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있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묘소 참배.
나는 안동에 살면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묘소를 처음 참배했다.
학봉 묘소가 자리잡고 있는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앞
국도를 수 없이 지나 다녔지만 묘소에 참배할 기회가
한번도 없어서 그냥 지나쳐 버렸다.
오늘 25일 때마침 영남예술대학 이진구 학장과
이 과장 등 세사람이 볼일을 마치고 이곳을 통과할
즈음 이 학장이 묘소를 들리자고 해서 들렸다.
우리들은 차를 타고 가면서 유명한 문중의 묘소를
가끔 들려 참배를 하곤 한다.
이날 학봉 묘소의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자 입구에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학봉 신도비(鶴峰
神道碑) 및 묘방석(墓榜石) 안내판과 표지석이
보인다.
신도비는 화강암을 거북 모양으로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비신의 크기는 높이 213cm, 너비 108cm,
두께 37cm이며 묘방석은 무덤을 조성 할 때 나온
큰 바위로서 흔치않은 특이한 형태로 묘비를 대신하고
있다.
학봉 김성일(1538 - 1593)의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의성(義城).
증조부는 김만근(金萬謹), 조부는 김예범(金禮範),
아버지는 김진(金璡), 어머니는 민세경(閔世卿)의 따님
여흥민씨, 배위는 권덕황(權德凰)의 따님 안동권씨이다.
학봉은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여 나주목사,
대사성, 형조참의를 거쳐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순찰사를 겸 하였다.
그는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가가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병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류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모았고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되었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抗倭戰)를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어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고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신도비 및 묘방석 표지석이 서있다.
신도비각(神道碑閣).
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안내판.
안내판.
높이 213cm, 너비 108cm의 신도비가 비각안에 있다.
학봉 김성일 묘 전경.
묘방석 표제.
묘방석 전체 돌아가면서 글씨를 다 새겨 놓았다.
학봉 묘소에 참배를 마친 이 학장과 이 과장.
뒷면에서 바라본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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