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행사

북정 이종주선생 학술발표회를 다녀와서

오토산 2023. 6. 10. 17:22

북정 이종주선생 학술발표회를 다녀와서

 

여섯살(6)때 어금니(구치)가 난다는 의미로

구강보건의 날로 지정된 6월 9일 14:00

성균관유도회 경상북도본부 주최로 고성이씨 탑동종택에서

북정(北亭) 이종주(李宗周)선생의 학문과 문학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종택입구 법흥칠층전탑 주변에는 많은 차량이 주차를 하였고

천막이 쳐진 행사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행사가 시작되기전 뒷편에 있는 산천정사(山泉精舍)를 지나 

북정(北亭)을 찾았더니 주변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소박한 정자 옆에는 여러 비석들이 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으며

영남산에서 흐르는 계곡은 숲이 짙어져 계곡을 볼 수가 없었다.

 

북정(北亭)은 

이종주 선생이 1802년(임술 순조 2) 가을 집 뒤 백보 되는 계곡에

터를 닦아  소박하게 방과 마루 각 1칸씩 꾸며 띠풀로 지붕을 덮으니

고요하고 깊숙하며 외져 사람과 땅이 걸맞아서 북(北)으로 이름짖고

북은 가을의 방위로 만물이 북에 머무르고 곧고 굳음도 북에 있으며

머무르면 반드시 흥함이 있고 동서남쪽의 생장과 완성된 것이

북에 쌓이고 저장된다는 뜻으로 북정이라 하였으며

 

 주인이 떠난 23년 후 1840년(헌종 6)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보며

온돌방 2칸과 마루방 1칸에 가운데 계곡쪽으로 누마루 1칸을 돌출시켜

누마루 3면에 난간을 돌려 중건하니 정자는 계곡을 향해 '丁'자형으로

임청각 군자정의 축소판이라 전한다.

중건할 때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 1766~1841)은 北亭詩後小序란 글에서

북쪽 방을 혼혼(混混), 남쪽 방을 약무(若無), 대청을 허엄(虛广)이라는 것이

북정선생의 뜻에 맞는 것이라 제안하였으나

현재 정자에는 당호가 걸려있지 않았다.

 

북정을 돌아보고 내려오니 

권오주 사무처장의 사회로 행사는 시작되었으며

식전행사로 예천 전덕화님이 '적벽부'를 암송하였고

개회, 상읍례, 내빈소개, 국민의례, 문묘향배 등이 이어지고

이충섭 안동유도회장이 윤리선언문낭독을 하였다.

 

이재업 성균관유도회경상북도본부 회장님의 대회사와

최종수 성균관장님과 최영갑 성균관유도회 총본부 회장님의 격려사와

이상학 안동부시장, 김민석 경상북도정책실장, 김병일 선비문화수련원장,

정상영 경상북도향교재단이사장님의 축사로 진행되었으며

학술발표가 시작되기전  김형동 국회위원님이 깜짝 방문하여

사회대에서 축하 말씀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어서 황만기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연구교수가

'강호고사 이종주의 삶과 학문'에 대한 학술발표가 있었다.

 

북정(北亭) 이종주(李宗周 1753~1818) 선생은

자가 춘백(春伯), 호가 북정(北亭) , 본관 고성(固城)으로

고성이씨 시조는 이황(李璜)으로  순흥안씨 추원록(追遠錄)에

한(漢) 문제(文帝) 때 사람인 이반의 24대손이란 기록도 있고

만성보(萬姓譜)에 밀직부사로 철령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고려 때는 문희공 이존비, 문정공 행촌 이암, 문경공 평재 이강이

모두 덕업과 문장으로 이름나 사서(史書)에 드러나 있고

조선조에 들어서 이원(李原)은 좌의정으로 철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아들 이증(李增 영산현감)은 장인(淸湖 李暿 경상도관찰사)이

안동부 순시할 때 영호루에서 세상을 떠나 장인상을 치르기 위해

안동을 방문했다가 아름다운 산수에 마음이 빼앗겨 계유정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 정착하여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인물들

12명(안동권씨 3, 흥해배씨 4, 영양남씨 4, 안강노씨 1)과

우리나라 최초의 계모임인 우향계를 조직하여

현재까지 이어 오고 있다.

 

입향조 이증의 다섯 아들중 셋째 이명(李洺)은 임청각의 주인이고

그의 여섯 아들중 다섯째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는

무남독녀를 함재(涵齋) 서해(徐嶰)에게 출가시켜

그 외손들이 엄청난 사환(仕宦)을 이었으며

 

2대를 지나 이적(李適)이 탑동파 분파조가 되었고

또 2대를 지나이광(李洸)은 재종인 분(蕡)의 아들 후식(後植)을 후사로 삼아

여섯째 아들 이시항(李時沆 북정의 고조)은 무신란에 원종훈(原從勳)에 책록,

북정의 증조 이시흥(李時興), 조부 영모당(永慕堂) 이원미(李元美)로 이어져

9세 때 입양, 아버지 이홍직(李弘直) 어머니는 영천이씨 유천(惟天)의 딸이며

생부는 이홍재(李弘載)이고 생모는 밀양박씨 진기(震紀)의 딸이라 한다.

 

북정선생은 

어려서부터 한 번 본 글은 바로 외울 정도로 기량이 뛰어 났고

장성한 뒤로 남병 정박, 대산 이상정에게 배우고 천사 김종덕에게 수학하였으며

1780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강호자연에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여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은 물론 

양한(兩漢)과 당송의 글을 익히며 주자와 퇴계의 서책에 침잠하여 송독하였으며

해은(海恩) 강필효(姜必孝 1754~1848)은 북정의 일대기를 

'有宏其器 忠厚爲德 汪汪千頃 乏彼萬斛 本之窮行 餘事文章 豈伊纂組 實維琮璜'

이라 하였다고 한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황만기 교수님의 발표도중 자리를 뜨게 되었으며

임노직 수석연구위원의 '북정 이종주의 역사의식'에 관한 발표를

듣지 못 한것을 아쉬워 하면서 두분의 학술발표집과

국역 북정선생문집, 기념타올과 케이크를 받아서 집으로 왔다.

 

오늘의 행사를 준비하신 성균관유도회 경북본부 이재업 회장님과 

먼거리를 달려오신 성균관장님,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님께 감사를 드리고

인근 시군과 안동에서 참석하신 유림분들과 참여하신 시민들께 감사를 드리며

참석하신 모든분들이 더 건강하시고 더 즐거운 나날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