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백가쟁명(낙여)

오토산 2018. 11. 22. 22:50





    百家爭鳴(백가쟁명)

여러 가지 학설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많은 학자들이 서로 명성을 다툰다는 뜻으로,

많은 학자나 논객들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논쟁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百 : 일백 백(白/1) 家 : 집 가(宀/7) 爭 : 다툴 쟁(爪/4) 鳴 : 울릴 명(鳥/3)


백가(百家)는 여러 가지 학설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많은 학자라는 뜻이고,

쟁명(爭鳴)은 서로 명성을 다툼의 뜻이다.

러므로 많은 학자나 논객들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논쟁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서는 여러 가지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인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무수히 일어나 학문이 발전하고

융성했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비롯되었다.

많은 학자나 논객들이 모여 거리낌 없이 자기의 주장을 펼쳐 보이는
일을 두고

우리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이 구호는 중국 공산당이 1956년 사회주의 문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전면에 내건 하나의 정치 구호이기도 했다.

아무리 절대적인 지론의 공산주의 이론이라도 다른 사상과

개방되어 있는 상태에서 경쟁하여 그 지도적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동양 최고의 성인으로 손꼽히는 공자(孔子)는 춘추전국시대에

나온 많은 학파 중 유가(儒家) 학파를 만들어 낸 인물이다.

孔子가 만든 유가학파는 맹자(孟子),
순자(荀子)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을 통해

널리 퍼지며 유교(儒敎)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공자는 인(仁)을 강조했고

맹자는 의(義), 순자는 예(禮)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孔子의 인(仁)은 사람을 중심으로 내적인 도덕성과 외적인 예의를 존중하는 것이며,

孟子의 의(義)는 옳은 일을 하려는 내면적 본성을 말하며,

旬子의 예(禮)는 규범에 의한 외적인 예절을 말한다.

사람을 중시한 공자가 사는 이웃집 마굿간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당시 말(馬) 한필은 여러 명의 종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값이 비쌌다.
孔子는 황급히 집에서 나와 구경하던 사람들을 붙잡고

마굿간에서 지내던 종들이 무사한지 부터 물었다고 한다.

집에서 키우던 가축보다 천한 종들이 안전한지를 먼저 물어본 것을 통해

孔子가 사람이란 存在에 대해 얼마나 존중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例이다.
春秋戰國時代를 시작으로 중국에서는 공자의 유가학파를 비롯한 다양한
학파가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사상과 학문이 풍성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각 나라를 관장하던 제후들이 좀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의 인재들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가 자리잡자, 학자와 선비들은 더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기 위해

책을 편찬하고 학설을 세워 제자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 대열에 있던 학자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한다.
제자백가들은 자유로운 논쟁과 토론으로 본인이 속해 있던 학파가

옳다는 것을 주장했는데, 이런 자유토론을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한다.

百家爭鳴은 각 학파의 學說을 깊이 있게 발전시킨 肯情的인 면이 있지만,

상이한 학파에 대한 노선의 비판에만 열을 올렸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는 의미의 백가쟁명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은 contention of a hundred thoughts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백가쟁명에서 나온 자유토론은 free discussion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의 선전 책임자였던 루딩이(Lu Dingyi)가 한 연설에서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는 뜻으로,

공산주의도 다른 사상과 경쟁하면서 위치를 잡아야지 절대적인

사상으로 강요될 수 없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백가쟁명이라는 명칭은 전국시대에 사회 경제 및 정치분야에

많은 변화가 진행되면서 일순간에 그 변화에 대처하려는 사상과

학문적인 파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백가쟁명의 백(百)은 여러 가지 주장을 내세우는 학파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

當時의 학파를 보면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음양가(陰陽家) 등이 가장 대표적인 集團이었고,

그밖에도 병가(兵家), 농가(農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등이 있었다.

창시자 별로 각 학파를 살펴보면 유가(儒家)는 춘추 말기의
孔子,

묵가(墨家)는 묵자(墨子)였으며,

도가(道家)의 창시자는 역시 春秋末期의 노자(老子),

법가(法家)는 한비(韓非) 등이었다.

孔子에 의해 창시된 유가는 인(仁)과 의(義)를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면서

하늘의 덕을 숭상하고 하늘의 理致를 받들어 만물을 품어 안는

땅의 두터운 이치를 사람의 마땅한 道理로 여겨 人間 行爲의

마땅한 지표로 삼고자 하였다.

그 思想은 뒷날 맹자에 의해 계승되면서 뒷 사람들은 유가의 학설을

공맹지도(孔孟之道)로 일컫기도 하는데 그 전체적인 요지는

역(易=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과 논어(論語) 등의

사서삼경(四書三經)에서 일관되게 찾아볼 수가 있다.

노자(老子)가 창시한 도가(道家)는 장자(莊子)가 그 전통을 계승하여 넓혔으며

유가의 인위적인 예와 법가의 통치 수단을 거부하면서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는

무위의 철학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다.

道家의 주장으로는 이상적인 나라의 지향점이 적은 國土와

적은 人口를 단위로 하는 소국과민(小國寡民)에 있다고 보았다.
거기에는 압박도 없고 박해도 없으며 戰爭도 없어 사람들은 자연 상태에 맡겨지며,

간단하고 소박한 生活을 하는 것이 정치의 가장 이상적인 유형이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단행본 내용을 연상할만

 하지만 이론의 깊이에 있어서 서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反面 법가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유가의 예와 의(義)를

똑 같이 반대하면서 法治를 주장하는 특징이 있었다.

政府는 일정한 법령과 제도를 통해서 나라를 다스리되

국가에 의해서 제정된 법과 제도는 지위의 高下,

빈부의 귀천을 막론하고 지켜지도록 해야 하며

그로 인해 功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賞을 주고 罪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罰을 내려 나라의 기강을 세워야 한다는 立場이었다.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법 이외에도

술과 세(稅)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주장의 극단적인 법 적용은 진(晉)나라

시대의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폐단이 조장되기도 했다.

묵가는 시대의 혼란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핍된 사랑 탓이라고 말하면서

겸애와 비공(非攻)을 이론의 핵심으로 강조하였다.
그것은 어떤 정치권력이 자기 정치권력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반대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親하고 친하지 않고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서 나라에서는 어진 사람을 登用하여

배고픈 자는 飮食을 얻고 추운 자는 옷을 주며, 勞動한 者는

休息을 취할 수 있도록 配慮해야 한다는 것이 墨家 理論의 核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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