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용인 처인성을 다녀와서

오토산 2023. 6. 11. 22:12

용인 처인성을 다녀와서

 

국가 추념일로 지정된 현충일인 6월 6일

오늘도 아침 05:00 출발하여 주변을 거닐며 아침 해를 맞이하고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서 10:20 처인성으로 떠났다.

 

처인성(處仁城)은

둘레 400m 흙으로 쌓은 작은 토성으로 처인부곡(處仁部曲)의 주성이었고

아곡(衙谷)마을은 처인현의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처인성에는 군창(軍倉)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인부곡(處仁部曲)은 현보다 작은 행정조직이고

고려시대 수주(水州 수원.화성.용인)에 속하는 교통요충지로

1231년(고종 18) 8월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1232년 1월 교섭으로 후퇴한 몽골군은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당시 최고집권자였던 최우(崔瑀)는 6월 17일 강화로 천도하여 항전하며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군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자

8월 천도를 명분으로 몽골군은 살리타(撤禮塔)을 총사령관으로  침공하여

10월 개경을 지나 임진강을 건너 11월 광주성(남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양주부사 이세화(李世華)가 방어하여 물리치자

12월 16일 처인으로 남하하였고

 

이 때 백현원 승려였던 김윤후(金允後)가 인근고을에서 피난 온 주민들과

승려들을 지휘하여 동문 밖에 매복하여 살리타를 활로 사살시키고

와해된 몽골군을 대파하였고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上將軍) 벼슬을 주었으나

'나는 싸울때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헛되게 많은 상을 받겠는가'하고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攝郞將) 벼슬로 고쳐 주었다고 전하며

처인성 전투는 중앙군이나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은 채 

김윤후와 부곡민들의 항쟁으로 일궈낸 대승리로

몽골군과의 전쟁에서 고려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고 전한다.

 

우리는 처인성승첩비와 도로에 새겨진 승첩도를 읽으며

처인성을 한바퀴 돌아서 처인성역사교육관으로 갔다.

 

용인처인성역사교육관은

국토교통부와 과학기술진흥원이 지원하는 도시건축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999.64㎡의 3층건물로

경간 14.4m의 한옥건물이었다.

 

교육관에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전시실을 관람하였으며

해설사님은 처인성과 몽골항쟁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1225년 1월 몽골의 사신 저여고가 고려국경에서 자객에게 피살되자

고려의 부인에도 몽골은 고려의 소행이라 판단하고 관계는 악화되어

1231년 8월~1259년까지 6차례 몽골의 침입과 고려의 저항이 이어졌고

고려는 많은 인명 손실과 국토가 유린 당했다고 한다

 

처인성전투의 승리로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하였고

1413년(태종 13) 용구현과 처인현을 통합하여 용인현이 되었으며

김윤후는 1253년 몽골 5처 침략시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지역민과 단결하여 70여일동안 막아내어 몽골군을 격퇴시켜서

대몽항쟁에서 진정한 리더이자 최고의 영웅이라 평가받고 있다.

 

1206년 징기스칸에 의해 통일된 몽골은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하여 40여국을 멸망시켰다고 기록하고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개명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길때 까지

65년간 존재하였다고 전한다.

 

처인성과 교육관에서 처인성과 처인현, 몽골전투 등에 대하여 

많은 역사적인 사실을 배우고

친절히 설명하여주신 해설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11:40 신갈고등학교 앞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를 찾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