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영천 포은선생 생가를 다녀와서

오토산 2022. 10. 22. 13:09

영천 포은선생 생가를 다녀와서

 

임고서원 탐방을 마치고 11:00 출발한 버스는 

우향리에 있는 포은선생탄생지에 도착을 하였다.

 

입구에 圃隱先生誕生地 표지석과 포은선생상이 서 있었고

중국사신으로 갔을 때 지으신 남경 入京 시와 소회를 적은 시

아들(종성과 종본)을 생각하며 지은 시

1377년 일본 사신으로 떠나며 영천 명원루(조양각)에서 지은 시와

일본에서 지으신 연작 시 등 시비와

24세손 來晶이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시던 중국 태항산에서 생산되는

홍보석(紅寶石)을 기증하여 忠義와 丹誠이 새겨진 돌비도 볼 수 있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은 

고려말 문신으로 임고면 우향리에서 출생하시고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여진족과 왜구토벌에 참여하시고 중국과 일본사신으로 수차례 다녀오셨고

개성 오부학당(五部學堂)과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워 유학진흥에 힘 썼으며

시문과 서화에도 능통하였고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으며

또 효행에 뛰어나 효자정려의 은전이 내려져 孝子里碑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태조 원년에 좌시중을 지낸 조준은 포은을 간신(姦臣)이라 표현한 글을 올렸고

정도전은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면서 포은을 깍아 내렸으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권근은 포은의 절개를 포상하여야 한다고 상소하였고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관춘추관사 익양부원군

(大匡輔國崇綠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大提學 兼 藝文館春秋館事 益ㅅ陽府院君)에

증직되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게 되었다.

 

절의지사로의 평가는 후대로 이어져

세종은 정몽주의 인물됨이 순정하고성실하여 충신의 대열에 기록함이 옳다고 하였고

문종은 정몽주의 증손에게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중종때 포은선생 사당건립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1517년(중종 12) 최치원선생 다음으로 문묘종사(文廟從祀)를 하여

역신(逆臣), 간신(姦臣)에서 절의지사(節義志士)로 평가를 받았다고 전한다.

 

포은 선생의 이름은

어머니 영천이씨 부인이 임신하였을때 난초화분을 안았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하여 몽란(夢蘭)이란 초명(初名)을 9세까지 사용하였고

어깨에 검은점 7개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있었다고 전하며

9세되던해 어머니가 물레질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검은 용이 뜰 가운데 배나무에 기어 올라 황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배를 따 먹기에

유심히 쳐다보니 용도 머리를 쳐 들고 빙그레 웃고 있어 놀라 깨어보니

몽란이가 배나무에 올라 앉아 배를 먹다가 어머니를 보며 웃고 있었다고 하여

몽용(夢龍)이라 지어 관례때까지 불렀으며

아버지의 꿈에 주공(周公)이 나타나 '나는 주공이다. 그대의 아들 몽룡은

후세에 이름을 날릴 소중한 사람이니 잘 길러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관례이후로는 이름을 몽주(夢周)로 불렀다고 전한다.

 

우리는 성임문(聖臨門)이란 출입문을 지나

광풍제월당(光風霽月堂)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생가와

영정각(影幀閣)을 돌아보고 해설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안 바닷가로 이동을 하였다.

 

이동중의 들판에는 벼가 익어가며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있었으나

지난 9월 6일 새벽 경남 거제로 상륙하여 경주,포항지역에

시간당 70~100㎜의 폭우를 쏟아부으며 내륙을 강타하였던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상처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어

 가슴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