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영천 임고서원을 다녀와서

오토산 2022. 10. 21. 19:03

영천 임고서원을 다녀와서

 

초겨울 추위로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10월 18일 08:00

안동행정동우회 회원 79명이 영천과 경주지역으로

가을 나들이를 하였다.

 

지난 2019년 10월 15일 여주지역을 찾은 이후 3년만의 나들이로

8시에 동우회 사무실앞을 출발하여 군위휴게소에 잠시 쉬었다가

10시 임고서원에 도착을 하여 해설사님들의 안내를 받았다.

 

임고서원(臨皐書院)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를 추모하기 위한 서원으로 

1553년(명종 8) 부래산에 창건하여 사서오경과 위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 현위치로 이건하여 재사액을 받았고

1871년(고종 8) 훼철되었으나

1879년(고종 16) 존영각 건립으로 영정을 봉안하였다고 전하며

1965년 복설되었고 임고서원중건성역화사업(1980~1999)이 있었고

2001년 황보인(皇甫仁)을 배향하고

2012년 충효관(강학공간)과 포은유물관(전시공간)을 준공하였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선생은 

영천 임고면 우향리에서 출생하여

성리학이 고려와 조선에 뿌리내리는데 큰역할을 하여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존승받고 있으며

고려말 이성계, 정도전 등 개국세력을 상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된 인물로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으며 충절의 시조 「丹心歌」와

포은의 어머니가 지은 「白鷺歌」가 서원앞에 전시되어 있었다.

 

서원입구에 세워진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송탑비는

전면글씨는 퇴계선생의 유묵 중에서 집자하여 새겨졌고

후면에는 숙종대왕과 영조대왕, 고종황제의 어제어필(御製御筆) 사를

각자(刻字)하여 세워져 있었고

500여년전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었을 당시 심어져서

이곳으로 옮겨 심은 높이 20m, 흉고 5,95m의 은행나무가 서 있었고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류로 분류되기도 하고 침엽수로 분류되기도 한다고 한다.

 

포은선생이 피살되었던 선죽교(善竹橋)를 그 규모 그대로 세우고 

한석봉이 쓴 돌비석도 탁본하여  그대로 세워졌으며

원래 선지교(善地橋)였으나 선생이 피살되던날 밤

다리옆에서 참대나무가 솟아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배웠다.

 

서원 흥문당(興文堂) 앞에서 포은선생의 효성에 대한 이야기와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임고서원부터 지명을 기준으로 서원명칭이 정해지기도 하였다고 하며

19살에 아버지, 29살에 어마니를 여의고 3년동안 부모님 여막을 지키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삼년상을 행하여 효도를 다하였으며

이후 상례의 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포은선생은

어린시절 안동의 개목사(흥국사)에서 10년간 독학을 하였고

1360년(24세) 초시, 복시, 전시의 三場에서 잇달아 장원급제를 하였고

퇴계선생이 지으신 상향축문에서 학문은 천인에 이르고

충정은 일월을 꿰시니 성현의 유학을 빛내고

길이 후세에 길을 열어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임고서원을 한 바퀴돌아서 포은유물관을 관람하고

친절한 안내를 하여주신 해설사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인근에 있는 포은선생의 생가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