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열전(漢高祖 列傳) (139)
장락궁(長樂宮)의 곡성
유방은 장량이 종남산으로 들어가 버린 다음부터는 마음이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마음의 지주(支柱)를 잃어 버린 것같아, 매사가 공허하고 불안하기만 하였다.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고 쓸쓸하다 보니, 건강조차 제대로 유지될 턱이 없었다.
유방은 지난 해 가을, 영포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적장 <난포>에게 화살을 맞은 일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치료를 잘한 덕택에 완전히 치유(治癒)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그때의 상처가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공허한 마음조차 한 몫 하여 몸이 날로 쇠약해 지고 있었다.
몸이 불편할 때면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 지는 법이다.
유방은 이렇듯 몸이 괴로워지자 여 황후가 있는 장락궁(長樂宮) 보다는 척비가 거처하는 서궁(西宮)에만 머물렀다.
여 황후 보다는 척비가 자신에게 더욱 정성을 다하여 살뜰하게 대해 주니, 자연히 그곳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여 황후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여 황후는 궁녀(宮女)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황제께서 몸이 불편하시다고 하는데, 서궁에만 머물러 계시니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구나.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뒷처리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걱정스럽기 짝이 없구나."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사실 여황후로서는 남편 유방이 척비의 치마폭에만 감싸여 있는 것같아 ,
괘씸하고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녀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병중에 계신 폐하께서 본궁을 버리시고 서궁에만 머물러 계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마마께서는 특별 분부를 내리시와 태자마마로 하여금 관영,주발등 원로 대부를 대동하고
서궁을 방문케 하여 황제 폐하를 장락궁으로 모셔오도록 하시옵소서.
법도상으로 보아도, 황제께서 장락궁을 놔두고 서궁에서 치료하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옵니다."
여 황후는 궁녀들의 말을 옳게 여겨,
태자로 하여금 관영과 주발을 거느리고 서궁으로 가서 황제를 장락궁으로 모셔오게 명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태자와 원로 대부들의 말을 좀처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짐은 장락궁보다는 여기에 있는 편이 마음이 훨씬 편하다.
당분간은 여기서 병을 치료하기로 하겠다.
병이란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해야 속히 나을 것이 아니냐 ?"하며
태자와 동행한 원로 대부들의 제의를 단박에 거절하였다.
이렇게 태자가 황제를 모셔오는데 실패하고 돌아와 여 황후에게 사실대로 고하니,
성미가 사나운 여 황후는 길길이 날뛰며 큰소리로 외쳐댔다.
"황제가 계집년에게 정신이 빠져도 분수가 있지,
그년의 치마폭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
어떤 일이 있어도 황제를 기어이 장락궁으로 모셔와야만 한다."
여 황후는 입술을 깨물며 어떤 결심을 굳혔는지,
태자와 여택,심이기,번쾌 등 측근을 불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신네들은 지금부터 서궁으로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를 장락궁으로 모셔오도록 하오.
만약 황제가 환궁을 거절하시거든 당신네들은 황제를 모셔 올 때까지는 서궁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오지 마시오.
나의 명령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소."
여 황후의 분노가 이처럼 극도에 달했던 것이었다.
네 사람은 서궁에 당도하자 복순문(福順門) 밖에서 알현을 고하였다.
유방은 태자 일행이 또다시 찾아왔다는 전갈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나를 장락궁으로 데려가려고 여후(呂后)가 뒤에서 이런 장난을 치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
그러자 옆에 있던 척비가 울상이 되어 호소하듯 말한다.
"폐하께서 신첩을 버리고 장락궁으로 가시오면,
신첩은 여후의 손에 죽게 되어 용안(龍顔)을 다시는 뵈올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유방은 척비의 등을 두두려 주며 위로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만은 내가 책임지고 지켜 줄 것이니 조금도 걱정 마라."
그리고 태자 일행을 병실로 불러들여 만났는데, 이때 유방의 몸은 몹시 수척한 상태였다.
처남인 여택이 유방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성상께서는 몸이 너무도 쇠약해지셨사옵니다.
젊은 부궁(副宮)과 오랫동안 같이 계셔서 건강이 악화된 것이 분명하오니,
지금이라도 장락궁으로 환궁하시어 조용히 정양을 하도록 하시옵소서."하고 말하면서
병이 악화된 책임을 노골적으로 척비에게 뒤집어씌우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척씨 부인은 너무나 억울하여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실상인즉 유방이 병석에 누운 이후에는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한 일이 없었던 그녀였다.
유방은 워낙 색을 밝히는 편인지라,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때때로 몸을 요구해 왔었다.
그러나 척비 자신은 남편의 건강을 생각해 그런 요구를 번번히 거절하지 않았던가 ?
자기 딴에는 남편의 건강을 위해 남모르게 정성을 다해 왔건만,
유방의 건강이 나빠진 것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만 돌려 말을 하니, 척비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반박을 할 수는 없어서 이를 악물고 참고 있노라니까,
이번에는 모사 심이기가 병석의 유방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폐하 ! 효성이 지극하신 태자를 비롯하여, 만조 백관들이 한결같이 폐하의 환궁을 고대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속히 환궁하시어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시옵소서."
심이기 역시 유방의 병이 악화된 책임을 은연중에 척씨 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유방은 여택과 심이기의 충고 모두가 역겹게 들리기만 하였다.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것이 척씨 부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당사자인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유방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몸이 이렇게 약해진 것은 과색을 했기 때문은 아니오.
여러 십 년 동안 전쟁을 계속해 오다 보니 피로가 쌓이고 쌓였다가 뒤늦게 몰려 왔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동안 척비의 따뜻한 간호를 받아 오면서 섭생을 잘한 덕택에 이만큼이나 유지되고 있는 중이라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병이 더욱 악화될 우려가 있으니
당분간은 이대로 편히 있게 해 주시오."
유방은 장락궁으로 가서 보기 싫은 여 황후에게 들볶이기보다는
서궁에서 척씨 부인의 따뜻한 간호를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번쾌가 별안간 얼굴을 실룩거리더니,
문득 담판이라도 하듯 이렇게 따지고 드는것이 아닌가 ?
"폐하 ! 신이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필부로 몸을 일으켜 진과 초를 모두 정벌하시고, 이제는 천하를 통일 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대업을 완수하시는 동안에 여 황후는 폐하와 생사 고락을 같이해 오신 정실 부인이시옵니다.
조강지처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이라는 말이 옛글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옛 글에서 조차 조강지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여 황후와의 의리를 저버리시고, 척씨 부인과의 애정만에 연연해 하시옵니까 ?
만약 폐하께서 그런 근본을 외면하시고 환궁하지 않으신다면,
그로 인해 부부간(夫婦間)의 정리는 상하게 될 것이 분명한 일이고,
군신간(君臣間)의 의리도 땅에 떨어질 것이 아니옵니까 ?
사태가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법도는 무엇으로 지탱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
만약 폐하께서 저희들의 간언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폐하께서 환궁하실 때까지 이 자리에서 한발짝도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번쾌도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니,
유방도 더이상은 고집을 부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음 .....
경들이 그토록 나의 환궁을 갈망한다니 내 어찌 끝까지 고집을 부리리오.
그러면 여기서 하룻밤만 더 자고 내일 환궁하기로 할 테니, 오늘은 일단 물러들 가오."
유방은 어쩔 수 없어 환궁을 승낙했지만, 여후의 곁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죽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하여 태자 일행이 돌아가고 나자, 유방은 척비를 가까이 불러 얼굴을 쓰다듬어 주면서 고백하듯 말한다.
"내 일찍부터 색을 좋아하여 그동안 수많은 계집들과 살을 섞어 왔건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온 여인은 오직 너 한 사람뿐이었다.
여후(呂后)는 조강지처로 정궁(正宮)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녀의 성품이 워낙 강맹(强猛)하여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가 전혀 없었느니라.
그러다가 양같이 온순하고 진실한 너를 만났으니,
내 어찌 너를 진심으로 아끼며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유방의 고백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 백명의 계집들과 살을 섞어 왔으나,
정작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은 오직 척씨 부인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유방은 척비를 그렇게나 사랑해 왔었고, 척비 또한 유방을 일편 단심으로 사랑해 왔었다.
그러면서도 유방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다시 없는 영광으로 여겨 왔던 그녀였다.
그런데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와서 유방이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해 오므로 척비는 ,
(이 어른이 혹시 돌아가시려고 유언(遺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폐하 ! 신첩이 어찌 폐하의 각별하신 은총을 모르오리까 ?
내일은 장락궁으로 환궁하시는 날이오니, 오늘 밤은 아무 생각도 마시고 편히 주무시도록 하시옵소서.
신첩은 오직 폐하께옵서 편히 주무시는 것만이 소망이옵나이다."
척비은 이렇게 말하면서 유방의 이마를 짚어 보기도 하고, 이불을 감싸 주기도 하였다.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애써 감추려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방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고 나서 말한다.
"오오, 고마운 말이오다.
네가 아니면 나를 이렇게 진심으로 위로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느냐.
내 비록 천하를 얻었다고는 하되, 죽고 나면 천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기에 나는 죽을 때까지 네 곁에만 있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議論)이 하도 분분하여, 내일은 어쩔 수 없이 환궁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척씨 부인은 이를 악물어 슬픔을 씹어 삼키며 대답한다.
"폐하 !
신첩은 폐하의 신금(宸襟)을 모두 다 알고 있사오니, 아무 말씀도 마시고 오늘밤은 편히 주무시도록 하시옵소서."
"고마운 말이로다.
그러나 내가 네 곁을 떠나기 전에 꼭 한 가지 당부를 해둬야 할 말이 있다."
<당부>라는 소리에 척씨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들려주시옵소서."
유방은 한동안 숨을 가다듬다가 속삭이듯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내가 죽고 나면, 황후가 너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여기를 떠나는 길로 아무도 모르게 여의(如意)가 있는 <한단>으로 피신을 하도록 하여라.
그렇잖으면 네 신변에 어떤 참변(慘變)이 일어날지 모른다.
허니, 너는 내 말을 명심하여 반드시 민첩하게 행동하도록 하여라."
유방으로서는 척비를 위한 최후의 애정어린 배려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척씨 부인은 사무쳐 오르는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어
유방의 이불 위에 얼굴을 파묻고 이렇게 울부짖었다.
"폐하께서 생존해 계시는 한,
신첩은 장안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을 생각이옵니다."
사실 척씨 부인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살아 있는 남편을 내버려두고 피신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유방은 척씨 부인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 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말했다.
"네 심정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로다.
그러나 내가 장락궁으로 돌아가면, 너를 다시 만나 보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서로 만나 보지도 못하면서 장안에 남아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허니 너는 내가 죽기 전에 속히 여의한테로 피신을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척씨 부인은 울면서 도리질을 하였다.
"설사 폐하를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해도,
신첩은 폐하와 같은 궁(宮)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스럽사오니,
피신하란 말씀만은 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유방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척비의 운명이 점점 걱정스러웠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너는 피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나면, 너는 피신조차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후가 무서운 계집이라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총에 가슴이 메어 오는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이 몸이 황후의 손에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께서 생존해 계시는 동안만은 장안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아니 하겠사옵니다."
유방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던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네 결심이 이처럼 확고 부동하니, 이것도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운인가 보구나.
그러면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
내가 숨이 답답하구나, 네 손으로 내 가슴을 좀 쓸어 다오."
척씨 부인이 가슴을 쓸어 주자, 유방은 몹시 지쳐 있는 듯 이내 잠이 들었다.
(이것이 남편에 대한 나의 마지막 봉사가 될지 모르겠구나....)
척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설움과 슬픔이 밀려 들어 뜬눈으로 밤을 새워 가며 남편의 가슴을 마냥 쓸어 주면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유방은 만조 백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봉련(鳳輦)위에 누워 장락궁으로 향하였다,
많은 시의(侍醫)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척씨 부인만은 따라갈 수가 없어서,
서궁 담장 밖에 몸을 기대고 서서 멀어져 가는 봉련을 눈물로 전송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유방이 장락궁 내전에 자리를 보존하고 눕자,
여 황후는 신바람이 나는 듯 시종들을 별실로 불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황제께서 환궁하셨으므로 척녀(戚女)가 도망을 갈지 모른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년이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하라.
그리고 서궁에서 많은 의원들이 황제를 따라온 모양인데, 그 엉터리 의원들을 모조리 쫒아내거라.
내가 명의를 따로 불러 와야 하겠다."
유방이 중태에 빠진 원인을 척씨 부인에게 있는 듯한 말투였다.
여 황후가 진평에게 묻는다.
"명의가 어디 있는지, 진평 대부는 명의를 빨리 불러오시오."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여기서 산속으로 2백 리쯤 들어가면, <역양>이라는 명의가 있사옵니다.
이미 사람을 보내어 그 사람을 불러 올리고 있사오니
그 사람이 치료하게 하시면 반드시 신효가 있을 줄로 아뢰옵니다."
얼마후 불려온 역양은 유방을 신중히 진찰을 해보고 유방에게 품한다.
"폐하의 병은 결코 못 고칠 병이 아니옵니다.
소생의 약을 한 달만 잡수시면 완전히 회복하실 수 있사옵니다."
유방은 그러잖아도 자기가 데리고 온 의원들을
모조리 쫒아 보낸 여 황후의 처사가 몹시 비위에 거슬렸던 판인지라,
역양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너는 어느 산골에서 굴러먹던 돌팔이 놈이냐 !
나는 한 자루의 검(劒)으로 천하를 얻을 만큼 천명(天命)을 타고난 사람이다.
따라서 나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거늘,
너 같은 돌팔이가 감히 어느 앞이라고 병을 고치느니 어쩌니 하고 돼먹지 않은 수작을 하고 있느냐.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거라 ! "
역양은 혼비 백산하여 어전에서 사라져 버렸다.
유방은 이미 각오한 바가 있는지, 그날부터는 약도 먹지 않았다.
그는 서궁에서 억지로 끌려온 것이 그렇게도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유방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보이자,
여 황후는 만일의 경우에는 대권(大權)을 자기가 장악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유방에게 슬쩍 이렇게 물어 보았다.
"소하 승상이 건강이 좋지 않아 하야(下野)하겠다는 말이 있사온데,
만약 소하가 사임을 하겠다고 하면 승상의 자리를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까 ?"
유방은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소하가 기어코 승상의 자리를 내놓겠다면,
조참(曺參)을 승상에 임명하도록 하오."하고 대답한다.
여 황후가 다시 묻는다.
"조참 이외에 승상이 될 만한 인물로 누가 또 있사옵니까 ?"
유방이 다시 대답한다.
"그 다음 적임자는 왕릉(王陵)이오.
그러나 왕릉은 지혜가 다소 부족한 편이므로
왕릉을 승상으로 등용하려면 진평을 보필자로(輔弼者)로 곁들여 줘야 하오."
"그러면 진평을 직접 승상으로 등용하면 어떠하겠습니까 ?"
"진평은 지혜롭기는 하나
나라를 혼자서 다스려 나갈 만한 도량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유방은 수많은 인물들을 수족처럼 써 오며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한 위인인지라,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여 황후는 크게 기뻤다.
남편이 죽고 난 뒤 대권을 장악하게 되면, 유방의 의견이 많은 도움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여 황후는 다시 물었다.
"주발(周勃)은 어느 정도의 사람이옵니까 ?"
유방이 대답한다.
"주발은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학식이 없는 사람이오.
그러나 우리 유씨 일가(劉氏一家)를 위해서는 주발처럼 충성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 다음에 믿을 만한 사람은 또 누구누구가 있사옵니까 ?"
여 황후가 끈질기게 물어 보니,
유방은 그제서야 무슨 눈치를 챘는지 별안간 짜증스럽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 다음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
내가 죽으면 태자가 내 뒤를 이어 나갈 것인데,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오 ?"
여황후는 그제서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황태자 영(盈)이 병문안을 오자, 유방은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유언하듯 말했다.
"나는 암만해도 이번에는 살아날 것 같지 않구나.
그러나 태자인 네가 워낙 인후(仁厚)하여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갈 것이니, 그 점은 마음이 든든하구나,
마지막으로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태자는 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 눈물을 씹어 삼키며 아뢴다.
"아바마마의 말씀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어서 분부를 내려 주시옵소서."
"음 ......
고마운 말이로다."
유방은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다가,
아들의 손을 새삼스럽게 잡아 흔들며 조용히 말한다.
"네게는 여의(如意)라는 이복 동생(異腹同生)이 있지 않으냐.
내가 죽고 나면 그들 모자의 운명은 순전히 네 손에 달려 있게 된다.
너의 어머니는 그들 모자를 몹시 미워하지만, 나로서는 그들 역시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마누라로다.
애비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들이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아들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너는 그 점에 각별히 유념하여 조왕 모자(趙王母子)를 끝까지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임종이 눈앞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도 유방은 여의와 척씨 부인의 운명이 그렇게도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태자는 유방의 손을 움켜잡고 맹세하듯 말한다.
"아바마마 !
소자가 아바마마의 은혜와 동기간의 관계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오리까.
그 점은 아무 걱정 마시고, 속히 병이나 치료하도록 하시옵소서."
"아니로다. 나는 이미 천명이 다 된 사람이다.
허니,너는 나의 유언을 꼭 지켜 주기 바란다."
유방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마지막 숨을 거두어 버리니,
때는 대한(大漢)12년 4월 갑진일(甲辰日)이었고, 그의 보령(寶令)은 63세 이었다.
그리고 새로 보위에 오른 혜제(惠帝)는 유방을 한고조(漢高祖)라는 존호(尊號)로 부르게 하였다.
* 글 끝에 붙여.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한고조(漢高祖)유방(劉邦)이 세차게 겨뤘던 초한 정국 투쟁(楚漢政局鬪爭)은
두 영웅이 죽음으로서 끝을 내어야 할 것 입니다.
그러나 두 영웅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한고조 유방이 남기고 간
<여 황후와 척씨 부인>과의 마무리가 한 편 더 남아 있습니다.
~~140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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