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열전 (漢高祖 列傳) (137)
상산 사호(商山四皓)
유방은 영포의 반란 사건을 평정하고 나자
안도의 숨을 쉬며 진평에게 말한다.
"천하를 통일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처음에는 육국(六國)만 평정하면 천하 통일이 절로 이루워질 줄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육국을 평정하고 나자 그때부터는 내부(內部)에서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골치가 아플 지경이구려."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산모(産母)가 옥동자를 낳으려면 진통을 겪어야 하듯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그만한 고통이 어찌 없을 수 있으오리까.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고난이 다 지나갔고, 이제야말로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폐하께서는 안심하시옵소서."
"언제 어디서 누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데,
무엇을 믿고 안심하라는 말이오 ?"
"이제는 반란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사옵니다.
전횡(田橫)을 비롯하여 한신, 진희, 팽월, 영포 등등 당대의 영웅 호걸들이
모두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한결같이 실패하였는데,
이제 누가 무슨 용기를 가지고 폐하에게 반기를 들 수 있으오리까.
태평 성대가 이제야말로 눈앞에 전개되었사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마음이 놓였다.
이제야말로 명실 상부한 만승 천자(萬承天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방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진평에게 말한다.
"회군(回軍)할 때에는 지방 순찰(地方巡察)을 겸해, 노(魯)나라에 들러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러 제사도 지내고,
내 고향인 풍패에도 잠깐 들러 보기로 합시다."
유방은 명실 상부, 천하 통일을 달성하고 나니 이제는 백성들에 대한 교화(敎化)에도 힘을 기울이고싶었고,
또 고향에 들러 금의 환향(錦衣還鄕)의 기쁨도 마음껏 누려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유방은 노나라에 들러 공자의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골고루 관작(官爵)을 내려주었다.
그런 후에 고향에 다다르니, 풍패에서는 관민(官民)이 모두 몰려 나와
삼현 육각(三絃六角)에 맞춰 가며 유방을 열열하게 환영해 주었다.
유방은 환영연 석상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고향 사람들을 향하여 감격에 어린 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나의 고향인 관계로 여기에는 나의 죽마 고우(竹馬故友)가 수없이 많다.
이 기쁜 자리에 그들을 모두 모셔오도록 하라 ! "
유방의 명령에 따라, 어렸을 때 유방과 함께 뛰놀던 옛 친구들이 모두 연회장으로 몰려왔다.
어떤 친구는 백발이 성성한 파파할아버지가 되어 있었고,
또 어떤 친구는 너무도 늙어서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친구도 있었다.
유방은 그들한테서 축하의 배례를 받을 때마다 손을 잡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군신지례(君臣之禮)가 아닌,
다 같은 죽마 고우로서 어렸을 때의 마음껏 뛰놀던 이야기나 나누기로 하세.
나도 늙었지만 친구들도 모두 다 늙어 버렸구먼."
유방이 이렇게 격식을 풀고 나오니,
환영연 술자리에는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윽고 취흥이 도도해 오자,
유방은 음률에 맞춰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즉흥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
바람이 크게 일어나 구름이 높이 솟았도다
大風起兮 雲飛揚 (대풍기혜 운비양)
위세를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도다
威加海內兮 歸故鄕 (위가해내혜 귀고향)
맹장을 어떻게 많이 얻어 사방을 튼튼히 지킬 것인가.
安得猛士兮 守四方 (안득맹사혜 수사방)
유방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자, 죽마 고우들도 다같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윽고 더 없이 흥겹고 즐겁던 연회가 막바지에 이르자,
유방은 좌중을 둘러보며 감격어린 어조로 말한다.
"내 비록 지금은 귀한 몸이 되었다고는 하나,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와 그대들과 같이 고향 땅에 묻히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고향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기로 하겠소."
이 바람에 좌중에는 환희의 박수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고향에서 즐거운 사흘을 보내고 장안으로 다시 돌아오니,
여 황후를 비롯하여 태자와 척비 여의 공자를 비롯한, 문무 백관들이 모두들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싸움이 없어지니, 세상은 화평하였다.
세상이 화평함에 따라, 유방은 늙은 마누라인 여 황후보다도
젊고 아름다운 척비의 궁전으로 자주 찾아가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 황후는 워낙 성품이 고집스럽고, 질투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기에 유방이 척씨 부인을 찾아가는 밤이면 이를 갈며,
"내 어떡하든지 그년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야 말리라 ! "하고 무서운 앙심을 품었다.
척씨 부인도 여 황후의 무서운 질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어느 날 밤 눈물을 흘리며 유방에게 호소하였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는 이미 춘추도 높으신데다가 근자에는 건강도 무척 약해지셨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돌아가시는 날이면 저희들 두 모자(母子)는 그날로 여후의 손에 살해되고 말 것이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나이까."
사랑하는 여인의 눈물을 본다는 것은 어떤 남성에게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방은 척씨 부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며 말한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아무 걱정도 마라."
"폐하께서는 저희들 모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
"네가 원하는 대로 지금의 태자를 폐위(廢位)시키고, 여의를 태자로 책봉해 주면 될 게 아니냐.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 말고 어서 술이나 가져 오너라."
척씨 부인은 기뻐하며 술상을 올렸다.
주색에는 누구보다도 강한 유방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영웅 호걸이라 하여도 더해 가는 나이만은 감당할 수 없는지,
유방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척씨 부인의 무릎을 베고 옆으로 눕기가 무섭게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싸이고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인지, 정신없이 코를 골았던 것이었다.
척씨 부인은 유방이 잠에서 깨어날까 두려워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본궁에 있는 여 황후는 <황제께서 오늘 밤도 서궁(西宮)으로 행차하셨다>는 말을 듣고
질투심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사정을 염탐해 보니,
"폐하께서는 지금 서궁에서 척씨 부인과 단 둘이 정답게 술을 드시고 계시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
그 말을 들은 여 황후는 불길같이 타오르는 질투심을 억제할 길이 없어
가마를 타고 서궁으로 직접 쳐들어갔다.
서궁 수문장은 크게 놀라며 안으로 달려 들어가 척씨 부인에게 알린다.
"지금 문 밖에는 황후마마께서 와 계시옵니다."
척씨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후가 오셨다면 그녀로서는 응당 영접을 나가야 옳을 일이다.
그러나 황제가 지금 자신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어 계시니,
영접을 나가려고 황제의 잠을 깨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척씨 부인은 부득이 방안에 눌러 앉은 채로,
"황후께서 납셨거든 방안으로 들어오시게 하라."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 황후는 황제가 척씨 부인의 무릎을 베고 행복스럽게 자고 있는 꼴을 보자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리하여 척씨 부인을 노려보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너는 내가 방안에 들어왔는데도 일어설 줄조차 모르니,
세상에 이런 무례한 행실이 어디 있느냐 ! "
척씨 부인은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황제가 잠에서 깨어날까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황후께서 오신 줄은 알고 있었사오나,
폐하께서 잠에서 깨어나실까 두려워서 몸소 영접을 나가지 못한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하고
말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 황후는 척씨 부인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죽여 버리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잠을 깨워 진노(震怒)를 사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두려워 여 황후는 이를 바드득 갈며,
"네년은 황제 폐하를 핑게로 사사건건 발뺌을 하고 있으니, 어디 두고 보자.
언젠가는 네년의 오장 육부를 갈기갈기 찢어 가루를 만들고야 말리라."하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황제는 그때까지도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척씨 부인은 너무도 무서운 악담에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어찌 잘못하여 용안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황제가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척씨 부인이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
황제는 부리나케 일어나 앉으며 묻는다.
"네가 울기는 왜 우느냐 ?"
척씨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알린 뒤에,
"신첩의 실수로 용안에 눈물을 떨어뜨렸음을 용서하시옵소서.
폐하께서 안 계시는 날이면, 신첩은 황후의 손에 가루가 되어 죽을 것이오니,
어찌했으면 좋겠나이까."하고 다시금 울면서 호소하는데,
그 자태가 어찌나 애잔해 보이는지 ,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복사꽃처럼 아름답고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유방은 척씨 부인이 가련하기 짝이 없어,
등허리를 정답게 쓸어주며 위로한다.
"내일 아침 조회(朝會)에서 중신들과 상의하여 너를 황후로 바꾸고,
여의를 태자로 책봉할 테니, 아무 걱정 말거라.네가 황후가 되면 누가 감히 너를 죽일 수 있겠느냐."
다음날 유방은 조회 때에 군신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한 번 거론한 바가 있듯이 태자를 여의로 바꾸기로 마음먹었으니,
경들은 오늘 이 일의 결말을 지어 주기 바라오.
나는 이미 결심을 굳게 하였으니, 경들은 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의결해 주기 바라오."
유방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숫제 조회에서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중신들간에는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런 소식은 곧 여 황후에게도 알려지게 되어 황후는 크게 놀라며,
친정 오빠인 여택(呂澤)을 궁중으로 급히 불러들여 호소한다.
"황제가 척비년에게 미쳐 태자를 폐위시키고 그년의 몸에서 태어난 여의를 태자로 책립하려고 한다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여택이 대답한다.
"제가 워낙 지혜가 부족하여, 이런 중대한 일을 올바르게 처리할 자신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장량 선생은 지혜가 많으신 어른이시니, 비밀리에 그 어른을 찾아 뵙고 상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그 어른이시라면 우리에게 좋은 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옵니다."
여 황후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장량 선생이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소.
그러나 그 어른은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파묻혀서 수도(修道)나 하고 계시니,
이런 일에 관여하려고 하시겠소 ?"
여택이 다시 품한다.
"장량 선생은 세상을 등진 어른이니까, 좀처럼 관여하지 않으시려고 할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장량 선생에게는 <벽강>이라는 아들이 있사온데, 벽강과 저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러하니 제가 벽강이를 내세워서, 장량 선생에게 부탁해 볼 생각입니다."
여황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다면 장벽강을 데리고 가서 장량 선생을 꼭 만나 보도록 하오."
여택은 장벽강을 앞장세워 가지고 장량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장량은 태자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도 일체 말이 없었다.
그런 그가 고작 한다는 소리는,
"나는 이미 세상을 버린지가 오래 된 사람이어서,
세상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오."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
여택은 등이 후끈 달았다.
그리하여 떼를 쓰듯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 황후의 특명을 받고 선생을 찾아온 몸이옵니다.
만약 선생께서 아무 계책도 말씀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저는 죽어도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겠습니다."
장량은 그래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혼잣말 비슷하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황제께서는 평소에 <상산 사호(商山四皓)>를 무척 흠모하셨으니까,
그분들을 찾아가 보면 해결할 길이 있기는 있을 것이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
여택은 그 말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선생님 !
<상산 사호>란 어떤 분들이며, 그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시옵니까 ?"
장량은 조용히 대답한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3백 리쯤 들어가면 <상산(商山)>이라는 산이 있소.
그 산속에는 네 분의 현인(賢人)이 계시는데, 그들은 영지(靈芝)라는 버섯만 따먹고 살아가는 신선(神仙)들이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상산 사호>라고 부르오.
한제께서는 일찍부터 그들을 흠모하신 나머지,
예우(禮遇)를 다해 모셔 오려고 하셨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소.
만약 그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태자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들을 찾아가 보시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움직여 줄른지,
그것은 그들을 직접 만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오."
"선생님 !
좋은 길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상산 사호>로 불리는 그분들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옵니까 ? "
장량은 입으로 대답하는 대신에 네 명의 이름을 붓으로 종이에 쓰기 시작하였다.
동원공(東園公) : 성은 중(重), 명은 선명(宣明), 한단 태생.
서원공(西園公) : 성은 기(綺), 명은 이수(里秀), 제국(齊國)태생.
하황공(夏黃公) : 성은 최(崔), 명은 소통(少通), 제국태생.
각리공(角里公) : 성은 주(周), 명은 술(術), 하내(河內)태생.
장량은 이처럼 쓴 종이를 여택에게 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귀공은 이 종이를 가지고 여 황후께 돌아가, 이분들에게 정중한 사신을 보내도록 하시오.
이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태자께서는 오랫동안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오."
여택이 대궐로 급히 돌아와 그 사실을 알리니 여 황후는 크게 기뻐하며,
이공(李恭)에게 비단 4천 필과 황금 4천 냥, 명마(名馬) 4필을 선물로 내 주면서 상산으로 곧 떠나게 하였다.
상산은 험난하기 짝이 없는 산이었다.
이공은 험악한 산을 아무리 헤매어도 <상산 사호>를 찾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 10여 일을 두고 헤매다가 우연히 영지를 따고 있는 네 명의 백발 노인들을 어느 숲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옷이 남루하고, 머리는 봉두 난발(蓬頭亂髮)인 것으로 보아, 물어보나마나
그들이야말로 <상산 사호>임이 분명해 보이므로,
이공은 그들에게 덮어놓고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네 분 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뵈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소생은 유영 황태자(劉盈皇太子)의 분부를 받들고 네 분 선생님을 찾아뵈러 온 몸이옵니다."
<상산 사호>들은 일순간 어리둥절해 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황태자의 사신 되시는 분이 우리 같은 기세인(棄世人: 세상을 버린 사람)을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다는 말씀이오 ?"하고 묻는다.
이공이 대답한다.
"황태자께서는 진작부터 네 분 선생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시와,
장차 보위에 오르시면 네 분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태평 성세를 기필코 이루고자,
네 분 선생님을 꼭 모셔 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소생이 선생님들을 모시러 왔사옵니다.
바라롭건데, 선생님들께서는 억조 창생(億兆蒼生)의 무사 태평과
국태 민안(國泰民安)을 위해 부디 하산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상산 사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가로 젓는다.
"황태자의 뜻은 매우 갸륵하시오.
그러나 우리 네 사람은 세상을 등진 지 이미 오래 된 사람들이오.
황태자께서 장차 왕위에 오르신다 하기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우리가 무슨 보필을 할 수 있겠소.
황태자께서 우리를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이오.
귀공은 섭섭한 대로 그냥 돌아가서, 황태자께 우리의 말을 전하도록 하시오."
이공은 기가 막혔다.
그들을 설득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대한 사명을 띠고 천신 만고 끝에 찾아온 이공으로서는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이공은 생각다 못해 <상산 사호>에게 새삼스럽게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애원하였다.
"실상인즉, 소생은 황태자께서 네 분 어르신네에게 드리는 예물로 비단과 황금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그리고 네 분께서 장안에 오실 때에 타고 오시라고 말도 네 필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그런데 네 분께서 황태자의 요청을 끝까지 거절하신다면,
소생은 무슨 면목으로 혼자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옵니까 ?"
<상산 사호>는 황태자가 예물을 보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적이 놀란다.
"허어....
황태자가 우리한테 예물을 보내 왔다구요 ?...
예물까지 보내 온 것을 보면, 황태자가 사람을 제대로 대접할 줄을 아시는구먼.
그러나 산속에 살고 있는 우리한테는 비단과 황금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은 것이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재물에 매수될 속물은 아니란 말이오."
이공은 점점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이렇게 까지 공박하였다.
"네 어르신네께서는 황태자가 보내드린 예물을 어찌하여 <뇌물>로 말씀하시옵니까.
존경하는 어른을 찾아 뵈러 올 때에는 예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당연한 예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황태자가 네 어르신네를 모셔 가고 싶어하는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일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이런 기회를 네 분 어르신네께서 거절하신다면,
네 분 어르신네께서는 억조 창생이 잘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까 ?
저로서는 황태자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시는 여러 선생님의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처럼 이공이 조목조목 공박하고 나오자,
<성산 사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연 태도를 바꾼다.
"귀공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우리가 너무도 고집을 부린 것 같구려.
황태자가 우리를 그처럼 만나고 싶어하신다면, 우리가 함께 황태자를 만나러 하산하도록 합시다."
이리하여 <상산 사호>들은 이공과 함께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여 황후는 그 소식을 듣고, 황태자와 함께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상산 사호>들을 극진히 맞아들이며 간곡히 부탁한다.
"황태자는 장차 이 나라를 통치하여 만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심혈을 기울일 분이오니,
네 어르신네께서는 황태자가 영명한 군주가 될 수 있도록 통치학(統治學)을 철저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에 ,<성산 사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황태자에게 성학(聖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한편, 황제 유방은 여 황후가 비밀리에 그와 같은 공작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느 날 숙손통과 주창 두 대부를 불러 이렇게 따져 물었다.
"나는 전일에 경들에게 <태자의 폐립(廢立)>문제로 특별 지시를 내린 바 있었소.
그런데 그 후에 중신 회의에서 그 문제를 어떻게 결의하였는지 아무 소식도 없으니 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
유방은 태자 유영을 기어코 폐위시키고 척비 태생인 여의를 태자로 책봉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숙손통과 주창은 머리를 조아리며 유방에게 간한다.
"폐하 !
유영 태자는 매우 영명하신 분이므로, 그를 폐위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그 옛날 진(晉)나라의 헌왕(獻王)은 여희(驪姬)를 총애한 나머지 그녀의 소생인 해제(奚齊)를 태자로 바꾸었다가,
40년간이나 나라를 어지럽힌 일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도 간신 조고의 말을 듣고,
태자를 부소(扶蘇)에서 호해(胡亥)로 바꾸었다가 나라가 망해 버렸습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지금의 황태자는 누구보다도 영명하신 분이옵니다.
폐하께서 만약 적자(嫡子)를 폐위 하시고 서자(庶子)인 여의 공자를 태자로 바꾸신다면,
저희들은 태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겠사옵니다."
중신들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니, 유방은 불쾌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나 중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태자를 억지로 바꿔치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
유방은 이렇게 되어, 불쾌한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 날 장신궁(長信宮)에 가려니까
태자 유영이 문덕전(文德殿)에서 나오는데, 태자의 뒤에는 네 명의 노인들이 따라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 늙은이 들은 웬 늙은이들이냐 ?"하고 물었더니,
네 명의 노인들은 유방에게 큰절을 올리며,
"저희들은 상산에서 내려온 <사호(四皓)>라는 늙은이들이옵니다."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
유방은 <상산 사호>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반문한다.
"아니, 당신들이 <상산 사호>라면,
내가 불렀을 때에는 그토록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떤 연유로 태자를 모시고 다니시오 ?"
<상산 사호>가 입을 모아 대답한다.
"폐하는 오만하기 짝이 없어 현사들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러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황태자는 인효 공경(仁孝恭敬)한데다가 현사를 소중히 여길 줄 아시고,
장차 대위(代位)를 이어 받으시게 되면 국태 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힘쓰셔야 하겠기에
우리들은 태자를 도와 통치학(統治學)과 성학(聖學)을 강론(講論)하고자 모두들 산에서 내려온 것이옵니다.
장차 태자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그대야말로 요순 시대(堯舜時代)와 같은 태평 성대가 도래할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나자, 태자를 바꿀 생각을 깨끗이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성산 사호>들이 유영을 성군(聖君)으로 인정해 준다면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 이처럼 다행한 일이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유방은 장신궁으로 찾아가 척씨 부인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알려주니,
척비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자는 언젠가는 황후의 손에 죽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
유방은 등을 두두려 주며 위로한다.
"여의가 비록 태자는 못 되더라도,
어느 큼직한 나라의 왕으로 보내 주도록 할 테니 조금도 염려 마라."
"저희들 모자는 오직 폐하의 은총만을 믿겠사옵니다."
척씨 부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장차 그들에게 닥쳐올
비참한 운명에 공포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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