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국학아카데미 연수생들이 진주 촉석루를 찾아서

오토산 2017. 10. 18. 09:23

사진이나 동영상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0861

 

 

국학아카데미 연수생들이 진주 촉석루를 찾아서

 

 

진주성을 돌아서 도착한 곳이 유등이 많이 떠있는 남강변에 위치한 촉석루였고

 촉석루앞에 논개가 왜장과 투신한 의암이 있고 촉석루옆에는 의기사가 있었다.

 

矗石樓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고 진주의

상징으로 1241년(고려고종28) 진주목사 김지대가 창건한 이후 여러차례 중수,

 전쟁때 장군지휘소로, 평상시 과거시험장이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

 南將臺, 壯元樓불리기도 하며 임진왜란때 불탄것을 1618(광해군10)

병사 남이홍이 전보다 웅장한건물로 고쳐지어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6.25.전쟁때 완전히 파괴된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국.도.시비와 시민성금으로 지었고

 

예로부터 남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으로 평양 부벽루할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많은 시인 묵객, 화가들이 찾아 글과 그림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촉석루앞 義巖은 1593년(선조26) 6월29일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民官軍이 순절하자 왜적들은 촉석루에서 자축연

 벌였고 관기였던 論介가 나라의 원수를 갚기위해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깍지낀 손가락이 미끄러지는것을 미연에 방지하기위해) 왜장(毛谷村六助)을

 3.5×3.3m의 이 바바위로 유인하여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조선여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이다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절벽아래 작은섬처럼 떠있는 이 바위를 

義巖(본디 危岩)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조금씩 움직여서 촉석루쪽 절벽에

들러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는데 절벽에 와 닿으면 큰 재앙이 난다는

전설도 있으며 1629(인조 7) 진주선비 정대륭이 바위 서쪽벽면에 전서체로

의암이라 새겼고 남쪽벽면에는 한몽삼이 해서체로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전하고 논개의 순국사실이 알려지자 진주의 士民들은 정식이 지은

碑를 세우고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비각을 세워서 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걸어 의암과 마주하고 있었다.

 

촉석루옆의 義妓祠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논개의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40년(영조16)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창건이래 두차례의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건물은 1956년 義妓彰烈會가 시민성금으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촉석루에서 내려보는 유등이 떠있는 남강과 건너 진주시가지는 장관이었고

 2층루각 마루에는 많은사람들이 풍광을 즐기고 있었으며 의기사와 의암과

사적비등을 돌아보며 교량 하부에 설치된 반지모양의 조형물에 대한 설명등

해설사님의 상세한 설명과 일화를 들으며 창열사를 찾아갔다.

 

세상사 한마디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지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의암사적비에 적힌 시-

 

 

 

 

 

 

 

 

 

 

 

 

 

 교량 하부의 조형물이 쌍가락지를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