더냐?

 

나와 부친, 그리고 조부까지 우리 사마씨
삼 대는 위나라를 보위해왔다.
조씨의 능력으로 천하를 얻은 것인가?

사마씨의 힘 덕택이라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위의 천하를 계승하지 못할 이유가 무언가?"
장절이 두 주먹을 움켜주고 부르르 떨며 소리친다.

 

"그런 짓은 실로 나라를 찬탈하는 역적의 짓이다!"
사마염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한 황실의 원수를 갚겠다는데 안 될 것이 무어냐!"

 

그러더니 무사들에게 호령하여 장절을 전각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조환이 보는 앞에서 장절을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조환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마염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마염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조환은 자리에 남아있는 가충과 배수를 붙잡고 애걸하다시피하며 말한다.

 

"사태가 급박한데 짐이 어찌해야 좋겠소?"
가충이 태연하게 답한다.

 

"천수(天壽)가 이미 다했습니다.
폐하께서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사옵니다.
옛날 한 헌제(獻帝)가 그랬던 것처럼 수선대를 쌓고,

대례를 갖추어 진왕에게 선양(禪讓)하소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 위로는 천심(天心)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민심(民心)에 순응하는 길이오니

폐하에게도 보신책(保身策)이 될 것이옵니다."
조환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좋소.

그대들이 수선대를 쌓으시오."

 

위 경원(景元) 5년 12월 갑자일(甲子日), 사마소가 숨을 거둔지

넉 달째 되던 날, 위주 조환은 국새(國璽)를 받들고 수선대에 올랐다.
이어서 조환은 진왕 사마염에게 대에 올라 대례를 받게 했다.
옥새를 사마염에게 바친 조환은 대에서 내려와 관리들의 앞자리에 섰다.

 

사마염은 수선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충과 배수는 조환의 양 옆에 칼을 차고 서서

황제에게 두 번 절하고 자리에 엎드려 영을 받들라고 명했다.
가충이 조환에게 말한다.

 

"한나라 건안(建安) 25년(220)에 위가 한을 이어받은 것이

이미 사십오 년이라. 이제 위에 내렸던 하늘의 복은 그 명을 다하고,

천명이 진(晉)나라 사마씨에게 내렸도다.

 

사마씨의 공덕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니,

황제의 위(位)를 바르게 하여 위(魏)의 대통을 계승하노라.

폐주 조환(廢主 曹奐)에게는 진류왕(陳留王)의 작위를 내리니,
금용성(金墉城)에 거처하도록 하라.

 

지금 당장 떠나되,

황제의 부르심이 없는 한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노라."
조환은 울며 사례하고 바로 떠났다. 

 

사마소의 숙부인 태부 사마부(太夫 司馬孚)가

떠나는 조환의 발치에 엎드려 통곡하며 말한다.

 

"신은 위의 신하였으니

평생 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사마염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종친의 어른되는 사마부에게

안평왕(安平王)의 작위를 내렸다.

 

하지만 사마부는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물러나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사마염이 국새를 넘겨받던 그날,

문무백관은 수선대 아래에서 재배(再拜)를 올리고

산호만세(山呼萬歲, 나라의 중요한 의식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위해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것)를 불렀다.

 

사마염은 국호를 대진(大晉)으로 고쳤다.

연호는 태시(太始) 원년(265)으로 개원하고,

전국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진 황제 사마염은 사마의를 선제(宣帝)로,

백부 사마사는 경제(景帝)로,

부친 사마소는 문제(文帝)로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했다. 
이렇게 위(魏)는 멸망하고 진(晉)의 시대가 열렸다.

418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