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행사

오토산 진민사의 역사적 가치 재조명 학술대회

오토산 2017. 7. 4. 17:34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0612

 

 

鎭民祠역사가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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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30. 진민사의 역사적 가치 재조명에 대한 학술토론회가

의성문화체육회관에서 있었다.

 

학술대회는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이 주최하여 이영호교수의 사회로

정우락 연구원장의 개회사에 이어 김주수 의성군수의 환영사와 경상북도지사를

대신한 서원 문화체육국장, 김재원 국회의원, 김영석 영천시장의 축사와

김갑주 종중대표 인사가 있었고

 

진민사에 보관된 문서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고 연구내용과 향후방향을

김윤규 한동대교수가 '의성김씨의 유래와 오토산 짐민사 사적' 학술발표와

김덕현 경상대 명예교수가 '의성 진민사. 오토제의 역사지리'에 대한 학술발표

황위주 경북대 교수가 '오토제 전존문서의 현황과 특징'에 대한 학술발표

김미영(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이 '진민사 제향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발표와 정우락 교수의 진행으로 4명의 토론자의 종합토론이 있었다.

 

 鎭民祠는 高麗太子詹事 義城君 金龍庇선생이 의성읍민에게 큰공덕이 있어

읍민들이 그 사후에 설립하여 고려시대부터 제사를 지내온 사당으로 1517년

경상도 관찰사 慕齋 金安國이 제사하는 것에 감동하여 부역을 면하게 해주고

사당이름을 지어주며 제수를 官給했다 하며 1577년 靑溪 金進(1500~1580)에

의해 묘전비 건립제안이 있어 東岡 金宇顒이 묘비명을, 鶴峯 金誠一이 주선

입석하여 수해, 한재, 돌림병때만 제사하던 것을 관청뒷쪽 사당을 지어 진민사

현판을 달았으나 소란하고 복잡하여 제사공간으로 부적합, 1656년 의성현령

安應昌이 관청 동쪽으로 옮겼고 수차례 중수를 거치던중 1868년 훼철되었고

1882년 묘소아래 오토제에 위판을 봉안하고 1890년 원래자리에 유허비를

세우고 1959년 묘소아래 제사 경내에 진민사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忠烈 金洪術선생을 제향하는 공간으로 신라말 진보 성주였고 922년

(태조5) 문소군으로 진출 의성부 성주가 되어 견훤가 싸우다가 929년(태조12)

전사하여 그 후 城隍祠를 건립하고 의성 성황신으로 모시다가 1706년(숙종32)

성황당에 위패를 안치하고 충열사라는 편액을 걸고 유교적 사우로 전환시켜

의성읍 상리리 서당골에 있고 의성김씨에 의해 매년 춘계향사를 지내고 있다.

 

 

五土山(475)은 金星으로 둥근모양으로 우뚝하면서 뾰족하지 않고 고요하면서

 뻗어내린 세력이 번창하여 의성읍에서 조망되는 산으로 중생대백악기 형성된

 자주색세일과 사암으로 구성된 퇴적암으로 청.적.황.백.흑색의 색갈을 달리하는

 흙이 나타나 오토산이란 설과 다섯갈래로 흘러 내려서 오토산이란 설이 있다.

 

 

義城은 이른시대 다양한 공룡이 서식했던 유적지로 3천년전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선돌이 세워졌고 신라초기 조문국(召文國)이 185년 신라에 정벌된

역사기록이 있고 단밀 단북지역에는 難彊離彊凍國과 弁辰彊離彊凍國,

군위 가까운 지역에 如湛國이 있었단는 설도 있으며

통일산라시대 673년 召文城(金城山城)이 축조되고 757년 聞韶郡이 설치되고

比屋縣(阿火屋縣),安賢縣(阿戶兮縣),單密縣(武冬彊知縣),眞寶縣(漆巴火縣)등이

있었으며 고려개국초 호족 洪術(金洪術)이 태조에게 귀부해 견훤과 싸우다가

929년 전사하자 태조가 감동하여 문소군을 義城府로 바꾸었고 조선시대

의성현과 안정현(비안현) 양현이다가 지방행정조정으로 1914년 의성군으로

통합, 현재 1읍17면이며 면적은 1,176㎢로 전국의 1,19%, 경북의 19.2%이다.

 

五土齋傳存文書는 김용비선생이 세상 떠난후 생전공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오토재는 집안에서 세운 재사가 아니라 고을에서 공동으로 제향한

鄕賢祠의 일종으로 재사,향현사를 후대에 하나로 통합운영하였고 전존문서

202건중 131건을 조문국박물관으로 이관하고 가장오래된것은 祠宇移創時邑

扶助記로 1656(효종7) 안응창이 의성현령으로 부임하여 진민사를 이건할때

각 고을에서 부조한 내역을 날짜별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이고 1800년대부터

1910년이전 고문서가 다양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時到 展省錄,

省墓錄 謁廟錄 參謁錄 尋齋錄 芳名錄등이며 1800년대까지 진민사 2월춘향과

8월추향 10월묘향이 별도로 존재하였으나 1870년경 진민사를 오토재 경내로

이건한 이후 8월추향을 폐지한것으로 보이고 都錄 文簿 田畓案 秋收記 冠錢

收捧錄 冠義金領收冊 出義別錄 修單案 金錢出納簿 收支一覽簿 收支記下記등

재정관련 문서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고 齋任案과 執事分定이 주목할만

하며 節目事例議事錄類가 주목할 필요성이 있고 移建 重建 修理등 문서들이

주목할만 하였다고 한다.

 

의성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원래 ,丁,具,朴이 있었으나 인구이동을

 거쳐 金,沈,洪,羅,吳,林,孫陸,張崔,黃등이 있었고 다수본관으로 편입과

후손단절등을 통해 2015 인구조사 결과 현지명과 옛지명을 본관으로 사용하는

인구는 40여성씨에 33만여명이라 하고 김씨는 10,689,959명으로 최다성씨로

21.5% 5명이상인 김씨는 1011본관이며 김씨는 신라계와 가야계로 구분했으나

귀화계, 사성계도 있고 월남김씨, 일본김씨등이 창설되고 있고

의성김씨, 문소김씨는 295,793천여명으로 義城君 金錫의 후손과

고려초까지 의성에서 살고있던 김씨 후손이 있다고 한다.

 

오늘 안동에서 벼스를 타고 의성을 가서 점심을 먹고 진민사와 충열사의 유래와

의성과 의성김씨, 씨족의 번창과정과 인구조사결과의 상이점등 새롭고 다양한

사실을 배우고 시간관계상 김미영 수석연구위원 발표를 듣지못하고 돌아왔으나

보람있는 하루를 보냈고 오늘 행사를 주최하신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사 한마디

100세 시대가 눈앞에 온다고 한들 건강하지 못하여

我足不行 내발로 걷지 못하고   我手不食 내손으로 먹지 못하며

我口不言 내입으로 말을 못하고   我耳不聽 내귀로 듣지 못하며

我目不視 내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그 무엇인들 무슨소용 있으랴!!

 

 

 

 

 

 

 

 

 

 

 

 

 

 

 

 

 

 

 

 

 

 

 

 

 

 

 

 

 

 

 

오토재와 오토산 

행사장앞에 준비된 점심식사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