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문화와 불천위(不遷位)에 대해
1. 吉祭
길제 吉祭, 吉祀 라고도 함. 즐겁게 지내는 제사.
부친(종손)이 돌아가시고 대상(3년상)을 치룬 후에 지내는 제사로 일종의 宗孫.
宗婦 취임식이다.
종손은 그 직책을 단순히 그냥 넘겨 받는 게 아니라 길제 (일종의 취임식)이
있어야 한다.
2. 취임식이 길제며 자손 모두 관심사이다.
그러므로 길제일에는 많은 자손과 인척, 사돈 관계에 있는 후손들이 참여한다.
비용은 대부분 자기 문중에 감당하니 길제는 문중의 큰 축제가 이 길제를 통해
문중의 정체성과 긍지,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의식이다.
종부는 길제의 꽃이다. 족두리에 원삼을 곱게 차려입고 부축을 받아 사당(祠堂)에
나아가 절을 하는데 이 의식이 길어서 대미(大尾)다.
이런 절차에 따라 불천위 선조를 비롯한 고조, 증조, 조, 부의 신주(神主)를
개제(改題)하고, ‘○○代孫, 孝玄孫, 孝會孫, 孝遜, 孝子 ○○奉 祀’라 쓰면
비로소 종손이 되고 종부가 되는 것이다.
親盡한 5대조의 신주는 묘 앞에 매주(埋主)한다.
3. 宗宅, 宗孫은 家門의 상징
종손 종부가 사는 곳을 종택(宗宅)이라 하며 그 연원은 어떻게 비롯되나?
왜 명문가를 자처하는 가문은 종택(종손, 종부)의 전통을 그토록 지키려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를 지켜온 사람은 누굴까?
한마디로 종택 문화는 훌륭한 선대 인물을 기리고 그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선대는 누구인가?
4. 시호(諡號) 와 불천위(不遷位)
우리나라 역사에서 훌륭한 인물은 諡號와 맞물려있다.
시호 이외엔 다른 훌륭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없다.
훌륭한 사람이 죽으면 시호 논의가 일어나고 시호가 내리면 국가적 인물로
공식 승인된다. 주무부처는 봉상시(奉常寺)란 기관이다.
우선 인물이 죽으면 일대기(一代記)를 짓는다.
집안 차원에서 짓는 글이 가장(家狀) 혹은 遺事이고 가장은 행장(行狀)의 기초가 된다.
가장은 초고이고 행장은 완성된 글이며, 가장은 집안사람이 쓰지만 행장은 그렇지
않고 ‘공식 일대기’이기에 당대 문장가에게 부탁한다.
시호를 받기 위한 諡狀의 기본 자료가 행장이다. 시호를 받기 위한 공적 조서가
시장인데 시장은 행장을 기초로 하며, 행장도 그렇지만 시장 또한 절대 허위.가장
되어선 안 된다.
시호는 압축되고 정밀한 의미가 부여된 文, 武, 貞, 恭, 襄, 孝, 莊, 敬, 翼, 安 등
120여 가지의 글자를 상호 조합해 짓는다.
가령
「翼」자는 思慮深遠(사려가 심원하다)
「貞」자는 淸白守節(청백하여 절개를 지켰다)
「文」은 道德博聞(인격과 학문이 높다)
「襄」은 因事有功(특정한 국사에 공이 있다)
「忠」은 危身奉上(위기에 몸을 바쳐 충성했다)
「孝」는 慈惠愛親(너그럽고 효성이 있다)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시호가 ‘文貞公’ 이라면 그 뜻은 인격과 학문이 높으며 청백하고 절개를
지킨 분이라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글자의 의미를 알면 시호를 보고도 그 분의 생애의 특징적인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가령 ‘文’이란 글자는 ‘道德博文’ 이외도 ‘敏而好學’, ‘忠信愛人’ 등 10여 가지
다른 뜻으로 쓰인다.
이순신 장군은 이름보다 ‘忠武公’이란 시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시호가 일반화된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忠武’는 ‘군인으로 나라에 충성함’이니 아주 적절하다.
이렇듯 시호의 내림은 생전의 이력으로 이미 그 可否가 어느 정도 공론화 되며,
심사의 제도의 객관성과 투명성으로 매우 엄격하고 공정했다.
사대부 최고 영예는 생전에 대제학(大提學) 벼슬이고 사후엔 시호 내림이다.
‘文’으로 發身한 선비들에게 국가적 글(文)을 총괄하는 대제학 이야 말로 영예로운
관직이 아닐 수 없으며 정승이 결코 부럽지 않았다.
또한 시호는 ‘영예로움의 표창’ 만으로 끝나지 않고,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
시호가 내려진 인물은 국가 원로나 공훈자로 추대되므로 존경과 더불어 영원히
추모 받을 권리가 합법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봐야하며,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5. 宗宅의 연원
시호가 내리면 묘비의 글을 다시 쓰고 告由한다.
황색교지(黃色敎旨)를 태워 그 연유를 고(告)하기 때문에 분황고유(焚黃告由)라 한다.
이 때 자손들은 간혹 ‘이 할아버지에 대해서만’ 이라 전제하에 은연 중
추모 논의를 한다.
훌륭한 조상을 추모하고자 함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불천위 옹립 여론이 일어나면, 여론이 향촌(鄕村)의 동의와 유림들의
公論을 얻게 되면 추모(追慕)의 집을 짓고 고유를 한다.
그 집을 사당(祀堂) 혹은 별묘(別廟)라 하며 그 안에 감실(龕室)이란 공간을 만들고
신주를 모시게 된다.
이렇게 모신 신주는 살아계신 듯 경건하고 신성하게 보호된다.
사당을 짓고 신주를 모시면 자손들은 정해진 날 추모 의식을 하며,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게 된다.
추모의 禮는 “제사”고, 손님 접대는 접빈이다.
이를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이라 하며, 이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사람이 종손이고, 그 아내를 ‘종부’라 한 나머지 자손들은 ‘支孫’이라 하며,
적손으로 내려오는 손자가 종손이고, 종손을 지원하는 자손이 지손이다.
이를 조직화 한 단체가 門中이며 이로써 한 ‘家門’이 탄생한다.
종손의 집은 다른 집과 다르게 솟을 대문의 집을 짓고 集姓村에 솟을 대문이 있는
집이 대계 종가며, 다른 명칭으로 종택 이라고도 한다. 종택은 가문탄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한편으로 자손 모두의 의지와 문화의 중심체이기도 하다.
6. 종택의 구성 요건
종택의 구성요건은 누구나 알만한(인정하는) 훌륭한 인물(조상: 시호와 불천위)이
있어야 하고, 이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 있어야 하며, 사당을 지키는 守護수호
주체의 공간(큰 집, 재실 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당 수호를 전담하는 즉, 맏아들로 이어온 직계후손 (宗孫)이 있어야 하고,
이 후손을 외곽에서 보호하는 후손(지손)들이 있어야 하고 이 지손들로 구성된
단체(문중)가 있어야 한다.
즉 불천위종택이 되기 위해선 조상, 사당, 큰집, 종손(宗孫), 지손, 문중으로
구성된 유기체가 갖춰야 한다.
이 중 하나만 없어도 종택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상, 사당, 종택은
하드웨어 격이고, 종손, 지손, 문중은 소프트웨어 격이다.
이런 구성 요건 속에 작동이 “원활히”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천위종택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 중심에 宗孫과 宗婦가 있다.
7. 處士와 不遷位
종택 불천위와 다르게 불천위로 모시는 인물들도 있다.
바로 재야학자다.
조선시대 당시 명칭은 處士라 했고, 처사는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만 부여된
극존칭이다.
조선후기에 오면 이 용어가 남발되어 격이 떨어지지만 학자에 대한 존경심은
조선 500년 내내 변하지 않았다.
대제학과 더불어 文을 숭상한 조선시대 가치관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었으며
처사불천위(處士不遷位) 신주엔 ‘處士’란 단 하나의 약력 밖에 기록되지 않았다.
( 예 : 顯先祖考後山處士府君神主 )
이런 측면에서 처사불천위 인물들 면모를 보면,
시호 이전에 학자란 전제가 우선되며, 공부하던 亭子,
남긴 문집 혹은 학문을 잇고자 지은 書院이 있으면 더욱 완벽하다.
이 가운데문집 有無가 가장 중요한데 高官의 벼슬을 지냈음에도 학자로
명성이 없어 불천위가 되지 못한 경우는 허다하다.
‘能文’은 필수조건이지만 ‘能吏’는 충분조건에 불과하다.
요컨대 명실상부한 불천위인물이란 학자, 문집, 서원, 정자 등 요건을 갖춰야 하며,
주변에 이런 인물이 있으면 거의 불천위로 보면 틀림없다.
처사는 곧 ‘학자’라 그렇다면 학자가 왜 이리 존중받게 되었을까?
인물에 대한 평가는 ‘조행과 글로’ 압축되며 조행은 行이고 글의 知의 범주에 든다.
이 중에도 글을 단연 소중히 여겼고 글이 곧 사람으로 보았기에 글과 더불어
인격 향상이 수반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文=人의 인식은 人事에도 그대로 적용 된다 보았으며
인사는 곧 ‘타인에 대한 배려’인데 글로 인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적기 않았기에
우리 조상들은 글을 소중히 여겨 글을 잘 하고 못하는 경우를 따졌다.
글은 인간을 정밀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게 하고 언행을 세련되게 기품 있는
인간으로 만든다.
재야학자 즉, 처사들이 당당히 불천위로 추앙 받은 사실에 조선시대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게 되며,
뿐만 아니라 處士 가운데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빼어난 인품과 학식이 있는 경우
私諡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8. 사시(私諡)
벼슬이 없어서 나라에서 시호를 받지 못한 경우 鄕村 사회 공론으로 시호를
증정했으니 이것이 사시이다.
지난 날 분명 향촌사회에서 사시를 받은 경우도 있었고, 이를 받은 당사자는
물론 후손들이 영예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世孝堂實記란 책에 18세기 대구의 효자이며 학자인 樂山 李翼龍(1732-1784)이
죽으니 그 제자들이 喪中에 시호를 올릴 것을 거론해 논의 끝에 述孝라 지었는데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사시는 명예 중에 명예이고 ‘조선시대다움’의 한 단면이며 처사는 관료를 넘어섰고
, 처사가 죽으면 불쳔위를 모시기도 했다.
모셨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고 매우 영광스럽게 모셨기에 향촌에서
유림의 공론으로 내리는 鄕不遷位라 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어디까지나 편의적 구분이지 개념설정이 분명한 제도적 구분은
아니며 향불천위가 있으니 그 대칭으로 국불천위란 개념이 등장한 게 아닌가 한다.
불천위와 관련된 여러 명칭은 ‘유림불천’, ‘문중불천’, ‘道遷’, ‘鄕遷’ 등이고
불천위는 그냥 다 불천위이다.
물론 국가공신이나 文廟에 配享 된 그야말로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불천위가 있고 나라에서 ‘不遷位’ 문서 내려와 불천위로 인정하는 특이한 경우도 있다.
가장 정확한 구분은 다음과 같다.
0 국불천위 : 시호를 받은 2품 이상의 관리 가운데 국가적 인물 (후대에 대상이
확대됨)
0 향불천위 : 시호를 받은 2품 이상의 관리 가운데 지역적 인물 (후대에 대상이
확대됨)
0 사불천위 : 인물의 판단 기준은 개인마다 기준과 취향의 문제이므로 말할 필요는
없겠으나 조금 다른 각도로 불천위를 모셔진 분들도 있다.
시호는 물론 학자로도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엔 문중 차원의 자기 조상
가운데 한 분을 불천위로 옹립하기도 했으니 이는 정통성과 정체성 확립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옹립된 분을 ‘私不遷位’라 한다.
이러한 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으며 거기엔 훌륭한 인물로 모시고 싶은
문중 차원의 염원이 있었을 것이다.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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