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최치원선생의 생사당이었던 무성서원

오토산 2016. 1. 23. 12:20

 

 

최치원선생의 생사당이었던 무성서원(武城書院)

 

 

논산의 다경밥상에서 점심을 먹은후 정읍시 칠보면무성리 무성서원을 찾았다.

 

무성서원이 위치한 태인은 신라시대 태산현이 설치되었던곳으로

최치원선생이 현령(泰山太守)을 8년지내고 합천군수 전출뒤 고을사람들이

선생을 기리기위해 유상대(流觴臺)위에 생사당을 지었고(先賢祠),

조선 1484년(성종 15) 선현사를 정극인이 세운 鄕學堂이있던 현위치로 옮겨

 泰山祠라 하여 무성서원의 전신되고

1554년(중종39) 부임한 태안현감 신잠이 6년후 강원 간성(杆 城)군수로 부임하자

 1549년(명종 4) 선정을 배푼 신잠의 생사당을 지었고 1630년(인조8) 태산사에

불우헌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을 추배하고

 1675년(숙종1) 명천 김관을 추가배향하고

1696년(숙종22) 최치원과 신잠의 두사당을 병합하여 武城이라 사액하여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무성서원의 원규에 따르면 <격몽요결> <소학>부터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읽으며 입학기준에 나이나 신분 상관없이

독서에 뜻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자는 무두 허락하였지만 일단 입학하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의리를 깨우침에 힘쓰며

서로 돌아보며 잡담하지 말것을 엄격히 강조하였다.

 현재 서원에는 <원규>와 성종17년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 講案),

심원록(尋院錄)등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서원은 약간의 경사진 땅에 직선 축으로 정문, 강당, 사당이 배치되어 있고

정문 현가루(絃歌樓)는 중층팔작기와집으로  2층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강당인 명륜당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28년(순조28) 복원되었으며

중앙마루와 양쪽 협실로 홑처마 발작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사우 泰山祠는 1884년 중수하여 최치원을 주벽으로 좌우에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의 위패기 모셔져 있다고 한다.

 

무성서원에 들어서니 논어에서 자유가 현감으로 갔다던 무성이 생각났으며

다른 서원과 달리 동서재가 없고 동재인 講修齋만 담밖에 세워져 있었으며

눈이 수북히 쌓인데도 친절히 안내해주신 이흥재부원장님께 감사를 드리고

최치원 선생님은 천부경 81자의 진리를 설파하여 홍익인간 정신을 전했다는

추가설명을 하여주신 이동수박사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당초계획하였던 백양사가 눈으로 인해 갈수가 없어 필암서원으로 갔다.

 

세상사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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