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공자를 뵙고 대성전에 절을(처음처럼作)

오토산 2014. 12. 1. 05:26

 

 

 

 

 

공자를 뵈옵고

절하여 예를 올리고

대성전 용머리기둥에 마음을 새긴다.

 

사실 우리가 중국 제남을 간것은

몇가지의 이유를 가졌지만

그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정은

곡부에 들려 공자 묘에 향을 사르고

공자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절하기 위해서 였다.

 

여러가지 디카 스켓치가 있지만

단도직입으로 대성전 스켓치만 먼저 올린다.

 

전에 우리가 대성전에 오르는 과정을 차례로 스켓치 했더니

번다하게 되어 무엇이 핵심인지 촛점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영상스켓치는 내가 움직인 동선을 무시하고

내용별로 일기적듯 올려볼까 한다.

 

공자  BC 478 년 돌아가신뒤 다음해

노나라 애공이 세칸의 사당을 지은뒤

역대 왕조의 황제가 직접 또는 대리한 직책의 관리가

사당에 직접 제를 올리고

기부나 증축을 하여 지금의 규모가 된 것이다.

 

금성옥진방으로 시작하여 3 개의 방과

영성문, 성시문, 홍도문, 대중문, 동교문, 규문각, 대성문

일곱개의 문을 지나 대성전에 오르게 되어 있는데

1 Km 가 넘는 길이의 아주 큰 규모에

466 개의 방으로 중국의 3 대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곳곳에 황금빛깔의 기와와 용틀임 기둥이 줄비하고

전각의 머리가 줄을 잇고

비림이라고 할만큼 비 들이 줄비해 있다.

 

몇차례의 방문을 한적이 있는데도

올때마다 그 규모와 꽉 짜여진 공묘의 갖춤은

찾는이들이 감탄과 놀람을 가지게 된다.

 

이번에도 그렇긴 하지만

뒤틀린 심사로 그런지 용이 새겨진 열주에선

알지 못하는 권력의 냄새가 풍기고

용이 새겨진 곳곳의 장식또한

공자를 오히려 욕보이는듯한 마음이 드는건

이또 무슨 마음일까 ?

 

년전에 로마 베드로 성당에 갔을때 가지는 묘한 기분이

 사막과 산 꼭대기에서 드린 소박한 제대와 비교되어

느끼는 무언가 박탈감이 들었드랬는데

오늘 이자리에서도 이와 비슷한 당황스런 느낌을 느낀다.

 

마음을 가다듬고

머리숙여 절하며 예를 올리고

그동안 인류에 미친 인문가치에 대한 경의를

오랫동안 머리숙여 마음에 새기고 일어났다.

 

논어를 읽고 배운분들이 몇몇이며

거기서 삶의 올곧은 길을 찾은이가 얼마이며

우리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에 영향지어진 넓이가

또한 그 얼마이겠는가 ?

 

대성전 규모가 아무리 크다해도

금빛 장식과 용틀임 기둥이 아무리 화려하다해도

어디에 그 큰 거대한 흐름에 견주겠는가 ?

 

우리는 북적이는 방문객들 틈에 끼여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대성전을 살피고있지만

위패를 모신 사당에 계신

공자의 가르침을 뼈에 새기는 사람들은

또 몇몇이나 있을것인가 ?

 

돌아서는 발걸음이

들어오는 걸음보다 더 무겁고 힘겨운건

이 또한 무슨 조화인가 ?

 

生民未有

自有生民利來 未有孔子也

 

청 황제 옹정제가 쓴 편액이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