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서미리에서 청음선생을 만나다

오토산 2013. 12. 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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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uh512/6020

 

서미리에서 청음선생을 만나다

淸陰 金尙憲(1570~1652)선생은 본관 安東, 자는 叔度, 호는 淸陰,石室山人,

西磵老人, 관직은 좌의정, 증직 영의정, 시호는 文正이다.

중국이 명에서 청으로 교체시기에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온몸으로 맞선인물.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 노년에 청으로 압송되면서 절의를 굳게 지켰다.

 

병자호란이후 고향인 안동시풍산읍소산리 처원루에 은거하시다가

서미리에 초가 두칸을지어 청백과 절의의 정신을 담아 木石居萬石山房이라

당호를 써서 걸었으며 현재 목석거는 남아있지 않으나

7대손인 안동부사 金學淳이 선조30년(1830)에 빗집바위위에

목석거유허비를 만들어 비각속에 모셔놓았다.

 

서미골의 깨끗한 석간수를 벗삼는다는 뜻으로 서간노인으로 자칭하고

옛날 伯夷叔齋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산것과 자신의 처지가

같다고 하여 서미의 美자를 고사리미(黴)로 바꾸어 西黴라 불렀다.

서미에 은거하던중 淸이 明을 공격하기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인조18년(1640)청으로 압송되었다.

 

講麟堂은 청음선생이 낙향하여 제자들을 모아 강론하던 곳이다.

숙종15년(1689)에 지방사림에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서간사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왔으나

대원군당시 철폐되어 지금은 강린당만 남아있다.

 

세상사 한마디

충신이 없는시대가 평화로운시대이다.

충신이 생기는시기는 나라가 혼란한 시기이거나

임금이 폭군인 시기에 충신이 나타난다.

지금의 시대가 무척 시끄럽고 정국이 혼란스럽다.

정국을 안정시키고 국민을 안심시킬수없는 충신은

언제쯤 나타나려나 갑갑하기만 하네요.....

 

 

 

 

 

 

 

 

 

 

팽이처럼 뿌리가 좁은바위위에 비각을  지어놓아 가까이서 볼수없는것이 아쉽다.

 

 

 

 

 

 

 

불사중인 달마정사 

 

 

 

 

달마정사앞에서 만난 토종닭

막바지 사과추수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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