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아카데미에서 의성 최치원문학관을 다녀와서
고운사 답사를 마치고
16:30 우리는 고운문화공원에 있는 최치원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관을 들어서니 전시연수관과 대강당이 있었으며
전시연수관에서 학예사님이 우리를 지하전시실로 안내하여
이동을 하여서 상세한 설명을 하여 주셨다.
최치원문학관은
신라의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고운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람할때 고운사에 머물면서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으며 의성의 불교문화를 꽃피우는데 기여하여
의성군에서는 선생이 소망했던 평등과 인간존엄의 정신을 기리고
소통을 통해 민족화합괴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고귀한 정신을 나누고자 2019년 최치원문학관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선생은
신라말기 학자이자 문장가로 호는 고운, 해운이라 하였고
857년 신라 경주에서 태어났고 868년 12살때 나라의 장학생으로
당나라로 유학을 갔으며 그의 아버지는 '10년간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 하였고 고운은 '남들이 백의 노력을 하면
자신은 천의 노력을 한다(人百己千)'는 정신으로 공부하였다.
6년만인 874년 18세때 당나라 과거인 빈공사시에 급제하여
876년 선주(양주) 율수현위에 임명받았고 877년 현위에서 물러나
박학굉사과에 응시하려 하였으나 시험이 없어져 버렸으며
고병(高騈)에게 기용되어 관역순관, 서기관, 도통순관으로 승직하고
당나라 희종으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는다.
885년 17년만 신라로 귀국하여 한림학사, 지서서감을 제수받아
894년 진성여왕에게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시무십여조'를 올려
아찬에 올랐을뿐 뜻을 펼칠 수 없어 벼슬을 그만두고
고운사에 지내면서 전국을 떠 돌았다고 전한다.
898년 가족을 데리고 해인사로 가서 병도 다스리고 난리도 피하여
숨어 살면서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장전 등 편찬을 하였고
'하루 아침 일찍 일어나 문밖을 나왔는데 갓과 신은 숲속에 버려두고
간 곳을 몰랐다'라는 어록이 신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으며
그 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전한다.
고운선생은
그 시대의 모든책을 읽고 유교, 불교, 도교를 깨달은 사람으로
자기의 마음을 담은 시(詩)와 신라를 위한 공식문서에서
쓰고 싶은 뜻을 글로 써 펼쳤으며
또 서예는 독특한 서체로
전서(篆書)는 우전체의 각체를 띠어 활달하면서도 힘이 있었고
해서(楷書)는 구양순체를 사용하여 간결하고 정직한 느낌이 있으며
경쾌한 파(派)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고운선생은 당나라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동안 큰 끼쁨을 주었던 인생사희(人生四喜)의
七年大旱得甘雨 칠년동안 기나긴 가믐끝에 단비가 내렸을 때
千里他鄕逢古人 천리타향 머나 먼 곳에서 고향사람을 만났을 때
無月洞房華燭夜 달도 없는 어두운 밤 방안에 촟불을 밝혔을 때
少年登揭名時 소년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올려질 때
詩를 생각하며 전시관을 나오니
의성미협회원들이 '뜬 구름전' 전시회를 12월 31일까지 열고 있었다.
우리는 전시회를 돌아보고
전시관에서 고운 최치원선생의 학문과 일생에 대하여
친절하게 설명을 하여주신 학예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17:10 안동으로 출발하여 출발지인 안동시청에서 헤어졌다.
오늘의 답사를 준비하신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분들과
함께하신 모든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10월에는 더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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