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의 마을 이야기] 오미리... 봉황처럼 날아오른 오미마을
[출처] 디지털 안동문화대전
마을 입구 비보림
역사와 유적으로 보는 오미마을
1.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두루 갖추다
풍수지리적 시각에서 보면, 오미리는 태백산의 지맥을 이어받은 동쪽의 아미산(峨眉山)을 청룡, 서쪽의 도인산(道仁山)을 백호, 남쪽의 검무산(劍舞山)을 주작, 학가산의 한 갈래가 구불구불 수십 리를 남으로 뻗어 내리면서 솟은 북쪽의 죽자봉(竹子峰)을 현무로 하고 있다.
아미산 도인산
검무산 죽자봉
특히 안산(案山) 역할을 하는 거무산(일명 검무산)의 자태는 밑변이 편편하고 넓은 삼각산의 형상을 취하고 있어 안정감을 더해 주는데, 이런 점에서 오미리의 터전은 사방신(四方神)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최고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오미리는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이 입지하기에 좋은 자연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쪽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도인산을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부르는데,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봉우리가 그리 높지 않아 바람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문인(文人) 배출과 직결되는 문필봉은 집성촌락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풍수지리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마을 사람들은 허한 문필봉을 보완할 목적으로 서쪽 뒤편에 느티나무 숲을 조성했으며, 또 마을 입구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은 자연적 입지조건뿐만 아니라 조림을 통한 비보풍수로써 명당을 마련했다고 믿고 있다.
오미리의 풍수형국을 ‘소쿠리형’ 혹은 ‘포란형(抱卵形)’이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외부에서 들여다봤을 때는 마을이 보이지 않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마을사람들은 “참 오붓한 터다.”고 표현한다. 즉 소쿠리가 마을을 감싸듯, 또 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오붓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풍수지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큰길에서는 마을의 생김새를 좀처럼 파악할 수 없으나 마을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마치 ‘소그릇’처럼 평평하고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과연 명당의 자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2. 내기장기로 차지한 대지산 명당
오미리의 지명유래는 마을 진입로에 서 있는 오미마을표지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즉 원래는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으나, 허백당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릉동을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다고 한다.
‘능(陵)’이란 글자가 언덕을 일컫기도 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무(畝)’ 자를 넣어 오무(五畝)로 했던 것이다. 그 후 김의정의 손자 유연당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중 5형제가 문과급제를 하자, 인조 임금이 ‘팔련오계(八蓮五桂)’라고 하여 ‘오미(五美)’라는 마을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오미’라는 이름의 유래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풍산김씨가 오미리에 터를 잡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휘손(金徽孫)으로, 그는 두 살 때 아버지 김종석(金從石)을 여의고 어머니 춘천박씨 슬하에서 자랐다. 평소 후덕한 인품으로 주위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아왔는데, 벼슬 역시 효행이 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효렴(孝廉)에 선발되어 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한양에 살고 있던 김휘손은 조부 김자순(金子純)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고향 오미리를 방문하였다.
묘소가 위치한 뒷산 너머는 예천군에 속했는데, 그곳 산음리에 미래를 예측하는 재주를 갖고 있는 대부호 박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박씨가 오미리에 잠시 머물고 있던 김휘손을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장기를 두자는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만약 제가 장기에서 지게 되면 10리쯤 되는 대지산(大枝山) 한 자락을 드리고, 그대가 패한다면 한양에서 타고 오신 흰 나귀를 주십시오.”라고 제안을 했다.
김휘손은 박씨의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듣고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판이 끝날 무렵 예천 부자 박씨는 일부러 장기를 져주고는, 가슴에 품고 있던 한 폭의 산도(山圖)를 김휘손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지도에 표시된 땅이 바로 그대의 것이오. 제가 살고 있는 이 산은 여러 가닥으로 이루어진 용호(龍虎)가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남향으로 갈수록 명혈(名穴)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 대를 이어서 지켜 왔으나 저희 조상들의 산소를 쓰지 않은 까닭은 이 터로 인해 큰 복을 누릴 만한 대인(大人)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가 여러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고 겪었지만 일찍이 그대와 같은 훌륭한 품성을 가진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터의 주인은 공이 될 듯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풍산김씨는 대지산에 조상들의 묘소를 쓰기 시작했고, 박씨의 말대로 명혈에 묏자리를 잡아서인지 팔련오계(八蓮五桂)를 비롯한 문과급제자를 대거 배출하며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사람들은 대지산 여러 자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오미리의 뒷산을 ‘장판재[將板峴], 곧 ‘장기판이 벌어졌던 고개’라고 부른단다.
3. 오미마을의 삶을 담고 있는 우물
사성정(四姓井)과 비석
풍산읍의 소재지인 안교리에는 사성정(四姓井)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다. 말 그대로 ‘4개 성씨의 우물’이라는 뜻인데, 구체적으로는 풍산을 본관으로 하는 풍산김씨와 풍산류씨, 풍산홍씨, 풍산심씨 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었다고 전한다. 이들 가운데 풍산홍씨와 풍산심씨는 이미 1백여 년 전에 풍산을 벗어나, 현재 풍산김씨와 풍산류씨만이 세거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 누가 우물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성정은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풍산 일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물을 제공해 주는 귀중한 우물이었다. 아울러 우물가에 모여 앉은 아녀자들은 서로의 마을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는 소통의 장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현재 우물에는 ‘홍정(洪井)’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1984년 풍산홍씨 측에서 자신들의 시조가 조성한 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나머지 성씨들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당시 풍산홍씨들은 우물 표면에 ‘洪井(홍정)’이라는 글자를 새겨두고는 뒤편에 비석을 세우고, “홍정(洪井)은 풍산홍씨 시조께서 8백여 년 전 이곳에 세거하실 때 일상 애용하시던 우물이다. 기간 황폐하여 옛 모습을 보존하지 못하던 중, 종친 형식(亨植, 남평공계 함열공파) 씨가 소요경비를 전담하시어 이를 복원함에 이르렀다(1984년 12월 13일, 풍산홍씨 대종회)”라는 내용의 글을 새겨 넣었다.
당시 풍산김씨와 풍산류씨의 거주지는 우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읍소재지여서 풍산홍씨 측에서 이러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단다.
풍산홍씨가 이러한 잡음을 일으킨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즉 이들 4개 성씨가 풍산에 정착할 무렵 풍산홍씨가 가장 이른 시기에 들어왔고, 또 세거지 역시 읍소재지 주변에 세거지를 마련했기에 자신들의 조상이 우물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비록 혈통은 다르지만 그 옛날 조상들이 오순도순 정을 나누면서 지켜왔던 추억의 흔적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안타까운 노릇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4. 와가(瓦家)가 즐비하게 늘어선 오미마을
여느 집성촌락이 그러하듯 오미리에도 고색창연한 와가(瓦家)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허백당(虛白堂) 종택을 비롯하여 참봉댁과 영감댁은 오미리의 위상을 드높이는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허백당 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8호로 지정된 허백당 종택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조대인 1576년에 김대현(金大賢)이 부친인 김농(金農)의 명을 받들어 지금의 영감댁 자리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것으로 전한다.
아울러 종택의 사랑채를 김대현의 조부인 김의정(金義貞)의 아호(雅號)를 따서 유경당(幽敬堂)이라는 별도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전 당시 사랑채만을 옮기고 나머지 부분은 증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종택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00년 김대현의 아들인 김봉조(金奉祖)가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허백당 종택은 정면 9칸, 측면 6칸 등 모두 30칸의 ㅁ자형을 취하고 있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전형적인 반가(班家) 형태의 가옥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안채는 1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6칸으로 방이 2칸, 누마루가 4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누마루의 기단을 높게 쌓고 팔작지붕을 올림으로써 사대부의 권위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안채로 통하는 중문 우측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사랑채를 별도로 마련해 둔 점도 사대부가로서의 웅장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택 뒤편 언덕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린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진 김대현과 현 종손의 고조부모를 비롯한 4대 조상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참봉댁
중요민속자료 제179호로 지정된 참봉댁은 1800년 무렵 김중휴(金重休)가 분가를 할 때 세운 것으로, 그가 제릉참봉을 지냈기 때문에 ‘참봉댁’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다.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재봉(金在鳳)의 생가이기도 하다.
참봉댁 곳간
참봉댁은 정면 8칸, 측면 5칸의 ㅁ자형으로 전체 20여 칸의 규모를 가진 가옥이다. 참봉댁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곳간의 위치이다. 대부분의 반가(班家) 건축에서 곳간은 외부로 공개되어 있는 데 비해 참봉댁의 경우는 곳간과 안채 사이에 쪽문을 설치하여 노출을 피하고 있다. 아울러 안방 뒤편에 곳간을 마련함으로써 안방 뒷문을 통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아마도 여성들이 사랑채를 방문한 외부 남성들을 의식하지 않고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내외(內外) 배려의 통로일 것으로 생각된다.
영감댁
‘안동풍산김씨영감댁’이란 이름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영감댁은 1759년 김상목(金相穆)이 ㄱ자형 안채 8칸을 세웠고, 이후 그의 손자 김중우(金重佑)에 이르러 ㄴ자형 사랑채가 완성되었다.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金斗欽)이 통정대부동부승지의 벼슬을 지냄으로써 ‘영감댁’이라는 택호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 김응섭(金應燮)의 생가이기도 하다.
영감댁은 정면 8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모두 27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에는 ‘학남유거(鶴南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사랑채를 완성한 김중우의 호(號)이다. 안채 뒤편에는 4대 조상들의 신주를 모셨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올린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조상들의 신주는 한국전쟁 당시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장주(藏主)한 탓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한편 불천위를 모시지 않는 사가(私家)에서 사당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감댁의 재력을 가늠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영감댁이 위치한 터는 원래 허백당 종택이 자리했던 곳으로, 오미리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장소이다. 1576년 김대현에 이르러 허백당 종택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명당을 포기하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간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할 길이 없다.
삼벽당 사랑채
마을을 빛낸 팔련오계(八蓮五桂)
1. 팔련오계의 아버지, 김대현
김대현(金大賢)은 1553년 부친 김농(金農)과 모친 안동권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서 1602년 숨을 거두었다. 호는 유연당(悠然堂)으로,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김대현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이면서 성장하였다. 당시 한양에서 살았던 그는 조선 전기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우계(牛溪) 성혼(成渾)으로부터 글을 배운 적이 있는데, 명석하고 총명해서 자주 칭찬을 듣곤 하였다. 장년이 되어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칭할 만큼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1576년, 24세 되던 해에 부친의 명을 받아 오미리의 종택을 영감댁 터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고, 또 뒷산 죽자봉(竹子峰)에 초가를 지어 ‘죽암정사(竹巖精舍)’라고 이름 짓고는 자연을 벗 삼으면서 학문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김대현은 애초부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은 삶을 추구하였다.
1582년 30세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친 채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40세가 넘어 안동과 접해 있는 영주로 옮겨가서 집을 지은 후 ‘유연당(悠然堂)’이라 이름 짓고는 자신의 호 역시 ‘죽암’에서 ‘유연당’으로 바꾸었다. 유연당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음주(飮酒)」에 나오는 “채국동리하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 꺾어 들고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네)”이라는 시구에서 취한 글자이다.
김대현은 유연당에 머물며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면서 자녀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그러는 가운데 자녀를 훈육하는 가훈(家訓)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을 사람 된 근본도리로 삼고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예법에 맞게 하고 모든 일 처리를 빈틈없이 철저히 하며 바른 도리를 실천하라.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신체를 잘 보전하고 학업에 정진하고 재능에 알맞도록 일자리를 마련하여 질투하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마라.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태도를 항상 기르고 참되고 인자한 마음으로 덕성을 길러 사람다운 행실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 아홉 가지 생각[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과 세 가지 경계[少年女色, 壯年鬪爭, 老年利慾]를 잘 지키도록 하라.
김대현은 슬하에 아들 9형제를 두었는데, 8남 김술조(金述祖)는 1611년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혼인도 하기 전인 1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8형제는 모두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그 가운데 5형제(김봉조ㆍ김영조ㆍ김연조ㆍ김응조ㆍ김숭조)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는 이들 가문을 ‘팔련오계(八蓮五桂)’라고 칭하면서, 오미(五美)라는 마을이름을 하사하였다.
또한 경상감사에게 마을 어귀에 ‘봉황려(鳳凰閭)’라는 문을 세우도록 명했는데, 현재 봉황려는 전하지 않고 유래를 적은 기념비가 서 있다. 인조가 봉황려를 마을 어귀에 세우도록 한 까닭은, 예부터 길조로 여겨 온 봉황은 새끼를 낳으면 반드시 9마리를 낳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즉 김대현의 아들 9형제를 길조인 봉황의 9마리 새끼에 비유했던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대현은 향병을 모집하여 맞서는 등, 비록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적극 임했다. 이듬해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난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영주에 위치한 자신의 집 앞에 장막을 설치하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식량을 제공하는가 하면, 천연두에 걸린 백성들을 일일이 간호하며 극진히 보살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한갓 이론에 머물지 않고 일상적 삶에서 실천을 펼치는 선비의 참된 모습이었다.
이러한 그의 덕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여러 차례 벼슬을 권유받았으나, 그때마다 응하지 않다가 1595년에는 성현도(省峴道)의 찰방으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성현도는 왜군이 쉽게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황폐화의 정도가 극히 참담한 실정이었다. 이에 김대현은 자신의 녹봉을 털면서까지 굶주린 백성들을 돌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1601년에 김대현은 산음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자신의 녹봉을 털어 허물어진 향교를 재건하여 젊은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했는가 하면, 향교 증축식을 개최하는 날 70세 이상 노인들을 초청하여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봄, 잠시 여가를 내어 고향인 오미리에 있는 조상들의 묘소에 성묘를 하고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되었다. 김대현은 스스로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는, 여러 지인에게 삶을 정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관사 뒷산에서 큰 바위 하나가 굴러내려 강물에 떨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불길한 징조라고 입을 모았는데, 며칠 후 김대현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향년 50세였다.
김대현이 산음 관사에서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인조는 이듬해인 1603년 그의 제사에 몸소 제문(祭文)을 지어 약간의 제물과 함께 내려 보냈다.
[사제문(賜祭文)]
국왕은 예조좌랑 이척연을 보내어 졸(卒) 산음 현감 증이조참판 김대현의 혼령에 제(祭)를 지내오니, 청렴으로 정사에 종사하니 백성들이 어질다고 칭찬하고. 그 덕을 후손에 물려주니 모두가 의로운 가르침을 잘 따랐도다.
두씨(竇氏)의 오룡(五龍)처럼 다섯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니, 다만 훌륭한 자제들만이 나라의 광채일 뿐 아니로다.
그 부모에게 은혜를 내리는 것은 국법에 따라 나온 바이요, 질직(秩職)은 이조참판을 내리니 이러한 대우는 태상부(太常府)에서 나옴이라. 관리를 보내어 의식을 이루게 하니 좋은 복을 내리소서
이후 김대현은 향촌 유림의 공의(公議)를 거쳐 불천위로 추대 받고, 현재 허백당 종택 사당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아들 8형제와 함께 추원사에 주향(主享)되어 있으며, 영주의 구호서원(鷗湖書院)에 배향되어 있기도 하다.
추원사
2. 팔련오계의 견인적 인물, 김봉조
김봉조(金奉祖)는 1572년 한양 장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장남, 곧 팔련오계(八蓮五桂)의 맏형으로 태어났다.
1601년 30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42세 되던 해인 1613년에 문과급제를 하였다. 김봉조는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사시 합격을 한 이듬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지어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삭망제를 지내기 위해 종택을 방문할 때 외에는 상복을 벗거나 여막을 나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부친 김대현이 세상을 뜰 때 김봉조는 31세였으며, 막내 아우 김숭조는 겨우 5세였다. 김봉조는 이 때부터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우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오미마을 팔련오계(八蓮五桂)를 배출하는 데 견인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김봉조는 류성룡(柳成龍)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지금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창건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흥미롭게도 문과급제를 하고 나서 부임한 벼슬이 단성현감이었는데, 이곳은 그 옛날 부친 김대현이 다스렸던 고을이었다. 이런 연유로 김봉조가 부임지로 길을 떠날 때 모친 전주이씨는, “단성은 너의 아버지께서 다스렸던 고을이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하여 아버지의 청덕(淸德)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단성현감으로 부임한 김봉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고달픔을 구제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 노인들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열어 시름을 달래 주기도 하였다.
양로연
벼슬로 인해 외지생활을 주로 했던 김봉조는 편지를 이용하여 자녀교육이나 집안 살림 등에 관한 훈계를 하곤 했다. 다음은 장남 김시종(金時宗)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편지가 와서 너와 아이들이 모두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위로가 되고 또 위로가 된다. 네가 열심히 글을 읽으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찌 좋은 소식이 아니랴? 그러나 시력을 해치고 또한 심신을 허비할까 두렵다. 너는 어찌 늙은 아비의 뜻을 생각지 않고 이러한 데에 마음과 몸을 수고롭게 하려고 하느냐. 배불리 먹고 편안히 지내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도 역시 대단히 옳지 않은 일이다. 모름지기 도연명과 유종원의 오언시, 이백과 두보의 장편 및 주렴계와 정호ㆍ정이 등 여러 사람의 시를 읽되 시간을 정하여 많이 읽으려고 욕심내지 말고 매일 두어 편을 읽어 때때로 읊조린다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눈병을 다스리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지는 않겠느냐?
아들의 편지를 읽고는 객지생활에 더없는 위로가 되었다는 아버지 김봉조. 참으로 감성이 넘쳐나는 답장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아들의 시력을 걱정하여 일정 시간을 정해 두고 규칙적인 독서를 하도록 권하는 모습 역시 정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울러 부친 김대현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여막살이를 했을 정도로 조상에 대한 향념(向念)이 두터웠던 김봉조는 조상제사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리하여 편지를 통해 ‘제사절목’이나 제물의 종류와 숫자에 대한 지침을 내리기도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사절목(祭祀節目)
해마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식에서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풍년이면 30섬, 평년이면 25섬, 흉년이면 20섬을 특별히 창고에 간직하여 두었다가 제사 때에 그 4분의 1을 제사용으로 쓰도록 하여라. 고기값은 노비들이 바치는 것과 집안에 갖추어 두고 제사 때마다 쓰는 포목 세필을 쓰고, 콩 2섬, 찰벼 2섬, 실과 10말, 국수 10다발도 또한 특별히 간직하였다가 제사 때에 쓰게 할 것이다. 설·동지·삭망과 명절의 차례는 자기 가정의 형편에 따라서 지내되 정성을 다하도록 하고, 술 담글 쌀은 따로 간직한 곡식 중에서 알맞게 덜어내어 쓰도록 하여라.
제물품수(祭物品數)
한 신위마다 제사상은 한 탁자로 함께 하되 밥과 국은 각각 한 그릇, 국수와 떡도 각각 한 그릇으로 하고, 탕은 다섯 가지, 적(炙) 한 그릇, 어육은 각각 열다섯 꼬지, 과육 한 그릇, 실과 네 가지로 하여라.
자신이 객지에 있는 동안 행여 조상제사를 소홀히 지낼까 염려되어 그야말로 세세한 지침과 항목들을 일러주는 등, 일상적 삶에서 감성 넘치는 가장(家長)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였지만, 불의 앞에서는 거침없이 맞서는 강단(剛斷)을 지니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항간에서는 “간당(奸黨)의 부당함에 대해 하도(下道)에서는 정한강[鄭逑]이 맞섰고, 상도(上道, 영남 북부)에서는 김학조가 맞섰다.”라는 언설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후 김봉조는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뒤 한양에서 눈을 감았다. 추원사에 부친 김대현을 비롯하여 형제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으며, 영주 구호서원(鷗湖書院)에 부친과 함께 모셔져 있다.
고원연회도
3. 학봉 김성일을 감동케 한 김영조
김영조(金榮祖)는 1577년 한양 장의동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6세 되던 해에 부친을 따라 영주로 내려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이듬해인 7세부터 이웃에 살고 있는 장씨(張氏)라는 사람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여타 학동들에 비해 총명함이 두드러져 “훗날 문호를 일으킬 사람이다.”라는 칭찬을 듣곤 하였다.
김영조가 8세 되던 어느 해,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김대현을 만나기 위해 잠시 영주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곁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영조가 “선생님께서 이번 길에 왜인들을 감동시키셨다는데 저희들이 본받음이 될까 하여 그 내용을 알고자 합니다.” 하고 공손히 청하였다. 이에 김성일은 어린 김영조의 진지한 호기심에 감동을 받아 일본 방문길에 작성한 기행문인 <해사록(海?錄)> 3권을 건네주었고, 김영조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고는 자리를 벗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김영조는 김성일의 사위가 되었다.
1601년 25세 되던 해에 김영조는 사마시에 합격을 하고, 36세인 1612년에는 문과급제를 하였다. 그리하여 승문원정자로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올랐으며, 40세에는 암행어사의 신분으로 관서 지방 일대를 살피고 다녔다. 이후 김영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민심을 살피는 암행어사의 책무를 수행했는데, 그 배경에는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하는 강단(剛斷)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인 김봉조가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올곧은 인물이었듯이, 김영조 역시 불의 앞에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암행어사에서 돌아온 무렵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둘러싸고 조정이 날로 어지러워지자, 김영조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고향 오미리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세상과 담을 쌓은 채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1623년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김영조는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이후 여러 벼슬에 오르며 많은 업적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57세 되던 해인 1633년 김영조는 세자책봉주청부사의 신분으로 명나라로 떠나게 된다. 사실 외국 사신으로 가기에는 나이가 많았지만 김영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왕명을 받들어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를 떠나보내는 주변 사람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김상헌이 당시 김영조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지은 「조천송별시(朝天送別詩)」을 감상해 보자.
변방에서 3년 동안 이별이더니
또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
조정에 뛰어난 선비 많건만
나라 위해 혼자서 애를 쓰네
머리칼은 서리처럼 희어지는데
세상 떠난 친구가 반이 넘는다
오직 세도를 위해 슬픈 것이지
이 이별을 애석하게 여김은 아니리오.
그야말로 서리를 맞은 듯한 반백의 머리, 친구의 절반이 이미 세상을 떠난 나이에 접어든 김영조가 아니더라도 젊디젊은 신하들이 있음에도 바다 건너 먼 길을 떠나는 친구가 안쓰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라를 위한 결단이었기 때문에 더없는 존경스러움이 시편에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명나라로 건너간 김영조는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큰 풍랑을 만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석 달이 지나자 조정을 비롯하여 고향 오미리에서는 풍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대책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이 지나 배가 도착하고, 김영조는 한양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 김영조의 무사함을 전해들은 수많은 지인(知人)들이 환영을 나왔는데, 이 가운에 경상도 출신 선비 35명이 별도의 모임을 갖고, 이번 일을 계기로 ‘친목과 정치진로를 함께 하자’라는 뜻에서 ‘동도회(同道會)’라는 일종의 계를 조직하게 된다. 결성 당시 여효증(呂孝曾)이 작성한 「서동도회첩후(書同道會帖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월(越)나라에서는 귀양 간 사람이 나라를 떠난 후 고국사람을 만나면 기뻐하고, 또 몇 달 만에 만나도 기뻐했다 하니, 우리 영남사람이 고향을 떠나 한양에서 벼슬을 하면서 같은 도내(道內) 사람을 보고 기뻐하며 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같은 것이니, 기뻐하고 기뻐하는 일을 기록 않음이 옳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동도회를 강론한 기원이며 동도회첩이 이루어진 뜻이로다. 비록 한두 사람이 같은 모임을 가짐도 또한 천리 밖의 좋은 일이거늘 하물며 우리 동도한 자가 35인이나 된다. 동도회를 조직할 때에 내가 도내의 여러 어른과 여러 친구의 뒤를 따른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고, 금년 봄에 서울에서 회첩을 얻어 보니 경상도 각 읍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완전히 한 회첩에 실렸으니, 지난해에 모여서 술잔을 들며 이야기한 그 때를 기록하여 이것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장차 집집마다 전하여 자손만대 보배로 삼도록 하자.
한편, 이렇게 결성된 ‘동도회’는 도중에 중단되었다가 1972년 다시 재건되었다. 현재 가입회원은 약 2백 명에 이르며, 매년 1회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이후 김영조는 대사헌과 예조참판, 병조참판 등의 벼슬을 두루 거치고는, 1648년 고향 오미리에서 향년 72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김영조는 향내 유림들에 의해 불천위로 추대되어 봉화 오록리에 위치한 망와종택 사당에 모셔져 있다. 아울러 추원사에 부친을 비롯하여 형제들과 함께 봉향되어 있으며, 영주 구강서원(龜江書院)에도 배향되어 있다.
항해조천전별도
4.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김연조
김연조(金延祖)는 1585년 영주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8세 때 스스로 글을 지어 형제들과 친구들 앞에서 읊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는데, 다음은 김연조가 17세 되던 무렵 아버지 김대현한테서 온 편지글 내용이다.
스승에게 ‘中(중)’자를 써 달라고 하여 거처하는 방 벽에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체험하고 연구해야 한다. 또 스승에게 ‘心(심)’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능히 잘 가질 수 있으며, ‘性(성)’이란 무슨 형체이며 어떻게 해야 능히 잘 길러낼 수 있습니까?”하고 여쭤 봐야 한다. 너는 아직 어리고 배우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스승께서 잘 가르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알아듣지 못한 바가 많을 것이다. 오늘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내일 또 다시 묻기를 지루하게 여기지 말고 반드시 분명히 이해한 다음에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한편, 1601년 아버지가 산음현감으로 부임할 때 존심(存心)ㆍ양성(養性)ㆍ지경(持敬)ㆍ주정(主靜)이라는 여덟 글자를 보이면서 이것이 ‘입도적결(入道的訣)’이라고 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것은 훗날 「성학도」라는 이름으로 그려져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에 담겼다.
이렇듯 아버지로부터 깊은 애정과 관심을 받아온 만큼 김연조의 효심도 유별났다. 1602년 김대현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연조는 한걸음에 달려가서 아버지의 대변을 거두어 맛을 보면서 증세를 가늠할 정도로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큰 충격에 휩싸여 핏기 없는 얼굴로 장례를 치르고는 급기야 자리에 몸져누워 목숨을 잃을 상황까지 갔다가 간신히 되살아나기도 하였다.
자리에서 겨우 일어난 김연조는 동생들을 향해 “지난 날 아버님께서 큰 포부를 지니시고 한양에서 잠시 벼슬하고 계실 때 온갖 고생을 겪으셨다. 우리들이 훗날 봉록(俸祿)을 받는다 할지라도 차마 어떻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을 것인가?” 하면서 며칠 동안을 눈물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1613년 29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한림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못했다. 사실 김연조는 과거를 치르고 나서 아랫입술에 자그마한 종기가 생겨 쑥뜸을 했는데, 그게 잘못되었는지 온갖 치료를 해도 낫지 않고 증세가 악화될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가망이 없음을 알고는 형님들을 향해, “내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늙으신 어머니를 잘 봉양하기 어려움을 이유로 글공부에 더욱 힘써서 대과까지 했고, 또 한 글자를 읽고 구절을 외울 때마다 훗날 꼭 어머니 봉양을 잘해 보려고 애를 썼건만 지금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나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김연조가 숨을 거두기 며칠 전, 노모가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김연조는 어머니 무릎 밑에 고개를 조아리며 “불초한 자식이 불행히도 이렇게 되었으니 불효가 극심합니다. 너무 애통해 하지 마시고 이 자식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소서.” 하고는 말문을 열지 못하였다. 이어 동생들이 울면서 매달리자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적선(積善)이다.”라고 하면서 초연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며칠 뒤 숨을 거둔 김연조는 추원사에 부친 김대현을 비롯하여 형제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추원사 내부
5. 임금을 향한 충성심에 불탄 김응조
김응조(金應祖)는 1587년 영주에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6남으로 태어나 16세 때 부친을 여의고 큰형인 김봉조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였다.
17세 때부터 류성룡(柳成龍)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613년 27세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을 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크게 낙심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들어가 약 10년에 걸쳐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후 1623년 37세에 문과급제를 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치고 나서 1634년 홀연히 관직에서 물러나 영주 갈산(葛山, 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에 허물어진 정자를 구입하여 수리하고는, ‘학사정사(鶴沙精舍)’라고 이름 붙이고 ‘학사’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다음은 당시 김응조가 지은 「학사정사기(鶴沙精舍記)」의 일부분이다.
서북쪽 언덕에 옛날 임씨(林氏)의 정자가 있었는데 임씨는 가고 정자가 비어 있은 지 50여 년이다. 내가 소 한 마리로 이 정자를 사서 잘 다듬어 수리하고 앉아서 바라보니 흰 모래판 맑은 냇물이 감아 안았고 푸른 산이 병풍을 둘러 마치 그림인 양 아름답다.
스스로 산림에 의탁하겠다는 이들도 명리(名利)에 대한 집착이 끈질기면서도 말로만 세상을 벗어났노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또 산수를 즐긴다는 이들 역시 경물(景物)에 구속될 뿐이다. 물론 도덕을 지니고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뜻을 함께 한 선비들과 더불어 산림에 숨어 도(道)를 강구함으로써 즐거움을 삼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나는 재주가 없고 옹졸하여 세상에 어울릴 줄 모르기에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한 지 20년이 되었으나 이바지한 바가 아무것도 없었으니, 차라리 강호에 물러 앉아 낚시나 일삼으며 혹 흥취가 나면 성덕(聖德)을 노래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을 삼겠다.
나는 본래 말주변이 없어 입을 열면 중심을 잃게 되고 행동이 둔하여 움직이면 온당함을 저버리게 되니, 차라리 조용한 곳에 머물면서 세속과 인연을 끊음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고 허물을 줄일 것이라.
그야말로 산림처사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김대현의 아들 8형제 중에서 김응조의 기개는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당시 스스로 처사로서의 삶을 기약했지만, 청나라의 거듭되는 위협으로 인해 조정이 위태로워지자 1635년 사헌부지평에 오르고, 그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둘째 형 김영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그러나 결국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을 하게 되자, 또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영주로 돌아와서는, 그때부터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행여 중국 달력을 손에 넣으면 연호를 지워 버리는 강단을 보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인조를 마주하며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에 처해 있을 때 인조가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이때 김응조는 “지금의 원인은 왕실과 세도가(世道家)에서 백성의 이(利)를 빼앗음이요, 아문(衙門)과 영문(營門)에서 물건을 팔아 이득을 챙겼음이요, 고을 수령들이 백성들을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건의하였다. 이에 인조는 “내가 아직까지 미처 듣지 못했던 훌륭한 말이로다. 내 마땅히 오늘의 그대 말을 적어서 기억해 두리라.” 하면서 크게 기뻐한 것으로 전한다.
그런가 하면 자녀들에게는 더 없는 사랑을 베푸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김응조가 장손(長孫) 김휘도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휘도에게
약을 먹고 나서 효험이 어떤지 늘 마음에 걸리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를 불효하다고 나무랐더구나. 내 마음에 측은함이 있구나. 자식이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 뜻을 받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제 몸을 수양하고 행실을 삼가서 부모께 욕됨을 끼치지 않는 것과 욕망을 절제하고 질병을 조심하여 부모께 걱정을 드리지 않는 것이 바로 효도의 가장 기본이다. 그렇지 않고 맛난 음식으로 몸을 봉양하는 따위는 효도에 있어서는 하잘 것 없는 일이다. 너는 아이 때부터 막된 말이나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또 다시 질병을 조심하니 내가 일찍부터 그런 점을 기특히 여기고 좋아했다. 무엇 때문에 지나치게 스스로를 탓하느냐? 다시 충분히 노력을 기울여 깨끗한 마음으로 일을 살피고 책을 통해 이치를 밝혀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심경(心經)』 한 권을 먼저 보내니 이를 읽어보면 남자의 포부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만 줄인다.
스스로 불효를 하고 있다고 자책하는 손자를 위로하면서 군자(君子)로서의 올바른 길을 깨우쳐 주는 모습이 매우 정겹게 느껴진다. 김응조는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67년 향년 81세로 눈을 감았다. 향내 유림들에 의해 불천위로 추대되었으며, 현재 봉화 오록리에 위치한 종택 사당에 모셔져 있다. 아울러 추원사에 부친을 비롯한 형제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으며, 예천 물계서원(勿溪書院)과 영주 의산서원(義山書院)에도 배향되어 있다.
선화도
6. 인조 임금이 탄복한 인재, 김숭조
김숭조(金崇祖)는 1598년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8남으로 태어나 5세 때 부친을 여의고 큰형인 김봉조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였다. 1624년 27세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고 나서, 형들의 권유로 대과를 목표 삼아 성균관에 유학했으나 2년 뒤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낙담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친의 3년상을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에서 대과 준비에 전념하여 1629년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모든 급제자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김숭조를 대면한 인조는 단정한 용모와 행동에 크게 탄복하여, 어전(御前)으로 불러들여 가문의 내력 등을 물었다. 그리고 8형제의 업적을 듣고는 “과연 그대 가문은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로구나.” 하고는, 당시의 마을이름인 ‘오릉(五陵)’을 고쳐서 ‘오미(五美)’라고 하라며 새로운 지명을 하사하였다.
아울러 부친 김대현에게는 이조참판을 증직하고, 모친 전주이씨에게는 정부인이라는 직함을 내려주었다.
김숭조는 할아버지 김농(金農)의 취향을 물려받았는지 매화를 유달리 가까이 하였다. 그리하여 집안 가득 항상 매화를 심어두고 해마다 섣달이 되면 반드시 꽃을 피우도록 정성을 다해 돌보았으며,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감상을 하고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다음은 김숭조가 남긴 매화시이다.
시가 없이는 바라볼 수 없고
술이 없이는 가까이 할 수 없구려
향기는 문을 닫으면 진하게 풍기고
그림자는 밝은 달과 함께 차갑게 비치네
모습에서는 매우 친숙함을 느끼지만
그 정신은 도리어 범할 수 없구나
모진 비바람은 근심이 아니고
다만 장차 저무는 봄이 두렵다네
시와 술이 없이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매화. 비바람이 아니라 매화꽃이 지는 봄을 두려워하던 김숭조. 그야말로 매화를 사랑하는 극진함이 엿보인다.
김숭조는 문과급제를 하면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고, 3년 후에는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날마다 경연(經筵)에 들어가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유행했던 천연두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인조가 친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내가 그대의 옥 같은 얼굴을 사랑하니 부디 잘 치료해서 우리 주서(注書)의 낯이 얽지 않도록 하거라.” 하는 당부까지 했으나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1632년 향년 35세였다. 김숭조는 추원사에 부친을 비롯한 형제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분매도
죽암정(죽암서실)
미내미 뱅계미
북경재 북경재 그네줄
서쪽 비보림 한소나무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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