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거경대학에서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을 다녀와서

오토산 2024. 6. 21. 21:59

거경대학에서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을 다녀와서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였다고 전하는 6월 20일

08:30 안동예술의 전당앞에서 거경대학 회원들이 

성주로 떠나서 군위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하고

10:30 세종대왕자태실에 도착, 해설사님과 함께 답사를 하였다.

 

해설사님은 태항아리 모형이 있는 주차장앞에서

성주는 참외의 고장으로 참외하우스 들녁이 성주 10경에 포함되었고

참외농가에서는 1년에 세차례의 참외농사로 8~9월을 제외한

10개월을 비닐하우스 안에서 살아가며 참외농사를 짓고 있으며

지난해는 인삼을 능가하는 판매액을 올렸다며 성주를 소개하였고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때

아기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그 태(胎)를 씻어서 태항아리에 담아 절차에 따라

명당을 찾아 봉안하는 장태(藏胎)의식을 하여 왔으며

사찰의 부도탑과 달리 지기(地氣)를 느낄수 있도록 하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단석 아래에 깊이 묻었다고 전하며

장태의식은 고려이전부터 조선후기 까지 이어져 왔다고 하였다.

 

옛날 우리 어머님들이 태(胎)를 왕겨불로 태우던 모습을 떠 올리며

우리는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이 있는 봉우리를 올랐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소나무에 올라가서 가지치기를 하는

수목정비공사 모습도 보였다.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은 

1438년(세종 20)부터 1442년(세종 24)사이에 조성되었다고 전하고

신석산(禪石山) 줄기가 흘러내려 독봉으로 솟아 오른 봉우리에 

세종대왕의 아들 19명중 세자인 문종을 제외한 18명과

원손인 단종의 태(胎)가 봉안되어 있었다.

 

앞줄에는 소헌왕후 심씨 소생의 대군들의 태가 안장되어 

세조대왕부터 영응대군까지 7분의 대군태실이 설치되고

조금 떨어져서 앞쪽에는 원손(단종)태실이 자리하고 있어

왕위를 이을 원손을 대군들 보다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뒷줄은 빈궁들의 소생인 화의군부터 담양군까지 10분의 태실과

마지막에 군호를 받기전에 돌아가신 왕자 당(瑭)태실이란

표지석도 보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였던

왕자(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의 태실은

개첨석(蓋簷石) 윗부분(보주, 복련)이 파괴되어 있었으며

세조태실은 1462년(세조 8) 예조판서가 지은

가봉비(加封碑)가 세워저 있었다.

 

조선초기까지는 공주의 태실이 없었으나

조선 중기부터는 공주의 태실도 가끔 발견되고 있고

세종대왕은 19남 4녀를 두었으나 군호가 없는 왕자를 제외하고

18남 4녀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으며 

태실이 이렇게 집합되어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아들을 못 낳는 사람들이 태실의 비석 일부를

갈아 먹으려고 훼손시킨 부분도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해설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11:20 대흥가든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 먹으러 이동하던중

참외비닐하우스 들판에서 꿀참외를 파는 환희농장에 들려서 

세척선별기에서 노란 참외가 춤추며 선별되는 모습도 구경하고

필요하신분들은  참외를 사서 차에 싣고

12:00 대흥가든에 도착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