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용두산 용수사(청계作)

오토산 2013. 9. 24. 05:12

 

 

 

 

 

양산 통도사 말사인 안동 용두산 용수사 참배기

 

 

 추석명절을 보내고 연휴 기간이 길어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듯 연휴 마지막 날인 9월 22일은 일기예보에도 없는 비가 조금 내려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있어 야생화 탐사 가기에는 안좋은 날씨여서 사무실에 그냥 출근 하기로 했다.

 

 사무실에서 밀린 숙제 조금하고 나서 오후 3시가까이 되니 하늘이 조금 열려 어디 갈 곳이 없나 하고 생각을 하니 가까운 사찰에 한번 다녀 오고 싶었다.  이 사찰은 5년 전에 다녀오고 안 가보았는데 그동안 어찌 변했나 싶기도 하고.....

 

 가을의 정취를 맡아 가면서 용수사 입구를 들어서니 장엄한 일주문이 나타났는데 전에는 일주문으로 차량의 통행이 안되어서 일부로 우회하여 보니 이제는 승용차정도는 일주문으로 통과되도록 조치한 것 같았다...그래도 사찰 정문인 일주문으로 차량을 가지고 들어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나올적에도 우회로를 이용해서 돌아왔다.

 

 용두산의 포근한 정기를 안고 있는 용수사의 부처님께 칠배를 하고난 후 산신각에 들렀는데 이상하게도 산신각은 개방을 하지 않아 보지 못하고 바깥에서 한바퀴 돌고 사찰의 이곳 저곳을 관람 겸 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주지스님과 만나 재미 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다..주지스님께서는 한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번도 부처님이나 사찰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지 않고 그저 인생이야기를 나누어 오히려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제가 찍기는 찍었지만 사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몰라 설명을 붙이기가 조금 그래서 그냥 보시기를 바라며 용수사의 전래된 역사는 인터넷에서 인용해서 올리고자 한다.

 

 <용수사>

 

 고려 명종 11년(1181년)에 崔詵(최선)이 찬(撰)한 용두산 용수사 개창기에 따르면 용수사 개창 이전에 이곳에는 이미 古刹(고찰)이 있었으나 수차례의 산불로 인해 옛터만 남아 있었다.

 奉化(봉화) 覺華寺(각화사)의 주지인 誠源(성원)이 의종 원년(1146년)에 옛터의 수백 보 남쪽에 암자 몇 칸을 지은 뒤 입적하자 그의 문인인 處彛(처이)가 수년 동안 수십 칸으로 증축해 비로소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재력이 부족하여 각화사의 주지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고승 釋胤(석윤)에게 청탁했고, 석윤은 의종 18년에 왕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소견을 개진하였다.

 이에 국왕은 예종이 膺公(응공)이란 고승을 위해 각화사를 창건하여 화엄교리를 폈듯이 자신도 각화사에 못지않은 사찰을 지어 화엄교리를 펴고자 했다.

 그래서 釋胤(석윤)은 용두산의 암자를 추천했고 의종은 日官(일관)인 榮緯(영위)를 보내어 터를 살펴보고 龍壽寺(용수사)라 사액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증축을 돕게 하였다.

 다음 해인 1165년에는 본당(本堂)과 요사, 강사(講舍) 및 창고, 부엌 등 90여 칸을 완공하고 100여 보의 담장을 둘렀다.

 명종 3년에 용수사의 실질적인 창건주지인 釋胤(석윤)이 입적하였다.
그 뒤를 이어 제자인 雲美(운미)가 주지가 되었으며 뒤를 이어 廓心(곽심)이 주지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용수사의 창건 이후 3대 주지이며 그의 대에서 용수사가 완성되었다.


 그는 釋胤(석윤)에게 수업한 사람인데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經律論(경률논) 등 대장경을 갖추고 13층의 靑石塔(청석탑)을 세웠다. 불사가 완료되자 명종 8년에 이르러 국왕이 차(茶)와 향(香). 그리고 찬미하는 글을 보내서 700여 대중을 모으고 화엄법회와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후에도 용수사에 대한 국왕의 지원이 지속되었는데 당시에 의종의 胎藏所(태장소)였던 嚮福寺(향복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명종은 향복사에 소속되었던 노비와 토지를 용수사로 이적하고 의종의 薦福(천복)과 忌日齋(기일재)를 올리는 願刹(원찰)로 삼았다.

 이상이 龍壽寺(용수사) 창건과 관련된 용수사 개창비문에 드러난 내용이다. 조선시대의 용수사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의 불교유적이 그렇듯 소상한 기록이 없고 단지 조선중기의 고승이었던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당집」에 실린 「용두산 용수사 극락전기(極樂殿記)」를 통해 당시 용수사에 있었던 극락전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살펴볼 수 있다.

 극락전은 3칸의 황금전각으로 내부에는 아미타불 한구를 봉안하였는데 선조 11년(1578)에 공사를 하여 1580년 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용수사는 조선중기 이 후에는 聾巖(농암) 선생이나 退溪(퇴계) 선생 집안의 학문탐구의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사찰로서의 기능을 조금씩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高宗代(고종대)에 이르러서는 수만금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켜 중흥을 꾀했으나 고종 1년(1896) 乙未義兵(을미의병) 전쟁의 와중에 용수사와 부속암자인 영은암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용수사는 축대와 초석만남은 채 근 백 여년 동안 폐사지로 내려오던 것을 願行(원행)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願行(원행)과 불자들은 나라의 평안과 국운의 융성을 위해 불사를 계획하고 부지를 물색하던 중에 1992년 이곳의 부지 2만여 평을 매입하고 1994년에 법당과 요사 2동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넘의 점안식을 거행하였으며 1996년에는 대웅전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점안식을 거행하였다.

 현재 용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인 양산 통도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으며 초대주지인 願行(원행)의 뒤를 이어 梵友(범우)가 주지를 이었으며 현재는 祥雲(상운)이 주지로 있으며 寺勢(사세)를 더욱 확창시키며 願行(원행)이 못다한 나머지 많은 불사와 문제들을 잘 이루고 있다.

 

 통도사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이 곳..조계종 제16교구 본사 의성 고운사의 관할임에도 통도사 말사로 등록한 것은 아마 초대 주지스님인 원행스님께서 통도사와 인연이 깊어서가 아닐까 싶다..

 

용수사 일주문

5년전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장엄하게 건립되었다

 

용수사 가는 길

 

용수사 대웅전

 

 

 

 

 

용수사 대웅전 내

 

 

 

 

대웅전내 동종

 

용수사 산신각

 

 

산신각에서 바라 본 용수사 전경

 

 

 

 

 

대웅전 앞 석탑인데 석탑을 옥으로 만든 것 같다...

 

사창을 다니다가 이랗게 생긴 법고는 처음 구경하는 것 같다..

거북이 두마리가 무거운 법고를 짊어지고도 흐뭇해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다보탑 닮은 석탑

 

마의당(麻衣堂)

용수사에는 대웅전 좌우로 똑같이 생긴 마의당이 있어 웅장하게 보인다

 

 

 

 

마의당 전경

 

용수사 미륵전

미륵전안에 있는 석불은 북한 개성에서 옮겨온 탈북불상이라고 한다.

 

 

 

용수사 범종각인데 조금 초라한 느낌도 들지만 신섬함도 느껴진다

 

안동 용수사 금호비(安東龍壽寺禁護碑)

문화재자료  제400호

용수사 금호비는 용수사를 다시 짓기 위한 목재 보관소 옆에서 다른 장대석 등과 함께 출토 되었는데,  이 산 전체를 영세토록 금지하여 보호할 일이다.

일영(日營)이 제목을 짓고,  신해(辛亥)10월에 세운다. 라고 되어 있다.

높이 131㎝, 가로 45㎝, 세로 17㎝ 규모로 앞면에 34자, 오른쪽 옆면에 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 옆면의 글은 비석을 만든 이후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용수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단청작업 중인 마의당

 

 

옥수조

 

용수사 전경

 

 

 

준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향선원(공양간)의 모습

 

 

 

 

용수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일주문 광경을 한번더 바라 보다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