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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길재선생을 모신 금오서원을 찾아서
오후 첫 답사지로 찾은곳이 금오산에서 남산기슭으로 옮겨 지은 금오서원이었는데
구미 문화재가 안동보다 적은것은 임진왜란때 많은 피해를 입어서 적다라고 하면서
금오신화의 경주 金鰲山은 '자라오'자이고 구미 金烏山은 '가마귀오'자라 하였으며
서원에 도착을 하니 서원 옆에는 전사청과 교육관을 신축중이었고
서원주변에도 보수공사중으로 서원내는 온통 풀밭으로 변해있었다.
金烏書院은 1545년(명종 22)에 최응룡, 김취문이 주창하여 고려말 吉再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570년(선조 3) 금오산 밑에 건립하여
1575(선조 8)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1602년(선조35) 선산부사 김용이 서원이 너무 멀어 관리가 불편하다는 사림들
의견을 받아들여현위치에 복원하여 1609년(광해군 1) 중수하였고
1868년 서원철폐시 존치되었다
사당인 尙賢廟에는 西를 上으로 하여 야은 길재, 점필재 김종직, 신당 정붕,
송당 박영, 여헌 장현광 5분의 위패가 배치되어 있다고 하며
강당인 正學堂은 5칸중 3칸은 마루이고 동협실(日乾齋), 서협실(時敏齋)은
온돌방으로 되어있고 강당앞에 동서재가 정면 3칸건물로 되어 있었고
정면에 揖淸樓가 있었으나 공사중이 어서 정면을 볼수가 없었다.
冶隱 吉再(1353~1419)선생은 금주지사 원진의 아들로 구미서 출생하였으며
1363년 냉산 桃李寺에서 글을 배워 1370년 박분에게 논어.맹자를 배웠으며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등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1374년 생원시, 1383년 사마감시,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 사목, 성균학정,
1388년 성균박사에 임명되었고 고려의 쇠망을 짐작, 나머지 관직을 사임하고
1400년 정종 2) 이방원이 태상박사에 임명하였으나 不事二君으로 거절하였다.
야은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게 고려말 삼은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이 즉위한뒤 그 자손을 사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진출을 인정해 주었고
세상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에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어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등 학맥이 이어졌다.
금오서원의 사당앞에는 盥洗水시 수건을 걸어두는 돌기둥을 볼수 있었고
중수기와 시판괴 원계7조목의 해설을 들으며 금오서원 탐방을 마치고
송당정사로 갔다.
세상사 한마디
金烏書院 院戒 7條
群居無禮(때지어 무례한짓 하지말것) 于索酒食(술과 고기는 삼갈것)
汚穢窓壁(건물주위를 더럽히지 말것) 損傷書冊(서책,기물을 손상하지말것)
遊戱廢業(서원서 노래하고 춤추지 말것) 衣冠不正(의관을 부정하게 하지말것)
說話亂雜(대화는 조용하고 음담패설을 하지말것)
犯此七禁者 已來則歸 未來則莫來(이 칠금을 범한자 이미왔으면 되돌아 가고
아직 오지 않았으면 아예 오지말것)
관세수시 수건을 걸어두는 돌기둥??
야은선생의 출생지마을이 멀리 보인다
신축중인 교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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