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선사문화 발원지 와룡산 역사속으로
[소재지]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와룡산
[구전] 안동 와룡산은 우리민족의 애환을 함께한 영산으로 주변 민
중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어 안동의 진산(鎭山)에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이곳에 고승들은 불국세계를 지상에 구현해 내려는 취지에
서 수다사와 웅대한 현사사(玄沙寺)를 지어 중생구제와 학문도장의
기능을 겸한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고사찰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와룡산 전면 남서쪽 기슭에 자리 잡았던 수다사는 신라시대 건축
했던 고사찰로서 전면에는 1만평 규모의 전답(田畓)이 있었던 것으
로 보아 규모가 거대하고 많은 승려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며, 고
려 말 몽고 침략전쟁으로 전소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 절터에는 돌담
과 돌로 만들어진 복개된 수로와 주춧돌 및 우물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와룡산 현사사는 현존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건축된 고사찰
로 고려의 시대정신에 따라 종교의 기능과 고승들의 비방(秘方)을
바탕으로 빈민구휼을 위한 혜음원(의방)의 기능도 겸하며, 건축
, 석공, 도예, 기와 등 각 분야의 장인 및 노동력을 갖고 있어 지역
민중들의 사회복지에 현사사는 중심이 되었다고 전한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선생은 조선중기 문신 학자로서 이황선생을
모신 팔고제(八高苦第)의 한 사람으로서 1580년 이후 공조참의 등
을 제수 받았으나 명덕(明德)을 중시해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한 후 와룡산 현사사에 들어와 후진 양성과 독
서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 하였다. 1592년 도요도미히데도시가 일본
을 통일하고 중국을 치러간다는 구실을 삼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동
래현(부산)으로 침입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서는 나라를
구하고자 이순신 장군 등이 이끄는 관군 및 의병과 사명대사를 비
롯하여 승병들이 힘을 합세(合勢)하여 싸우는 한편 당시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이여송이 이끄는 4만의 원군이 조선에서 8 개월
간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이때 명나라 이름 있는 장수들이 많이 들어
와 당시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풍수지리라 하여 산세와 물줄기의 조
화로 여러 가지 길흉(吉凶)을 예견하는 안목이 있었던 때였다.
당시 시기심이 많은 명나라 장수들은 앞으로 조선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태어나면 결국 명나라에까지도 폐를 끼칠 것이니 이를 미리 방
지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이여송은 이곳을 지나던 중 와룡산 산세와
물줄기가 잘 조화되어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는 구전
과 산세를 보고 부하를 시켜 와룡산 가랠 목재를 끊고, 젊은 학도들
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학문에 도장인 웅장한 현사사를 보고 비상히
여겨 현사사 동쪽 우백호의 산세 줄기인 재궁목재를 끓어 쇠말뚝을
박으니 붉은 피가 용솟음쳐 흙을 적시고, 와룡산이 사흘 동안이나
울었다는 말이 전설로 구전되고 있다.
이것은 명나라 이여송 원군의 행태와 만행에 맞서 저항한 현사사
승려들의 항쟁으로 물들인 피와 절규의 소리였던 것으로 보이며,
현사사는 임진왜란당시 의병들과 승병들의 항거하는 근거지라 하여
외침에 의하여 전소되어 폐사(弊寺) 되고, 시련을 당한 승려들은평
소 갈고 닭은 무술로 나라를 구하고자 승병을 결성하여 국난극복(國
難克服)에 큰 힘이 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결국 임진왜란은 안동이 낳은 문신학자 류성룡 대감의 선견지명(先
見之明)과 신의(信義)와 애국심(愛國心) 그리고 충효사상이 바탕이
된 이순신 장군의 민족애(民族愛)와 뛰어난 전락전술에 의하여 종
식되면서 조선(朝鮮)은 국난을 극복하고, 민심을 수습한 후 비로서
태평성대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임진왜란 후 신축년(辛丑年)에 천감(天監)이라는 고승이 들어와
현사사를 중창하고 누각을 비롯하여 많은 부속 채를 세워 인근에서
보기 드물게 99의 절칸 안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학문의 도장인 강
당이 있어 인근에 학식이 풍부한 젊은 선비들이 모여 덕망(德望) 높
으신 아홉 신선이라 칭하는 구백담(具柏潭)·권회곡(權晦谷)·권송
암(權松巖)·김후조(金後彫) 유일재선생 등 귀인들을 모셔와 강론을
듣고, 경전과 논어 등을 공부하며 번창하였으나 1950년 6.25 동란
이 일어나면서 한때는 와룡산 현사사에 인민군이 주둔하여 아군 전
투기의 폭격을 받아 전쟁 중에 전소되어 또다시 소실되는 아픔을 겪
었으며, 1980년대까지 현사사지 절터에 있던 높이 약 1.7m, 지름 약
4.2m의 석련대좌 (복련좌, 안상, 양련좌) 2기와 탑비(塔碑) 중 비
신(碑身)은 어디론가 반출되었고 현재는 약수탕과 탑비(塔碑) 밑에
구부(龜趺)와 주춧돌 그리고 무성한 대나무 숲이 옛 현사사의 명성
을 지키고 있다.
현사사와 수다사를 품고 있었던 와룡산은 자연의 조망과 풍광이 빼
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선사문명에 발원지로 많은 승려들이 상주하였
던 불교수행의 성지로서 민초들이 신성시하는 령산靈山터로 사랑을
받아왔다.
필자 : 김태희
'지역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두산 용수사(청계作) (0) | 2013.09.24 |
---|---|
퇴계의 발자취 간직한 맹개마을(청계作) (0) | 2013.09.22 |
선바위관광지를 돌아보고 (0) | 2013.07.30 |
금강송숲에서 삼복더위식히고 (0) | 2013.07.30 |
퇴계종택 방문 (0) | 2013.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